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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비즈 May 21. 2020

놀림거리서 트렌드 리더로 떠오른 너드(Nerd)

'공부벌레', '오타쿠'라 불리던 너드의 급부상이 뜻하는 바는 뭘까?


두꺼운 안경을 끼고 운동은 잘하지 못하며 사교성도 없다. 집에 틀어박혀 과학책을 읽고 실험을 하며 비슷한 아이들끼리 모여 어려운 보드게임을 즐긴다. 때로는 유치하게 보이는 공상과학 영화나 만화에 심취해 있다. 미국의 '공부벌레', '오타쿠' 등으로도 불리던 '너드(또는 긱)'의 특성이다.


과거에 너드는 사교 활동과 스포츠를 즐겨하는 미국 사회에서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지금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시자인 빌 게이츠, 야후의 제리 양,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거물급 인사가 너드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문화와 취향은 핫한 트렌드로 올라섰다. 그들의 무심한 패션과 독특한 취향마저도 이제는 '섹시하다'고 평가 받기도 한다. DBR 193호를 통해 시대의 선도자가 된 너드의 변천사를 살펴보자.



너디(Nerdy)? 전혀 섹시하지 않은 4차원!


1990년대 우리나라 TV에서 수입 방영됐던 미국 학원 시트콤 '베이사이드의 얄개들(Saved by the Bell)'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던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 속 가장 재미있는 캐릭터는 수학, 공학, 과학에는 천재적 재능을 보였지만 사회성이 너무 없고 패션감각 제로인 '스크리치'였다. 스크리치는 매일 집에 틀어 박혀 과학 키트를 조립하거나 기발한 발명품을 만드는 걸 즐기며 혼자 놀았다.


좋은 대학 입학에 올인해서 철저히 학점관리를 하면서도 선생님 말씀에 순종하고 동시에 인기도 많은 금발머리 모범생 '제시카' 캐릭터와 정반대되는 인물이었다. 스크리치는 다른 학생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옷차림과 번개 맞은 듯한 독특한 헤어스타일로 등교해 항상 놀림거리가 되거나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다.



이 드라마 속 스크리치 캐릭터는 1980년대와 1990년대 미국에서 주목받으며 새로운 청소년 집단 중 하나인 너드(Nerd) 또는 긱(Geek)을 상징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과학에 푹 빠져 사는 학생들은 다른 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때문에 따돌림과 놀림을 당하곤 했다. 하지만 점차 과학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늘어났고 비슷한 성향의 아이들끼리 뭉쳐 새로운 문화가 형성된다. 그들이 바로 너드(혹은 긱)들이다.


이들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높은 수학적 사고를 요하는 '던전앤 드래곤'이란 보드게임을 즐겼고 우주를 자유롭게 오고가는 세상을 그린 <스타트랙>시리즈가 나오자 열광했다. 상상력을 제한받지 않고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만화책에도 관심이 많아 마블(Marvel)의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등교한다.


당시 미국 여학생들은 자기만의 세상에 혼자 빠져 사는 남학생들인 너드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운동도 못하고 말솜씨도 한참 떨어지니 여학생들에게 관심을 받기는 힘들었다. 오죽하면 Nerdy라 말하는 것은 '전혀 섹시하지 않는 4차원'이라는 욕처럼 쓰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너드들이 많아지면서 이들이 학교에서 당한 설움이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소재가 되기 시작했다.



놀림거리에서 트렌드 리더로


시간이 흐르면서 너드들의 위상이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전유물이자 장난감이던 PC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기계가 되면서부터일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왕따나 당하던 너드들은 이제 MIT나 Cal Tech 같은 세계적 수준의 과학대학에 입학하더니 졸업 전에 수억대 연봉을 받는 섹시하고 부러운 젊은이들이 돼 나타났다. 이들 중 일부는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제리 양, 마크 저커버그처럼 정체의 늪에 빠졌던 미국경제를 구하고 미국을 세계 최고 반열에 세운 위대한 영웅으로 포장되기도 했다.



페이스북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마크 저커버그는 항상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밝혔다. 두뇌 과학에서 인간이 하루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용량이 정해져 있다는 점을 밝혀냈기 때문에 어떤 옷을 입을지 결정하는 데 쓸 시간을 줄여 업무에 투자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저커버그의 말에 박수 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사실 저커버그의 이 말은 대단히 참신한 발언은 아니었다. 미국 고등학교에서 널드들이 좋아하는 여학생들에게 하던 말과 비슷하다. 한때 비웃음을 받던 말이 이제는 박수를 받는다니 격세지감이다.



기술이 세상을 지배하는 2015년에 세상이 또 변했다. 너드 같은 여성이 섹시하다는 'Geek is Chic'이란 표현도 생겼다. 컴퓨터 게임을 잘하는 여성이 섹시녀의 상징이 됐다. TV 쇼에서도 너드를 표현하는 방식 또한 많이 달라졌다.


1990년대 미국 TV쇼 'Family Matters'에서는 두꺼운 안경을 낀 너드 캐릭터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했다. 그런데 2010년대 미국 TV쇼 '빅뱅이론'에 등장하는 한 여성 캐릭터는 과거였으면 너드라고 칭해졌을테지만 섹시하다는 평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너드의 이미지가 크게 달라졌는지 금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 패션계에 불어닥친 '너드 신드롬'



이런 변화된 트렌드에 따라 할리우드 과학영화 'Matrix'시리즈부터 '인터스텔라', '마션'으로 이어진 과학영화는 범지구적 흥행을 거두었다. 어린시절 놀림감이던 너드들이 성인이 되고 성공의 표상으로 부각되는 스토리라인은 세계인들의 공감을 얻었고 높은 구매력을 가지게 되었다.


일례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란 마블 코믹 시리즈는 영화로 제작돼 세계적으로 7억7200만 달러의 티켓 매출을 기록했고 너드 문화의 상징이던 트랜스포머는 편 당 10억 달러가 넘는 매출을 기록했다. 너드 문화가 주류를 장악하면서 엑스맨, 캡틴 아메리카, 혹성탈출 시리즈 같은 너드문화의 전유물이 세계적 문화상품으로 재포장돼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너드 문화의 원형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글로벌 문화시장에 끼어들기가 곤란할 정도가 되었다.


2015년 11월 프랑스 일간 <르몽드>에는 긱처럼 옷을 입고 싶어하는 패셔니스타의 비애를 그린 해학적 기사가 실려 주목받았다. 간략한 내용은 이렇다. 긱 스타일이 트렌드라는 소문을 접한 한 여성이 1980년대 긱들의 상징이었던 치아 보정기와 두꺼운 알과 큰 테의 안경을 낀 뒤 유행지난 교복 비슷한 옷을 입고 외출을 한다. 긱 스타일의 패션 덕분에 그녀는 IT업계의 남자를 만난다. 그러나 그 남자가 스타워즈와 과학을 다룬 코믹을 주제로 대화를 하자 너무 난해해서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자신이 무식하다는 생각에 수치심을 느낀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어쩔 수 없이 다시 스키니진으로 갈아입는다는 것으로 풍자 기사는 끝이 난다.


명품시계의 품위가 절대 애플워치에 자리를 내주지 않을 것이라 큰소리 치던 사람들도 'Geek is Chic'이란 트렌드를 짐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드들이 새로운 소비 트렌드 리더로 부상하자 이들은 널드들을 흉내내고 싶은 '워너비' 그룹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긱과 너드문화의 급부상은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 트렌드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꼭 SNS 팔로워가 많은 재벌 2세나 연예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이들은 트렌드 메이커라기 보단 게이트 키퍼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직도 우리는 트렌드나 라이프 스타일과 같은 단어에서 완벽하게 포장된 세련된 모습들은 연상한다. 특히 유행을 선도하는 세련된 연예인이나 패션모델 또는 미국 사교계의 가십에 오르내리는 유명 재벌 2세들의 생활을 연상한다. 많은 패션회사들이 그런 셀럽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SNS를 통해 분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짜 새로운 트렌드의 원형이 들끓는 실험실은 할리우드, 실리콘밸리, 메디슨 에비뉴처럼 일반인들이 동경하는 그런 곳들이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고등학교 교실이야말로 트렌드가 시작되는 실험적인 공간이다. 왜냐하면 혜성처럼 나타나는 새로운 트렌드 리더 그룹도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소비문화를 주도하는 너드나 긱들처럼 학창시절부터 그 형체를 만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둘째 주류 인문학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수출을 많이 하는 기업가들은 소비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서구 인문학을 배워왔다. 하지만 각 트렌드 리더들은 저마다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며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 철학의 기반이 되는 인문학은 취향에 따라 다르다. 너드들에게는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스타트랙 같은 그들만의 고전이 있고 REM이나 Kiss같은 그들만의 클래식이 있다. 미국문화, 유럽문화 같은 막연한 캔버스로 이해할 수 없다.


셋째 우린 새로운 트렌드 리더들이 부상할 때마다 그들의 사고방식과 라이프 스타일의 기본이 된 문화상품을 꾸준히 연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십 년 전만 해도 코믹스나 일렉트로 음악, SF 판타지 같은 건 니치(niche)시장을 공략하는 기업이나 관심을 갖던 비주류였다. 하지만 오늘은 이런 문화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롤모델이고 그들 문화생활이 세련됨의 기준을 좌우한다. 다음 트렌드 리더들 역시 또 전혀 다른 음악, 문학, 문화 취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트렌드 리더가 바뀔 때마다 주류 취향은 180도 바뀔 수 있다.



인터비즈 박소영 김재형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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