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upoom May 14. 2016

나의 빈집에 들어온 그대

영화 건축학개론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나한테도 헤어질 때 "꺼져달라"는 급의 말을 한 남자가 있었던 게 생각나더라.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 뭐랄까, 할 말이 많아진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때깔 좋고 말은 청산유수에 뭐든지 능숙해 보이던 남자 선배에 주눅 들던, 강남 압서방파라는 그 계급의 위압에서 자신의 고향 정릉이 부끄러워 집 대문을 발로 차 버리는 자격지심의 그런 남자. 한마디로, 그 당시에 그는 용기가 부족했다. "첫 눈 오는 날에 뭐해?"로 말은 걸었지만 "만나자"라는 말은 여자 입에서 듣는, 그마저도 "그래 뭐 네가 원한다면..." 식으로 퉁명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감추던 소심한 남자. 자신의 꿈은 아나운서인데, 그 이유는 돈을 많이 벌고 또 돈 많은, 그러니까 그 강남 선배와 같은 남자랑 결혼할 수 있어서 라고 말하는 그 여자의 속내를 남자는 알리가 없다. 그는 제주도 학원 출신인 그 여자가 잘난 서울의 있는 집 출신들만 모인 음대에서 받는 소외감과 열등감을 그 말에서 읽어낼 남자가 아니다. 그리고서는 그에 비해 지지리도 모자란 자신이 상처받기 싫어 오해를 한 그 날 이후, "꺼져줄래"라는 말을 엉뚱하게 그 여자에게 독하게 쏘아붙임으로써, 그녀와의 모든 가능성의 문을 제 손으로 폐쇄시켜 버렸다. 빈집에 심었던 화분에 차가운 눈꽃이 내려앉듯, 둘의 사랑은 무슨 꽃의 모양새였나 확인도 못한 채 그렇게 끝이 났다.

여자는 그랬다. 15년 뒤 자신을 몰라보는 척을 하는 남자의 찌질함이 여전히 한심스러웠다. 그 남자와 그의 현여친 사이의 대화를 들었을 리 만무하지만, 장인어른의 도움은 곧 죽어도 받지 않겠다는 여전히 자존심만 드럽게 센 자격지심의 남자인 것도 그녀는 어렴풋이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남자의 마음이 예쁘다면서 들어와 자리 잡던 여자였다. 그 황량한 빈집에 자기 혼자 주말에 들러 청소도 하고 꽃도 심고, 그 집에 가자마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계에 생명도 주던 그녀였다. 그런 여자가 그 남자의 찌질함에 질려 그를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근데 그걸 그 남자는 모른다. 아마 그 남자만 모른다.

아마 운 좋다면 우리에겐 납득이같이 괜찮은 친구가 곁에 있다. 그 친구는 나에게 어떻게 키스하는지도 가르쳐주고, 어떻게 해야 고백을 그럴듯하게 하는지도 가르쳐준다. 하지만 사랑의 싹이 애써 땅 밑에서 막 트려고 할 때, 내가 내 자격지심의 벽에 부딪혀서 용기를 못 내고 찌질하게 전전긍긍하며 혼자 울고 있을 때, 그 벽을 대신 깨 주는 친구는 이 세상에 거의 없다. 차라리 그가 '너를 갖고 논 쌍년'으로 상대방을 편하게 치부해버리고 욕해주는 편이 납득이 입장에서나, 승민이 입장에서나, 그 누구에게나 훨씬 편하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그놈이 개자식이라 상처받은 쪽은 나고, 그놈의 사정을 듣지 않고 또 봐주지 않았음이 합리적이었다고 성급하게 위안하는 우를 범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해 납득이의 얄궂은 의리만을 탓할 수는 없다. 내 생각에 그 벽을 깨는 것은 누군가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다행히 영화에서 서연의 경우엔 그걸 깨달은 것 같다. 매운탕 같은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던 그녀는 막연히 자본을 동경하던 그간 서울에서의 자기 삶을 모조리 정리하고 제주도의 새 집에서 새 인생을 시작한다. 또한, 그렇게 싫어하고 잊고 싶었던 자신의 피아노를 인정한다. 그것이 서연에게 있어 제일 잘하는 것이니까 비로소 그녀는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인다.

근데, 승민은 어떠할까? 승민은 자신의 정릉을 인정하고 자격지심의 벽을 깨부쉈을까? 영화 내내 장황한 사연의 첫사랑녀와 비교하자니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약혼녀와 그는 예정대로 결혼했다. 그리고 미국행 비행기에 안착한 승민의 후막은 영화에 의도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의 인생은 어떠한 모습일까?


이쯤 되니 내가 뭐 나에게 꺼져달라는 말로써 상처를 준 그 남자의 불행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지 않다. 빈집에서 그 여자가 남긴 CD플레이어와 CD를 회수했음에도, 삐삐에 남겨진 그 여자의 메시지의 존재를 알았음에도 기억의 습작처럼 여자와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마음 어딘가에 묻어둔 채 15년을 보낸 남자가 너무나 안타깝다. 물론 꺼지라는 말을 한 당사자가 불현듯 나타나 "우리 제대로 다시 시작해봐"라고 말하는 것이 우스우니 자존심 센 그 남자는 그랬던 것이겠지. 그리고, 자신의 진짜 꿈도 못 이뤄보고 가짜의 삶을 살다가 파경을 맞이한, 초라한 꼴로 첫사랑을 그제야 수혈 맞듯 찾아온 여자의 삶도 안타깝다. 그간 자신의 마음은 공사 전 제주도의 집처럼 방치한 그 여자의 무심함에 통탄을 금치 못한다. 어쩜 둘 다 이리 멍청한 거야? 15년 동안 뭐했어?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그럼 뭐한담. 승민이 "꺼져줄래"라는 본인이 내뱉은 냉정함에 무려 15년간 일관성을 지켰듯이, 나 또한 아주 완벽하게 그 남자로부터 꺼져있는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말로는 자격지심의 벽을 깨는 것이 쉽지, 실제론 나 역시 여전히 용기가 부족하고 미련하다. 정작 내가 자존심 버리고 용기 내어 연락해 보았자, 상대방은 자존감만 챙긴 채 득의양양하게 "근데, 누구... 신지...?"라는 인상을 팍 풍길까 그게 제일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가 믿을 수 있는 친구에게 "얘한테 연락하면 어떨까?" 이런 질문을 하고 "절대 하지 마. 걘 개자식이었어." 따위의 괜찮은 친구가 줄 수 있는 제일 의리 있는 위로만 얻고 있다. 내가 그 남자의 찌질함을 정릉의 향수로 기억하듯, 그 남자도 나의 찌질함과 소심함을 피아노의 선율로 기억해줄까? 나는 아직도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는 승민의 자격지심과 서연의 허영심 모두에 공감을 하며, 영화 건축학개론은 보통 사람들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의 풋풋함이 그립긴 하지만 마주하기 두렵고 어려워서 기억의 습작으로 내버려두는 그런 보통 사람들에게 각자의 추억을 회상할 빌미를 아주 매끄러운 방식으로 제공한다고 느낀다.

매거진의 이전글 불가피함의 무고(無辜)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