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못 참지
현생이 힘들 때 툭하면 '스카이스캐너'를 들여다 본다. 비행기표 특가가 뜨면 그걸 핑계로 떠나고 싶어서. 그 즈음에 프랑크푸르트 왕복 비행기 티켓 55만원짜리를 봤다. 코로나19 전에도 본 적 없는 가격에-그 전에도 70만원대 이하는 본 적이 없는데!-자세한 여행 코스도 안 정하고 바로 결제해 버렸다. 동남아 비행기표도 성수기엔 그 가격까지 우습게 올라가는데, 유럽을? 심지어 우리나라 항공사였고, 직항 왕복 티켓이라 프랑크푸르트까지 14시간이면 갔다. 이건 못 참지.
사실 좀 많이 지쳐 있던 시기였다. 혼자라도 좋으니까 어디로든 떠나서 리프레시를 하고 싶었다.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유럽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을 가보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출발까지 1주일도 안 남은 비행기표를 덜컥 사 버렸다. 여자 혼자 2주 동안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3국 각 도시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도는 컨셉.
처음 혼자 해외 여행은 아닌 게, 발권 기준 1년 전에 일본을 혼자 가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처럼 먼 곳은 처음이었다. 원래도 독립적인 성향이라 부모님은 별 반대는 없으셨지만 엄청 걱정하시는 게 느껴졌다.
하루에 한 번 씩은 꼭 생존신고 하고. 알았지?
정작 나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요즘 세상에 여자 혼자 해외여행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한테 별일이야 있겠어?
1주일 동안 정신없이 2주치 짐을 싸고, 한식도 몰아 먹고, 출국일이 되었다. 14시간 동안 나오는 기내식 두 번을 야무지게 한식으로 챙겨 먹었다. 이제 2주 동안 한식을 못 먹게 될 테니까.. 이미 지난 며칠 동안 순두부찌개만 몇 번을 먹었지만, 앞으로 흔하디 흔했던 한식을 얼마나 그리워하게 될지 알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낯선 외국의 냄새! 지하철을 타고 숙소까지 가면서 계속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단연컨대, 완벽했던 첫 스타트는 숙소가 있는 지하철역에서 만난 과일 노점상. 무려 망고가 1개에 1유로, 바나나는 한 송이에 그보다도 쌌다. 세상에, 유럽인데 이렇게 물가가 싸다고?
안타깝게도 과도를 안 챙겨 와서 망고는 패스. 바나나 한 송이와 귤 두 개를 샀다. 각각 1유로(1700원) 정도. "좀 싸게 줬어." 그렇게 말하면서 씩 웃는 아저씨가 어찌나 감사하던지! 확실히 바나나 한 송이에 1700원은 말도 안 되는 가격인 게, 이후 마트를 몇 번은 더 갔지만 그 가격은 볼 수가 없었다. 이런 노점상을 잘만 이용하면 과일을 아주 값 싸게 먹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숙소로 돌아와서 목이 말라서 귤부터 하나 깠는데, 세상에 너무 맛있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이렇게 맛있는 귤은 꽤 흔했지만, 유럽에서 귤을 먹으니까 더 맛있달까. 바나나는 좀 덜 익었어서, 두 개만 먹고 나머지는 내일 아침에 타야 하는 기차 안에서 먹기로 했다.
짐을 간단히 정리하니 저녁 6시쯤. 외출을 자제하기엔 굉장히 이른 시각인데, 이쪽 나라들은 12월에 오후 4시만 돼도 어둑해지고, 5시는 이미 한밤중이다. 둘이 왔으면 나갔겠지만 나는 혼자다. 원래라면 해 지고는 안 나가는 게 좋지만, 여행 첫날을 이렇게 공항에서 숙소 오는 걸로만 보내고 싶진 않았다.
프런트 직원에게 '나 지금 크리스마스 마켓 가고 싶은데, 나가도 될까?' 하고 물어 봤더니, '당연하지!' 하고 말하면서, '근데 중앙역 근처는 가지 마' 라고 경고해 주었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은 노숙자와 마약중독자가 많기로 유명하다) 한국에서 알아볼 때도 본 내용이긴 했지만, 현지인까지 그렇게 말할 줄이야...! 사실 그래서 숙소도 중앙역에서 떨어진 곳으로 잡아서, 나는 고맙다고 말한 뒤 숙소를 나섰다.
하지만 사실 숙소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뢰머 광장까지 가는 길이.. 조금 무서웠다! 다들 자전거를 타고 다녀서 같이 걷는 사람들이 드물기도 했고, 한국만큼 가로등이 많지가 않아서. 그래도 아주 위험한 분위기는 아니라 주변을 잘 살피면서 다리를 건너 뢰머 광장으로 향했다.
마침내, 다리에서부터 보이는 크리스마스 마켓 풍경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펼쳐지는 화려한 마켓의 향연!
노점상들이 줄지어 모인 채로 갖가지 먹거리와 소품들을 팔고 있었다.
대부분은 먹거리였고, 그 중 가장 지분이 많은 건 역시나 소시지.
수제 소시지들이 거대한 원형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데 진짜 맛있어 보였다... 사람들도 줄을 많이 서있어서 나도 저녁을 때울 겸 자연스럽게 합류. 빵에 돼지고기 소시지를 끼워서 머스터드, 케첩 소스를 뿌려 먹는데, 그 단순한 맛이 왜이렇게 맛있는지!
그 후로도 예쁘게 돌아가는 회전목마와 거대한 트리를 한참 보다가, 크리스마스 마켓의 꽃이라는 글뤼바인(뜨겁게 마시는 와인)을 한 잔 마시려고 했는데.. 한 잔에 4유로. 우리 나라 돈으로 6800원. 음.. 좀 비싼데? 나는 와인을 그렇게 즐기는 편도 아니고, 뭔가 예상 가는 맛에 7천원 가까이 태우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안 마시기는 그렇고. 아까 소시지 빵을 먹어서 목도 마른데...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뜨거운 오렌지 주스를 파는 노점상. 2유로니까 우리 돈으로 3400원 정도 했다. 이 정도면 돈 쓸 수 있지! 컵 보증금 2유로를 포함해, 총 4유로를 귀여운 컵에 담긴 뜨거운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는데, 사실 이것도 아는 맛이지만 주변의 분위기 때문인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아, 내가 정말 유럽에 왔구나! 크리스마스 마켓의 흥겨운 분위기와 들뜬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덩달아 신나는 기분이었다. 혼자 왔지만 여기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노는 기분. 혼자라서 외로운 감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짧게 돌아다니고, 갑자기 너무 피곤해졌다. 어차피 프랑크푸르트는 귀국할 때 이틀 더 머무니까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내일 아침 일찍 기차를 타는 일정도 있었기 떄문에 8시 정도 되었을 때 생수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씻고, 짐 챙기고, 내일 뭐 입지? 그런 소소한 생각을 하면서 알람을 맞추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여행 일정 중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늦잠을 자서 기차를 놓쳤다? 차라리 그런 거였다면 좋았을 텐데, 이튿날 나는 심지어 일찍 일어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