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란견문록 #6
처음 교환학생을 도착했을 때의 멘붕이 기억난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환학생 생활 중 가장 집에 가고 싶었던 순간이 처음 도착했을 때였다.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나는 절대 낯을 많이 가리거나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의 높은 벽과 문화적 차이를 뚫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부담감이 밀려왔다. 외국에서 오래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 같다. 23년 동안 토종 한국인들하고만 인간관계를 맺어왔으니 당연하지.
하지만 결론적으로, 막상 지나고 보니까,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다른 교환학생 친구들도 낯설긴 마찬가지고, 다들 새로운 경험을 하려고 온 친구들이다 보니 어떻게 지지고 볶고 하다 보면 금방 좋은 친구들이 생긴다. 물론 적극적으로 노력은 해야 한다. 그래서 그 노력의 과정에서 얻은 개인적인 경험적 팁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내가 여기서 사교왕이거나 ‘핵인싸’ 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고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적절히 참고하시길 바란다.
9월 초와 2월 초, 대부분의 유럽 대학생들이 학기를 시작하는 기간이다. 전 세계 어디나 그렇겠지만, 학기 초에는 각종 파티와 소셜 이벤트가 몰려있다. 금요일 토요일은 말할 것도 없고 평일 저녁에도 술 마시면서 몰려다니는 대학생들로 시끄럽다. 각종 학생 단체들은 다양한 테마로 파티를 연다.
겨울 방학 동안 못 봤던 친구들과 재회하고, 새로 온 학생들이 친구를 만드는 기간이기도 하다. 게다가 교환학생이 많은 마스트리흐트 대학교의 특성상 매 학기마다 새로운 학생들이 전 세계에서 도착해서 이 기간에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파티와 외국인 친구들이 처음에는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래서 정말 고민 많이 했다. ‘별로 친한 친구들도 아니고, 가서 영어 쓰려니 어색하고, 말이 통해도 대화 주제가 없으니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멘붕이 오게 된다.
그런 사람에게는 꼭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돌아보니 처음 외국에서 살게 되었을 때의 그 멘붕은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어차피 적응해야 할 대상이다. 그리고 소셜 이벤트는 현지에 빨리 적응하는 지름길이다.
사실 여기 와서 친해진 외국인 친구들을 보면 다 파티에서 처음 만난 경우가 많다. 학교만 열심히 다니면 외국인 친구 거의 못 사귄다. (그냥 Hi 하는 ‘아는 사이’ 말고) 경험상 수업에서는 정말 친해지기 어렵다. 이건 뭐 한국도 마찬가지다. 결국 주로 파티나 술자리 등에서 친해지는 경우가. 90% 이상이다.
그리고 친구들이 생긴다는 건, 곧 진짜 교환학생으로서의 경험을 할 수 있게 되는 첫발이다. 사실 뭐든지 혼자 하기는 어렵지만, 친구들이랑 같이 하면 시도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내 경험의 폭이 훨씬 넓어지게 된다. 낯선 땅에서 좋은 울타리가 된다.
특히 학기 시작 직전 - 직후 2주 정도가 친구들을 사귀기도 훨씬 쉽다. 왜냐하면 걔네들도 다 똑같다. 아직 아는 사람 별로 없고, 그래서 적극적으로 친구들을 사귀려고 한다. 시간이 지나고 자기들도 어느 정도 친한 무리가 생기면 새로운 사람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다. 그래서 이 기간에 열심히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면서 친한척하고 들이대는 게 꼭 필요하다.
맨 처음 학교에서 열리는 신입생 파티 때에서 어떤 독일 친구와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건너편에 있는 둘러 모여있는 한국인 학생들 5명 정도가 있었다. 그 친구는 흘끗 그쪽을 보더니 나에게 물었다. “Asian들은 왜 항상 뭉쳐 다니는 거야?”나는 ”음,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시안들이 약간 샤 이하잖아”라고 얼버무렸다.
절대 일반화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다. 마스트리흐트 대학교에는 매 학기 평균적으로 열몇 명 정도의 교환학생이 온다.
그런데 외국인 친구들보다는 같은 한국인 교환학생들끼리 어울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심지어 한국말을 더 많이 쓰다가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낯선 타지에 처음 도착하다 보니 당연히 한국인들끼리 뭉치게 되고, 서로 의지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외국인 친구와는 사귈 기회가 멀어진다.
한국인 교환학생들도 외국인 친구와 사귀기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없거나, 웃음 코드도 잘 안 맞고 불편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꼭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어차피 Asian만 그런 것도 아니다. 남미에서 온 친구들도 그렇다. 아무래도 문화가 다른 곳에서 지내다 보니 공감대가 있는 사람들끼리 끌어당기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는 외국인 친구들과 더 많이 어울리는 걸 추천하고 싶다. ‘편안한 영역(comport zone)’을 벗어나려고 노력해야만 성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정말 불편했다. 둘러보면 동양인이라곤 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열심히 비비다 보면 어느 순간 이 친구들이 하는 농담에 빵 터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한국 교환학생들의 영어실력은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다. 다들 TOEFL 잘 쳐서 온 사람들이다. 다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본 적이 없을 뿐.
그런데 영어에 좀 익숙해져도 여전히 대화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언어’ 뿐만 아니라 ‘이야깃거리’도 대화에서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장벽을 극복하는 데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유럽 친구들은 대부분 문화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온 친구든 이탈리아에서 온 친구든 캐나다에서 온 친구든 다 미국 드라마를 보고 팝송을 듣는다. 네덜란드 TV를 보면 절반 정도가 미국 TV쇼에 자막을 달고 방송된다. 그래서 쉽게 대화 주제가 통한다.
하지만 나는 팝송도 안 듣고 별로 서양 문화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그래서 대화하다 보면 영어가 다 들리더라도 대답이 막히거나 끼어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에 쓸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리액션 봇'이다. “오오오~” “리얼리?” “와우…” “댓츠 쿨!”을 눈치 있게 반복하며 맞장구쳐준다. 그리고 뭔가 웃긴 얘기 같으면 따라 웃기. 허접해 보이는가? 무시하지 마시라. 이거 엄청난 스킬이다. 날이 갈수록 리액션 수준과 눈치가 좋아진다.
하지만 리액션에는 한계가 있었다. 여전히 대화 주제는 내가 모르는 얘기였다. 그래서 나는 Small episode를 미리 생각해가는 방법을 썼다. 어차피 얘기할 때 별로 어려운 얘기하지 않는다. 전 세계 어디나 그렇겠지만 보통은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들이 주로 대화 주제다. 예를 들면 상대방이 무슨 얘기를 하다가 어제 자전거 타고 클럽을 갔는데 어쩌고저쩌고 얘기를 한다면, 자연스럽게 내가 말할 거리가 있는 주제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근데 나도 전에 밤에 자전거 타고 가는데 체인이 갑자기 빠져서 다칠 뻔했다.” 이런 준비된 에피소드가 몇 가지만 있어도 꽤 많은 상황에 갖다 붙일 수 있다. 생각보다 아주 자연스럽다. 파티나 여행에 대한 소감 같은 것도 미리 생각해놓으면 의외로 잘 써먹는다. 외국에서 대화를 이어갈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이번 주말에 뭐했어?” “여행은 어땠어?” 등등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90년대생 친구들은 의외로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얘기하면 잘 통한다. 독일인이고 미국인이고 한국인이고 재패니메이션이 전 세계를 주름잡던 시절에 어린 시절을 보내다 보니 유럽 친구들도 포켓몬, 디지몬, 드래곤볼, 심지어 축구왕 슛돌이까지 알더라. 플레이스테이션 같은 게임류도 안 해본 친구들이 없다. (써놓고 보니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얘기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난 유용하게 써먹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보는 사이에는 일단 존댓말 쓰랴, 말 트랴, 서로 굉장히 어색하다. 그리고 쉽게 친한 척했다가는 이상한 눈초리를 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유럽은 좀 다르다. 서로 오늘 처음 본 사이라도 친근하게 말 거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다.
처음에는 상당히 어색했다. 특히 한 공간에 가까이 있는데 말을 걸까 말까 애매한 상황이 굉장히 많다. 나는 한국이었으면 영 어색한 상황이라도 그냥 말을 건다. 줄을 같이 선 사람이라던지 기차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라던지 아니면 파티에서 옆에 서있다든지. 파티에서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술 마시고 있을 때 그냥 아무 그룹에나 가서, 헤이 왓츠 업 아임 00 나이스투 미츄 하면 다들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준다.
물론 그다음에 만나면 또 어색하지만, 그렇더라도 최대한 아는 척을 한다. 길거리에 지나가더라도 웬만하면 인사를 한다. 그렇작은 노력들이 의외로 큰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술 문화 하면 치맥 집이나 호프집에 들어가 쭈르륵 앉고 술잔을 돌리는 모습이 생각난다. 유럽 학생들의 대표적인 술 문화는 하우스 파티다. 수십 명의 친구들이 한 친구 집에 놀러 간다. 집주인과 친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심지어 모르는 사람 집에도 많이 가봤다. 친구의 친구 같은 느낌.)
갈 때는 알아서 맥주 캔이나 와인 한 병씩을 슈퍼에서 사들고 간다. 주종은 자기 마음대로다. 누구도 얼마큼 마시라거나 뭘 마시라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가 사 와서 자기가 마시면 된다. 그리고 슈퍼에서 파는 술은 싸기 때문에 기껏해야 5유로 정도면 충분히 마신다. 술값 때문에 한국에서 쓴 돈 생각하면 아주 만족스럽다.
들어가 보면 거실에서는 소파에 앉아서 떠들고, 부엌에서는 식탁에서 술 게임을 하고 복도에서는 술잔을 들고 홀짝 거리면서 수다를 떤다.
또 다른 점은, 우리나라의 1차, 2차가 있다면, 여기는 Pre-drink가 있다. 대부분 그날의 메인이벤트나 파티 (클럽이나 펍에서 주최하는 파티인 경우가 대부분)가 있으면 거기 가는 사람 중에서 친한 친구들끼리 Pre-drink를 조직한다. 메인이벤트는 보통 11시 이후에 시작하는데, 그전에 한 9시쯤 모여서 조금 더 작은 규모로 모여서 Pre-drink를 한다. 왜? 클럽이나 펍에서 술을 사 마시려면 비싸니까 미리 취하고 가야 한다는 것! 대부분 그 친한 친구들 중 한 명의 방에서 시작한다. 어떤 경우에는 Pre-Pre drink, Pre-pre-pre drink도 있다. 그래서 다음 드링크로 갈수록 사람이 많아지는 게 특징이다.
파티에 가고 싶으면 먼저 Pre-drink를 할 그룹을 찾는 게 포인트다. 메인이벤트에 시작 시간에 맞춰서 모이는 학생들은 아무도 없다. 다들 다른 장소에서 소규모로 놀다가 점점 시간이 가면서 집합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마지막 메인이벤트에서는 웬만한 마스트리흐트 학생들을 거의 다 마주치곤 한다.
Pre-drink를 잘 활용하면 좋다. 메인 파티에 사람 바글바글하면 누구 한 명 만나도 기억하기 쉽지 않지만, 소규모 Pre-drink에서는 친해지기 훨씬 쉽다!
쓰고 보니 다분히 ‘교환학생 친구 만들기 공략 TIP’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교환학생은 이렇게 하십시오’ 같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니 오해 마시기를. 교환학생은 모든 경험이 미래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정답을 향해가야 한다는 그런 압박으로부터 그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정답은 없다. 각자의 스타일로 경험해나가는 것일 뿐.
다만 ‘나와 완전히 다른 외국 친구와 베스트 프렌드가 되는 것’은 꼭 시도해보기를 추천한다. 훨씬 색다른,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