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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비즈 May 20. 2020

살벌했던 영조 재임기, 2인자의 생존법은 무엇이었나

같은 2인자였지만 상반된 삶을 살았던 재상들.. 이광좌와 김재로, 조현명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할 임원진과 이사회 같은 최고경영진의 중요성은 커진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가끔은 직언도 서슴치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까지 한다.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인 김준태 작가의 <조선시대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에서는 노론과 소론의 극한 대립, 반란 등 갈등이 들끓던 영조 재위기간 당시 같은 2인자였지만 상반된 삶을 살았던 세 명의 재상이 소개되고 있다. 이광좌와 김재로, 조현명의 이야기이다.


임금의 기분에 따라 재상이 갈리고, 하루 아침에 수상이 유배를 떠나던 시기. 2인자의 지위가 하루살이나 다름없던 시기. 조선에서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던 군왕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의 말년 풍경이다.


종사를 지키기 위해 아들까지 죽인 영조에겐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자를 버리고 세손을 선택한 자신의 결단이 옳았음을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세손을 미래 성군으로 훈육해야 했고 영조 평생의 자긍심인 탕평을 유지해야만 했다. 영조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영조의 정치적 타락 수준은 더 해졌다. 70세 고령에 접어들며 조바심을 느낀 영조는 갈수록 자신의 뜻만 무조건 관철했다. 자신의 뜻에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신하는 가차 없이 처벌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사도>

영조 재위기간 내내 살얼음판 같은 정국은 계속됐다. 노론·소론의 극한 대립, 반란, 사도세자 문제 등이 휘몰아치면서 어떤 재상은 반역으로 몰리거나 또 어떤 재상은 관직을 추탈당하기도 했다. 1인자 밑에서 언제 목숨줄이 끊길지 모를 2인자들은 끊임없이 시험받고 생존 위협을 받던 시대였다. 그렇다면 영조 재위 당시 2인자들은 이 난세 속에서 어떤 생존법을 취했을까.


* 노론·소론: 조선 후기 서인으로부터 나눠진 당파. 강경한 입장을 취한 노장층이 주였던 노론과 온건 입장의 소장층이 주였던 소론



당파 싸움에 등 터지는 건 '2인자들'


영조 초반기 화두는 소론이 노론을 숙청하는 '신임사화'였다. 과거 세자 때부터 경종을 견제해왔던 노론은 경종 즉위 후 친노론 성향의 연잉군(훗날 영조)이 왕위를 계승하게끔 하여 나라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다. 심지어 왕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주장했다. 소론은 이런 노론의 노선을 경종에 대한 반역으로 규정해 대대적인 노론 탄핵을 벌였다.


탄핵 과정에서 노론을 이끌던 노론 4대신을 처단하라는 소론의 김일경이 올린 상소를 계기로 노론에서 소론으로 급작스럽게 정권이 교체된다. 이후 노론이 주도한 경종 시해 사건을 빌미로 4대신들은 사사(임금이 내린 독약으로 스스로 자결)되고 관련자 또한 모두 처형됐다. 신임사화란 일련의 과정 전반을 이르는 용어다.


그런데 노론의 주도로 영조가 왕위에 즉위하며 국면은 또 한차례 뒤바뀐다. 노론은 신임사화를 소론의 날조라 규정하고 이로 인한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데 주력했다. 노론은 경종의 역신이라 불리던 오명을 씻고 오히려 소론이야말로 영조의 역신이며 경종 시해 사건을 조작했기 때문에 경종의 역신이라는 논리를 확립했다.


물론 이 과정은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소론의 현실적인 권력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거셌고 영조 또한 노론의 임금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고자, 어느 편에도 치우지지 않는 탕평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영조 본인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소론을 처벌해야 하지만 탕평을 위해서는 소론이 필요한 갈등 상황에 놓인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소론을 이끌던 재상 이광좌가 영의정으로 재임하게 된다.



이광좌, 끝내 떼어내지 못했던 '소론 출신' 딱지


이광좌는 경종 시절 왕세제의 대리 청정을 결사 반대했던 인물로 노론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영조가 즉위와 동시에 이광좌를 영의정으로 임명한 것은 소론을 안심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영조는 왕세제 시절 자신을 위협했던 인물들을 처단했고 이광좌 또한 이 과정에서 파직 당한다. 노론은 이광좌를 엄히 처벌하라고 상소했지만 영조는 처벌 대신 이광좌에게 경종 죽음의 책임을 돌렸다. 당시 영조는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유언비어로 인해 큰 심리적 부담을 겪고 있었고 당시 약방 도제조를 맡고 있던 이광좌에게 이 책임을 전가해 독살 소문을 한번에 불식시킨 것이다.


이후 영조 3년에 이광좌는 다시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게 된다. 노론이 영조의 탕평 노선에 동의하지 않고 소론을 전멸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자 영조는 어쩔 수 없이 노론으로 환국을 단행한다. 그러자 경종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목으로 소론 과격파는 일명 '이인좌의 난'이라 불리는 무신란을 일으킨다. 이광좌를 비롯한 소론 정권 대신들은 자칫 본인들에게까지 불똥이 튀어 역모 가담자로 몰려 몰살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신속한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노론은 계속해서 이광좌를 탄핵했고 그 때마다 이광좌는 도성 밖에서 대죄하는 고초를 치렀다. 노론에게 소론은 원수였고 이광좌는 소론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영조도 본인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선 노론과 한 배를 탔기 때문에 영조와 다른 당파에 속한 이광좌의 설 자리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렇게 이광좌는 영중추부사로 물러났다가 영조 13년 다시 영의정으로 임명되었지만 2년 후 병으로 별세한다. 현직 영의정으로 부임할 당시 사망했지만 그의 사후는 불행했다. 영조는 소론의 우두머리인 이광좌가 소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과 함께 소론의 역모 사건에 연루시켜 이를 빌미로 관직을 박탈했다.


이광좌의 글씨


이광좌의 인생은 1인자와 반대 위치에 선 2인자의 삶은 결코 평탄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설령 1인자가 2인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고 2인자 또한 2인자를 깍듯이 모신다고 할지라도 구조적인 대립관계(이를 테면 서로 이념은 다르고 정파가 다를 때)가 해소되지 않는 한 그 둘은 공존할 수 없는 관계다. 각자가 가진 힘과 명분이 서로에게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광좌는 최선을 다해 영조를 보좌했다. 그렇지만 노론의 시선에서 이광좌는 그저 경종에게 불충(不忠)한 소론일 뿐이었다. 영조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서 소론의 이광좌를 어쩔수 없이 내쳐야 했다. 태생적으로 이 두 사람은 합치될 수 없었던 운명이었던 것이다.




김재로와 조현명의 생명줄은?


이광좌의 뒤를 이어 영의정 자리에는 노론 탕평파 우두머리 김재로가 올랐다. 당시 재위 20년을 넘긴 영조는 탕평을 국정 운영 이념으로 한층 더 강조했고 <속대전> 편찬, 서얼등용 확대, 서원 억제, 균역법 실시 등 본인의 개혁 어젠다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김재로와 조현명은 이러한 영조를 충실하게 보좌했다.


김재로도 앞서 이광좌와 마찬가지로 노론 본류에 속하는 인물로 "당파적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며 영조로부터 비판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영조가 "김재로를 재상에 임명한 것은 탕평을 책임 지워 이루려 한 것"이라 실록에 기록되었을 정도로 김재로는 영조의 탕평책에 적극 호응하며 소론과의 공존을 택했다. 김재로는 소론의 인물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당파 간 갈등이 극심해질 때마다 양쪽 모두를 설득해 조율했다.


같은 시기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낸 소론의 조현명도 김재로와 마찬가지로 . 소론 탕평파를 이끌던 조현명은 양역변통(조선 후기 인두세로 성인 남녀에게 전을 부과하는 것)과 균역법 제정 과정을 총괄한 경세가였다. 조현명이 담담했던 균역법에 비난의 여론이 일자 "개 한마리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천 마리 개가 그 소리를 듣고 짖는 법입니다. 지금의 소요는 참으로 소요가 있어 이런 것이 아닙니다"라 침착하고 일관된 대응으로 개혁 작업을 추진했다. 조현명은 소론이었음에도 세제 시절부터 노론 측 영조를 보호하는 데 앞장섰고 직접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기도 했다. 때문에 노론의 공격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김재로와 조현명


김재로와 조현명 모두 본인과 이념이 다른 각 정파로부터 지지를 받으며 영조 뜻에 따라 개혁 어젠다를 실현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김재로와 조현명은 그렇게 노론과 소론,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지키며 이념과 당파 싸움으로부터 비롯된 제약들을 극복했다. 그 결과 이 두 사람은 이광좌와 달리 영조에게 명재상으로 인정받으며 후대 기록으로까지 남게 되었다.




훌륭한 2인자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사심 없이 조직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 업무능력이 탁월한 사람, 1인자의 보완재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 레드팀(조직 내 전략의 취약점을 발견해 공격하는 역할 부여받은 팀)의 역할을 수행해줄 사람, 넓은 안목으로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사람 등 여러 유형의 2인자가 존재한다.


하지만 명재상 김재로와 조현명을 통해 1인자가 좋아하는 2인자의 자질 한 가지를 엿볼 수 있었다. 2인자 본인이 속한 집단이 성격이 어떠하든 1인자의 생각과 조직이 처한 상황에 따라 타협점을 찾고 공존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 여러 유형의 2인자들을 막론하고 중도를 지킬 줄 아는 2인자라면 어떤 1인자이든 곁에 두고 싶을 것이다.



인터비즈 박소영 김재형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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