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개관, 역사, 도시 전설
방콕 개관
태국의 수도로서 행정, 정치, 교통의 중심지로 특별 자치 도시
위치 태국의 중부에 위치하며 짜오프라야강을 중심으로 동쪽 프라나컨 지역과 서쪽 톤부리 지역으로 구분
건립 1782년 (짝끄리 왕조 라마 I세)
1972년 특별시로 지정
시장 찻찻 씨티판 ชัชชาติ สิทธิพันธุ์
인구 약 10,820,921 명 (2025년)
면적 1,568.737 ㎢ (서울의 약 2.5배 크기)
행정 총 50개 구(켇เขต)로 구성
경제 태국내 총생산의 25%를 차지 –
도소매 등 상업 24.31. 생산업 21.23, 교통통신 13.89, 숙박 및 요식업 9.04
대졸 신입사원 월급 평균 15,000-20,000밧, (공무원) 18,000밧, (IT나 공대) 25,000-30,000밧 (2025년)
Index로 보는 방콕
2026년 교통체증 10위 (TomTom.com)
2026년 방문하고 싶은 도시 2위 (Timeout.com)
2025년 외국인 방문객 1위 (Global Destination Cities Index, Euromonitor)
2026년 공기오염 17위 (IQAir.com)
“You say Bangkok, I say Krungthep”
방콕은 세계 최장 도시명을 가진 곳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어 있다. 우리는 방콕 Bangkok이라고 부르지만, 태국인들은 끄룽텝กรุงเทพฯ 이라고 부른다. '끄룽กรุง'은 '도시', '텝เทพ'은 '신神', 즉 '신의 도시'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태국어의 맨 뒤에 'ฯ' 이렇게 생긴 특수문자가 붙어 있다. 이건 앞 단어에 이어 생략된 단어(들)가 있다는 표시로 긴말을 줄였다는 의미이다.
무려 70개의 음절로 이루어진 방콕의 공식 명칭은 다음과 같다.
끄룽텝마하나컨 아먼랏따나꼬씬 마힌트라유타야 마하딘록까폽 놉파랏따나랏차타니부리롬 우돔라차니웻마하싸탄 아먼피만 아와딴싸팃 싹까탇띠야위싸누깜쁘라씻
กรุงเทพมหานคร อมรรัตนโกสินทร์ มหินทรายุธยา มหาดิลกภพ นพรัตนราชธานีบุรีรมย์ อุดมราชนิเวศน์มหาสถาน อมรพิมาน อวตารสถิต สักกะทัตติยวิษณุกรรมประสิทธิ์
해석: 위대한 신의 도시, 에머랄드 부처가 있는 곳, 영원한 아름다움을 지닌 불멸의 도시, 아홉 개의 보석을 지닌 곳, 환생한 신이 다스리는 도시, 왕궁이 가득한 행복의 도시, 인드라가 정하고 비슈바카르만이 세운 도시
방콕의 시작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했던 아유타야 시대(1351~1767)때 포르투갈 무역상이 짜오프라야강과 근접한 방꺽บางกอ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고 이들에 의해 Bangkok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1770년 톤부리 왕조의 딱씬 왕이 방꺽에 수도를 건립하였고 이 곳은 톤부리 지역 (현 방콕의 서쪽 지역)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불과 12년 후인 1782년 톤부리 왕조가 멸망하고 현 태국 왕조인 짝끄리 왕조의 라마 1세가 현재의 방콕 지역으로 천도하였다. 라마 1세는 이곳을 ‘랏따나꼬씬인아요타야 (인드라의 귀중한 보석)’으로 명명했으나 라마 2세때 개명하고 좋은 뜻을 덧붙여 가면서 현재의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
아시아의 베니스
수로가 발달했던 방콕은 유럽인들에 의해 ‘뉴 암스텔담’이라고 불리며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방콕은 또한 ‘아시아의 베니스’라고도 불렸는데 수로가 발달했던 이유도 있지만 동시에 지면이 낮아 ‘물의 도시’인 베니스를 연상케 한다는 이유도 있다. (태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방콕은 매년 2 cm씩 낮아지고 있으며 2050년에는 방콕 전체가 물에 잠길 것이라고 한다.)
1542년 왕명에 따라 짜오프라야강 주변을 중심으로 수로를 개발하기 시작하였고 1915년까지 수로 개발은 계속되었다. 이후 근대화와 산업화로 인해 도로교통이 발전하면서 수로 개발은 중단되었으며 수로 이용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오늘날 심각한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는 도로의 뒤편에서 수로 위를 누비는 배는 직장인들의 출근시간을 지켜주는 중요한 이동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방콕을 지키는 기둥, 락므앙หลักเมือง
태국에서 도시와 마을을 건립할 때 가장 중요한 일은 최고의 명당 자리를 골라 그 곳에 기둥을 세우는 것이다. 이를 태국어로는 '락므앙'이라 하고 번역하자면 ‘도시 기둥’ 쯤 된다. 기둥을 세우는 일은 도시나 마을의 흥망을 가르는 일로 여겨 자리 선정부터 기둥으로 세울 나무를 고르는 일까지 신중을 기해야 했다.
방콕의 락므앙은 왓프라깨우(วัดพระแก้ว 에머랄드 사원) 맞은 편 국방부의 앞에 자리잡고 있다. 짝끄리 왕조의 라마 1세는 왕국을 건립하기 1년 전인 1781년 점성술을 통해 지금의 락므앙 자리를 선정하고 신성한 나무로 불리는 라차프륵 (ราชพฤกษ์ 태국의 국화)을 골라 기둥을 만들었다. 기둥의 윗부분은 첨탑 형태로 조각하고 전체를 금으로 도금하였다. 기둥을 정성스레 만들고 난 뒤 미리 보아둔 자리로 옮겨 땅을 파자 어디선가 작은 뱀 네 마리가 나타나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꼼짝하지 않았다. 아무리 쫓아내려 해도 움직이지 않자 할 수 없이 그냥 기둥을 박아넣었고 작은 뱀들은 기둥에 깔려 죽고 말았다. 점성학에 능했던 라마 1세는 이 일을 두고 예언하기를 짝끄리 왕조가 건립된 후 7년 7개월간 흉한 일이 끊이지 않을 것이며 이 왕국은 150년 후 멸망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1782년 짝끄리 왕조의 건국 이후 7년 이상 버마의 침략으로 전쟁이 계속되었으며 150년이 지난 1932년 혁명에 의해 입헌군주제로 체제가 전환되었다.
그런데 비록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전환되긴 했으나 왕조는 계속 유지되었는데 이는 라마 4세때 락므앙을 다시 세운 덕택이라고 한다. 라마 4세는 라마 1세때 만들어진 락므앙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려고 하였으나 뽑을 수가 없었고 결국 락므앙을 하나 더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또다른 성스러운 나무인 차야프륵ชัยพฤกษ์ 으로 기둥을 만들고 윗부분은 연꽃 모양으로 조각한 뒤 전체를 금 도금하였다. 라마 1세의 락므앙에서 불과 1 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이 락므앙을 세웠는데 이로 인해 짝끄리 왕조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태국의 국왕은 라마 10세로 와치라롱껀 왕임)
라마 1세의 락므앙에는 다른 이야기가 하나 더 전해진다. 점성술사는 락므앙을 세울 명당 자리를 두 곳으로 선정하였다. 한 곳은 왕국이 발전하고 부유하나 식민국가가 될 것이며, 다른 한 곳은 혼란이 계속되나 독립국가를 유지할 것이라고 했다. 라마 1세는 이를 두고 오랜 고민 끝에 부유한 식민지보다는 혼란한 독립국가이기를 선택하였고 동남아의 모든 국가가 유럽제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태국만은 독립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서 사람들은 뱀 네 마리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데, 이에 대한 답은 1638년에 쓰여진 기록서 <싸얌 왕국에 대한 서술(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Siam)>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저자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무역관장 Jeremias는 당시 싸얌 왕국에서 락므앙을 세우면서 살아있는 사람을 함께 생매장했던 관습에 대해 언급한다. 아유타야 시대부터 시작되었던 이 관습에 따르자면 락므앙을 세울 때 ‘인อิน, 짠จัน, 만มั่น, 콩คง’이란 이름을 가진 사내 네 명을 함께 산채로 파묻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지신(地神)의 노여움을 잠재우고 미래의 번영을 도모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물로 바쳐지는 ‘인, 짠, 만, 콩’의 이름을 가진 사내를 찾는 방법은 더욱 황당하였는데, 인부가 거리를 다니며 이 이름을 불렀을 때 대답하는 사내를 속여서 데려다가 며칠간 잘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며 대접한 뒤 락므앙과 함께 구덩이에 밀어 넣어버렸다는 것이다. 짝끄리 왕조에 들어서 라마 1세는 이 관습이 너무 야만스럽다 하여 더 이상 따르지 않았으며 사내 대신에 뱀을 잡아넣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산 사내를 생매장하였고 추후 왕의 이미지를 위해 이에 관한 기록을 뱀으로 수정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된다.
에라완 신전의 고난 시대
방콕의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에라완 신전은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명소이자 영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56년 세워진 에라완 신전은 외국 손님의 숙박을 위한 국영 호텔 (지금의 그랜드 하이얏트 에라완 호텔)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잇따른 사고가 발생하자 건설 책임자인 파오 경찰대장이 당대 유명한 점술가에게 개장일을 의뢰하였는데, 이 점술가는 호텔 부근의 일대가 인간들이 범해서는 안되는 신들의 구역이라며 신을 위한 제단을 지어야만 한다고 조언했다. 이렇게해서 만들어진 에라완 신전 덕에 랏차쁘라쏭 일대는 방콕 최대 번화가로 발전하였고 하루에도 수천 명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에라완은 힌두교의 신 브라흐만이 타고다니는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코끼리의 이름이다. 신전의 중앙에는 브라흐만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태국인의 믿음에 따르면 브라흐만은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신, 즉 운명을 결정하는 신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자에게는 관대함을 베풀고 기적을 만들어 준다고 한다.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는 네 개의 얼굴을 가진 브라흐만은 여덟 개의 손에 염주, 연꽃, 경전, (물)사발을 나누어 들고 있다. 염주는 자비를, 연꽃은 아름다움을, 경전은 지혜를, 사발은 부富를 의미한다.
브라흐만신을 향한 기도는 정해진 예법에 따라야 한다. 먼저 4원소에 해당하는 연꽃(흙), 물, 향(바람), 초(불)를 준비한다. 브라흐만은 창조의 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도로를 바라보는 북쪽 얼굴부터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돌아 불공을 드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한번 더 머리를 숙이면 기도가 끝나게 된다. 북쪽을 향한 브라흐만은 사업, 학업, 승진 등을 관장한다. 동쪽은 건강, 사랑, 가족 등을, 남쪽은 명예, 명성, 행운 등을, 서쪽은 부동산, 돈, 건물 등 부에 관해 보살펴준다.
역사학자이자 풍수학의 권위자인 위씻 떼차까쎔에 따르면, 랏차쁘라쏭 사거리는 과거 죄수들의 사형장이었다. 따라서 많은 원혼들이 상주하고 있으며 현재는 에라완 신전 맞은 편에 경찰병원이 자리하고 있어 역시나 매일같이 사자死者들이 생겨나고 있으나 에라완 신전이 원혼을 달래고 주변을 돌보아준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2006년 3월 한 무슬림 청년이 에라완 신전을 찾아와 망치를 휘둘렀다. 추후 정신이상자로 밝혀진 이 청년은 현장에서 관리인 두 명에게 맞아 목숨을 잃었다. 태국인들은 이 사건을 불길한 징조로, 정계의 호사가들은 당시 총리였던 탁씬의 부덕함과 연관지었다. 삼 개월간의 복구 작업을 마친 뒤 같은 해 5월 에라완 신전은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나 마치 이 사건이 어두운 앞날을 예견한 듯 2006년 9월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정국불안과 경제침체가 계속되었다.
이후 랏차쁘라쏭 사거리는 2010년과 2014년 각기 다른 반정부 시위대의 집회 장소가 되었다. 2010년 친탁씬 세력인 레드셔츠가 민주당 정권의 비정당성을 주장하며 랏차쁘라쏭 도로를 점거하고 3개월간의 시위를 이끌어갔다. 3월부터 시작된 시위는 결국 정부의 무력 진압으로 90여명의 사망자와 2천 여명의 부상자를 발생하며 막을 내렸다. 2014년 1월에는 전(前)민주당의원인 쑤텝이 이끄는 반(反)잉락 정부 시위대가 랏차쁘라쏭 도로를 점거했다. 이들의 시위는 같은 해 5월 쿠데타로 종료되었다.
2015년 8월 에라완 신전 앞에서 폭발물이 터졌다. 대형 백화점과 쇼핑센터, 5성급 호텔이 몰려 있는 도심인데다 퇴근 시간까지 맞물려 거리는 한창 인파로 북적거릴 때였다. 폭음과 함께 불길이 솟았고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외국인관광객 다수를 포함한 20명의 사망자와 12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40여대의 차량과 근처 건물의 유리창이 파손되는 등 태국 역사상 최악의 폭탄테러로 기록되었다.
다시 평화를 찾은 랏차쁘라쏭 사거리, 많은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도로. 그 중심에 자리잡은 에라완 신전은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접수하느라 바쁘다!
이 글은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웹매거진 <다양성+> 에 기고한 글의 일부와 , <주간조선> 2373호에 기고한 글의 일부가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