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집 : 사라진 불씨, 이어진 향기
양날의 검이었다.
누군가를 품으면 그에게 남을 상처가 두려웠고
품지 않으면 나를 덮칠 쓸쓸함이 두려웠다.
결국 내가 붙잡은 건
나의 이기심이었다.
그날,
온 동네 꼬마들을 불러 모아
능소화 집 들판에서 쥐불통을 돌리고 있었다.
아이들 손에서 쥐불통이 원을 그릴 때마다
불씨가 어둠 속으로 튀어 나갔고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다.
불빛이 번쩍일 때마다
하늘의 별들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나뭇잎을 긁어모아 쥐불통에 넣으면
꺼져가던 불씨가 금세 다시 살아났고,
빨갛게 달아오른 불빛이
아이들 얼굴을 환하게 비춰
우리는 그 빛에 취해 웃음을 터뜨렸다.
꺼져가는 불씨에 재빨리 쥐불통을 돌렸고
살아난 불씨에 신나
그만 깡통을 하늘 위로 던졌다.
하늘의 별과 맞닿은 쥐불통의 불씨가 번쩍이던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하필이면 그 쥐불통이
우리 집 능소화 담장으로 날아가 버렸다는 것을.
그날,
온 담장을 태울 뻔해도
혼나지 않았다.
사랑의 매를 맞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조용하기만 했다.
심심한 반응에
무모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집에서 큰소리가 나길 바랐던 것 같다.
꺼져가는 쥐불통을 돌리면
살아나는 불씨처럼.
생명 또한 다시 살아날 줄 알았다.
우린 모두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어떤 불은
다시는 깜빡이지 않았다.
빛나지 못한 채 꺼져버렸다.
그게 죽음이라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며칠간 집안은 알게 모르게 적막이 감돌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여느 때처럼
불을 돌리며 웃고 떠들었다.
그날,
능소화 담장을 태울 뻔했던 불씨가 모두 꺼지고
마지막 쥐불통을 손에 든 채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할머니가 가장 아끼던 성경책을
잘게 찢어
부뚜막 불쑤시개로 쑤셔 넣던 모습이었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며 타들어갔고
매캐한 냄새가 목을 죄었다.
방 안은 기묘할 만큼 고요했고
불빛만이 살아 있는 듯 깜빡였다.
눈물조차 흐르지 않던
허망한 그 얼굴.
불빛에 비친 옆모습은
일그러지고 굳어 있었다.
큰어머니의 죽음은 끝내
할머니의 오랜 신앙마저 꺾어버렸다.
부뚜막에서 한 장, 한 장 타들어가던 성경책과
“신은 없다”는 할머니의 작은 중얼거림.
매년 능소화는 담장을 타고
불길처럼 번져 피어났지만
그녀의 품은 반대로 늘 텅 비어 있었다.
끝없는 공허가
끝내 그녀의 삶마저 삼켜버렸다.
그때,
내가 그녀의 양녀로 가기로 결정되었을 때.
하루를 남기고 번복되었을 때.
늘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묘하게 슬픈 눈빛이었다.
언니의 긴 머리를 땋아주던 손길,
내 무릎에 약을 발라주며 호호 불어주던 손길.
한여름 드마루에 누워
동화책을 읽어주던 목소리.
그런 순간마다
우리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엔
늘 서글픔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능소화집 아래에서
그 표정을 오래도록 지켜보곤 했다.
사라져 간 불씨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나는 꽃 향기에 기대며 살아가기로 했다.
오직 나의 꽃에게만.
누군가에게 상처 주기 싫어서
누군가를 불행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 사람 하나만 바라보며.
그러다 가끔—
넝쿨째 피어 있는 꽃들을,
아이들이 뛰노는 가족들을,
나는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럴 때마다 꺼내보는 거울 속에서
내 얼굴 속에서
익숙한 그 얼굴을 발견하곤 했다.
웃고 있지만 오래 머물지 못하는 웃음,
빛을 머금지 못한 눈동자에 스며드는 그늘.
그 웃음은 금세 사라질 빛 같았고,
그 눈빛은 깊은 물아래 가라앉은 그림자 같았다.
거울 속 눈빛은 사라진 듯하다가도
내 안에서 오래도록 잔향처럼 머물렀다.
꺼져가는 불씨 하나를 붙잡듯
쓸쓸하고 위태로웠던 그 모습.
사라진 줄 알았던 그 향기가
아직 내 곁에 남아 있는 듯한—
능소화, 그날의 그 향기가
잠깐 스쳐 지나간다.
― 끝에서
능소화의 불빛 아래서
꺼진 생과 남은 향기에 대해 배웠습니다.
다르게 사랑하고자 했지만
그 쓸쓸한 마음마저
결국 나는 그녀를 닮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