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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에서나온사람 Jul 24. 2022

성우 녹음을 준비하는 감독의 자세

[애니메이션 성우 캐스팅, 선녹음 준비]

애니메이션 성우 녹음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선녹음을 하거나 후시녹음을 하거나.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이하 안임신)>은 선녹음을 택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1. 성우의 목소리를 듣고 애니메이팅을 하면 캐릭터의 감정 표현이 더 풍부해지고 싱크가 잘 맞는다.

2. 배우를 기용하는 경우에는 애니메이션에 맞춰 후시녹음을 진행하기 어렵다.


선녹음의 단점도 있다. 미완성인 그림을 보고 연기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디테일이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애니매틱을 최대한 상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팀은 레이아웃이 완료된 단계의 그림을 편집하여 녹음을 진행했다.



러프 콘티


위 그림은 아직 스탭을 꾸리지 않았을 때 혼자 그린 러프 콘티이다. 일단 시나리오를 컷으로 나누고, 각 컷을 그냥 떠오르는대로, 손에서 나오는 대로 그린 그림이다. 대신, 존잘 스탭을 고용한 덕분에 아래와 같이 멋들어진 스토리보드가 나왔다. 성우 녹음 전에 애니매틱 편집을 위해서는 가이드녹음이 필요하다. 성우지망생을 고용하거나, 스탭끼리 역할을 나눠맡아서 녹음하기도 하는데, 빠른 진행을 위해 나 혼자 다 녹음했다. 애니매틱이 전부 한 사람의 목소리다보니,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혼란스러울 수 있다.


애니매틱 (가이드 녹음)




애니매틱을 준비하는 틈틈히 성우캐스팅도 진행해야했다. 거창한 오디션 같은 것은 하지 못했다. 녹음 스튜디오에가서 우리 작품의 방향성, 각 캐릭터의 성별, 나이대, 성격을 잘 설명 드렸다. <안임신> 성우 캐스팅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흔히 말해, '쪼'가 없는 자연스러운 연기 톤이었다. 첫 미팅을 하고 한달 쯤 뒤, '성우 샘플'이라는 제목으로 음성 파일 네개가 메일로 들어왔다.캐릭터의 앙상블을 편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편집된 음성 파일이었다. 성우의 이름은 전혀 기재되어있지 않았다. 파일명 sample1.wav 가 다였다. 우리 팀은 그 녹음 파일을 같이 듣고, 그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번호를 골라 전달했다. 그렇게 확정된 주인공 성우진은 다음과 같다.


최정환(남자주인공) - 엄상현 성우
강유진(여자주인공) - 정유정 성우


성우캐스팅에 대해 감놔라 대추놔라 여러 말을 많이 들었다. 지도교수님은 성우말고 배우를 기용하라고 거듭해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연극배우 몇 분을 소개 받아 목소리를 들어보았지만, 2D캐릭터에 딱붙는 연기란건 역시 성우만이 할 수 있는 전문 영역이었다. 근데도 교수님은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래도 김삼신 박사는 배우로 알아봐.
이 한 명의 목소리톤이 작품 전체 색을 좌우할 수 있어.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솔직히 배우를 알아볼 여력이 없었다. 녹음 스튜디오에서 최상의 재료와 양념으로 구성한 밀키트를 준비해주는데, 뭣하러 밭에 가서 땡볕아래 감자캐고 고추따고 있겠냐고. 이번 작품이 마지막도 아닌데 다음에는 배우를 써보지 뭐. 하고 교수님 말을 한 귀로 흘리려고 했다. 근데..! 갑자기..! 원화가 선생님이 언젠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가 요즘 드라마 우영우를 보고 있어서...)



나는 김삼신을 보면 말이야, 그 사람 생각나.
경무 감독, <태양의 주군> 봤어요?
그 사람 목소리가 정말 딱일 것 같아.



나는 태양의 주군 드라마를 안 봐서 누굴 말하는지 검색을 해야 했다. 드라마 제목을 입력하고 엔터키를 딱 치는데, 이용녀 배우가 나오는게 아닌가?



 어머, 작감님!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저희 캐릭터 디자이너가
이용녀 배우 사진보고
그림그렸잖아요!
호호호.


웃긴다. 스태프가 목소리를 이야기하는데, 나는 캐릭터디자인을 칭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머리 속에 '목소리'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목소리가 어울리겠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배우를 진짜로 기용할 생각을 전혀 못했다. 본인의 어리석음을 뒤늦게 깨달은 초짜 감독은 그제서야 인맥을 동원하여 이용녀 배우를 김삼신 역에 캐스팅했다.






2021년 11월 30일.


드디어 성우 녹음. 안임신 시놉시스를 처음 쓴 날로 부터 약 1년 만의 일이다. 사실 나는 아주 많이 지쳐있었다. 한 해동안 매일 똑같은 것만 쳐다보고 있으니, 이제 내가 쓴 이야기가 재미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일 하는게 즐겁지가 않았다. 제작 진도에 쫓겨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작년 겨울을 지냈다. 녹음 날도 스튜디오에 바로 출근해서 혼자 잔뜩 얼어있었다. 녹음하고 나면 시나리오 수정은 더이상 불가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매우 불안했다. 연기 디렉팅도 해 본 적 없는 초짜가, 또 기라성 같은 성우님을 모시게 되었으니 긴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정신이 없어서 멋들어진 녹음실 사진도 하나 못찍은 초짜 감독..


아침 10시. 정환,유진부터 시작했다. 녹음에 앞서 PD님이 작품과 인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해달라고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 안 난다. 횡설수설한 것 같다. 그러나 녹음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대사가 좀 어색한 것 같으면 그 자리에서 함께 고치면서 녹음했다. 베테랑 성우님과 녹음 디렉터가 내 입에 진수성찬을 척척 넣어주는데, 아주 맛이 좋았다. 간간히 특식 맛 좀 보라며 애드립을 쳐주시면 나는 그냥 깔깔대며 박수치는 것 말곤 할 일이 없었다. 그래. 이게 애니 만드는 재미였지. 잊고있었다.


오후3시. 이용녀 배우가 스튜디오로 왔다. 배우님과는 사전에 화상으로 미팅을 따로 진행했었다. 배우님이 대본을 읽으시면 나는 피드백을 드리는 자리였다. 있어보이는 말로는 대본 리딩. 내 머릿속 김삼신은 날카롭고 높은 목소리의 소유자 였는데, 의외로 배우님은 낮고 느린 톤의 목소리를 들려주셨다. 굉장히 낯설었지만, 들을수록 좋았다. 그 뿐아니라 인물의 성격도 여러가지 톤으로 보여주셨고 나는 그 중에 가장 만화적이고, 과장된 버전이 좋았다. 또 한편으론 김삼신만 배우라서 성우가 연기하는 정환,유진 부부와 잘 어울리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런 복잡한 심경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는데 이용녀 배우님은 나의 우문에 아주 깔끔진 현답을 내려주셨다.



배우와 성우의 이질감,
오히려 좋을 수도 있어요.
<101 달마시안> 알아요?
거기 보면 글렌클로즈
혼자서 다른 연기를 하잖아.
그에 비해 주인공 부부는 아주 얌전하고.
근데 어때요, 궁합이 아주 좋잖아요?




한창 콘티 그릴 때, 삼신 등장 씬에 참고한다고 유튜브에 "빌런 등장"으로 검색해서 영화 <101 달마시안> 영상 클립을 봤었는데도 나는 왜 이런 생각 못했을까? 역시 초짜 감독은 갈길이 멀다. 아무튼 이용녀 배우님은 멋들어진 연기를 펼치시고 떠나셨다. 웬만하면 성우를 선호하는 디렉터님 마저도 헛웃음이 나오게 만드시곤. 별 거 아닌듯이. 쿨하게.




선녹음 파일이 나오고서 업무량이 급증했다. 우선 애니매틱 편집을 수정해야했다. 김삼신 캐릭터는 애니매틱과 다르게 매우 낮고 느린 톤으로 녹음했기 때문에 그에 맞춰서 컷길이를 늘렸다. 그러고서 그 녹음 파일을 컷번호대로 잘게 쪼갠다. 쪼갠 음성 파일을 각각의 작화 파일에 집어 넣어주고, 대사도 한음절씩 타이밍에 맞게 입력한다. 이런 자잘한 작업들을 모두 하고 나서야, 비로소 원화 그릴 준비가 되는 것이다.


클립스튜디오 작화 파일



그렇게 원화를 그리고, 동화를 그리고, 채색을하고, 합성을 하면 아래와 같이 완성컷이 나오는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우선은 눈으로 구경이나 먼저 하자. 오늘은 여기까지. 그럼 이만!


원화 + 선녹음



동화


완성 컷





(덧) 근데 그거 아시나요? 이용녀 배우가 이전에도 삼신을 연기한 적 있다는 사실! 2018년에 공개된 단편 영화 <고추>에서 삼신할머니 역을 맡으셨더라고요. 보는 눈은 다들 비슷한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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