MBC 파업 대체인력 사건 혹은 계약직아나운서 사건? 뭐라 불러야 적절한지부터 단정적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부당해고 판결이 나왔다.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조직적 왕따는 왕따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파업효과 무력화를 위한 대체인력으로 가담한 것도 사실인 것 같고, 그런 행위에 대한 파업노동자의 정서적 거부감도 정규직의 차별의식으로만 치부할 반응은 아니라고 여겨졌다. 그렇더라도 일련의 논란 속에서도 객관적으로 인정해야 할 지점은 있고, 거기서부터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째, 파업은 절박한 권리이며, 그 권리를 파괴하는 일에 자기 의지로 가담했다면 그 행위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는 교훈은 필요하다는 점. 둘째, 아나운서들이 힘없는 계약직이 아니라 정규직이었다면 이번 사건은 불거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실제로도 대체근로를 주도한 정규직이 그 대가를 치렀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즉 이번 논란은 정규직 고래 싸움에 등터지는 비정규직 새우의 구조적 아픔을 보여준다. 나아가 이번 사태의 원인을 직시해 파업 파괴행위를 방지하는 제도(단체협약 등)를 만드는 개선책은 손도 대지 않고, 약한 고리인 비정규직을 쳐내 교훈을 남기려는 점도 씁쓸하다.
MBC 파업대체인력 사건은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 시행 후 최초의 진정 사건이다. 이로 인해 사건은 더욱 주목받았고, 유명 정규직 아나운서들까지 발끈해 괴롭힘 진정에 대한 비판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파업파괴라는 불의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여기는 정규직아나운서들의 감정은 일면 정의감이기도 하다. 그러니 괴롭힘이란 말은 견딜 수가 없고, 세간의 논란을 무릅쓰고 공개 반박에 나선 것으로 이해된다. 허공에 흩어지는 말이라도 때론 그 주인이 있고, 주인들에 의해 정확하게 사용될 때 설득력을 발휘하고 공감도 얻는다. 괴롭힘과 차별이란 말도 그렇다. 만일 대기업 사장이 직원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거나 차별을 당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말에서 진실은 성립되지 않는다. 괴롭힘이나 차별은 약자들의 언어이기 때문인데, 강자들은 괴롭힘을 당할 수가 없고 차별을 당할 수 없는 존재이며, 그래서 강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파업 대체인력 아나운서들이 억울하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 말은 과연 정확하게 사용된 말일까? 이 괴롭힘은 과연 가해와 피해의 경계가 그토록 명확한 사안일까? 난 다소 혼란스럽다. 어떤 유명 아나운서는 대체인력 아나운서들은 괴롭힘이라는 말을 쓸 주인일 수 없으며, 정확하게 사용된 주장도 아니라고 여긴다. 그렇기에 “너희의 고통을 직장 괴롭힘의 대명사로 만들기에는 실제 이 법이 보호해야할 대상이 우리 사회에 차고도 넘쳐, 마음이 아플 뿐이다.”라고 말한다. 즉 파업 대체인력으로 들어와 남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괴롭힘 방지법으로 정작 보호받아야 할 노동자는 따로 있는데 이번에도 또 남의 언어를 가져야 자신의 이익을 이루려고 한다는 지적으로 읽힌다.
이 감정이 이해된다. 그럼에도 강자가 약자들을 향해 던지는 말은 더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그 책임과 배려를 교모하게 피해 횡행하는 강자들의 선동이 정규직 혹은 남성을 ‘역차별’한다는 말이고, ‘을질’이라는 말이며, ‘공정함’이라는 말이다. 학교비정규직(교육공무직) 파업 후 나는 각종 온라인 공간에 떠도는 일부 정규직들의 비난의 말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공무원, 특히 교사와 같은 신분획득을 바라는 게 아니라고 숱하게 공식입장을 밝혀도 그들은 혐의를 거두지 않았고, 불공정한 요구를 한다고 비난한다. 비정규직의 업무 범위조차 정하지 않고 주먹구구식 운영을 하는 시도교육청들의 책임은 묻지 않은 채, 기준도 없이 내키는 대로 각종 허드렛일까지 비정규직에게 지시하고 이를 거부하면 을질을 한다고 또 비난한다.
심지어 학교의 행정실장 등 일부 교육관료들은 자신들은 박사급이라는 특권의식까지 드러내며, 이에 비해 비정규직인 교육공무직은 업무에 대한 책임감도 자질도 부족한 집단이라고 일반화해 비난하기 일쑤다. 때문에 비정규직의 공정임금제(최하위 직급인 9급 공무원의 80% 수준의 임금) 요구조차 과한 이기주의라고 공격하며 다른 교사들과 공시생까지 부추긴다. 비난 이유가 아이들을 위한 교육재정을 지키고 공정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하게 사용된 언어가 아니다. 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면 모를까 교육공무직 전체를 직무에 불성실하고 교육에 무책임한 집단으로 매도할 보편적 근거는 없다. 교육재정의 문제도 그렇다. 교육부와 교육청들이 교육공무직을 공식적 신분으로 인정해 인건비를 따로 관리했다면 “교육재정 갉아먹는 바퀴벌레”라는 모욕까지 당하는 일은 애초에 없었다. 즉 교육공무직을 학교의 공식 인력체계로 인정하지 않고 사업의 일부로 종속시켜 운영하는 교육당국의 차별과 무책임이 근본 원인임에도, 말의 칼날은 교육당국이 아닌 애꿎은 교육공무직으로 향한다.
비정규직 파업과 처우개선 요구를 비난하는 정규교사의 일부가 온라인사이트에 올린 글 중 일부를 발췌함
물론 일부 보수적 교사들의 말이 그렇다. 반면 적지 않은 교사와 학생, 학부모 심지어 교장들도 학교비정규직의 파업은 정당한 권리이며, 필요한 요구임을 이해하고 지지했다. 감사한 일이다. 교사의 책무와 역할이 학교교육의 중심이기에 교사들의 응원은 더욱 힘이 된다. 그 중의 한 분이 아닐까 믿고 싶은 교사가 있다. 주변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분으로 보이는 그 교사는 이번 MBC사태에 대해 이렇게 단언했다.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시행되자마자 MBC 계약제 아나운서들이 첫 테이프를 끊었다. 길을 닦아 놓으니 불청객이 먼저 지나가는 격”이라며, 파업파괴 행위자에게 정당하게 책임을 묻는 것이며 단호한 교훈이 필요하다는 파업노동자의 주장을 지지했다. 그러면 학교비정규직 파업에 대한 대체인력은? 파업 당시 돌봄전담사와 방과후유치원교육사의 자리를 대체하고, 영양사 업무를 대체하고, 사서와 전문상담사를 대체한 정규교사들은 무슨 일을 한 것일까? 대체근로를 하고 돌봄교실 운영비로 수당까지 받기도 한다는데, 교육자의 양심이고 막중한 책임감의 발로인 것일까? 왜 누구도 이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 물음을 “당신들이나 잘하세요”라는 시비로 읽지 말아주길 부탁드린다. 연대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만, 그에 앞서 서로 갈등하는 불편한 현실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다. 우리는 일부 교사들의 행태 때문에 교사라는 이름 전체를 모욕하고 싶지 않다. 솔직히 우리는 그들보다 약하다. 숫자도 적고 법적 지위도 없으며, 처우도 권한도 낮아 자존감마저 낮아진다. 어쩌면 학교비정규직이 가진 유일한 힘은 파업권뿐이다. 그 파업권으로 정부의 잘못된 교육정책과 교육청의 잘못된 인력운영을 바꾸고 싶다. 교육권력에 맞서 교사-공무원-교육공무직 모두가 서로 연대하길 바란다. 학교현장에서 벌어지는 교사와 비정규직 간 갈등을 극복하고 싶고, 위계와 서열화 경쟁에 찌든 교육체제를 함께 바꾸고 싶다. 게다가 공정임금제 요구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원칙에서 한 발 물러난, 오히려 소극적 요구다. 그러니 우리는 필요하다면 다시 거침없이 파업할 것이고, 그 때는 교사사회가 “대체근로 지시를 거부합시다”라며 더 용기 있는 연대를 고민해주길 기대한다.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더라도 포기할 길도 아니며, 정규직에만 반성을 촉구할 일도 아니다. ‘연대’는 말 그대로 서로가 함께 만들어가는 가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