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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비즈 May 29. 2020

5초 숙성 위스키? 사라져가는 기다림의 미학

고급 위스키의 핵심인 기다림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위스키는 다른 양주에 비해 비싼 편이다. 왜 그럴까? 오크통에서 여러 해 동안 숙성하기 때문이다. 오랜 동안 숙성할수록 깊고 부드러운 향이 더 잘 살아나서 더욱 비싸진다. 그래서 고급 위스키의 핵심 재료는 ‘기다림’이라고 하기도 한다.


원래 투명한 색인 위스키는 오크통 안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화학적인 변화를 거쳐 색깔리 변한다. 버번으로 유명한 미국 캔터키 주에서는 뜨거운 날씨 때문에 그 기간이 4~8년 정도 걸리고 스카치 위스키의 본산인 영국의 스코틀랜드에서는 날씨가 상대적으로 시원하기 때문에 적어도 12년은 오크통에 있어야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향이 살아난다.



이렇듯 숙성이 중요한 공정이다 보니 이와 관련된 얘깃거리도 많다. 위스키를 오랜 기간 숙성하다 보면 살짝 증발이 돼서 소량이 사라지는 데 이를 천사들의 몫(angel’s share)이라고 하는 게 한 예다.


그런데 과학의 발달 덕분인지, 아니면 인간의 인내심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위스키의 숙성을 몇 달, 몇 분, 심지어 몇 초 단위로 줄여버린 위스키 업체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냥 나타나기만 한 게 아니라 위스키 대회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상당한 맛과 향을 자랑한다. 이 업체들은 음파나 컴퓨터로 통제된 압력과 열 등 다양한 기술을 사용해 위스키를 빠르게 숙성 시킨다. 위스키와 오크통과의 접촉을 늘리기 위해 작은 오크통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른바 고속 숙성(rapid-aged) 위스키다.


대표적인 기업이 미국의 클리블랜드 위스키. 이 업체는 위스키를 6개월만 숙성한다. 이 과정에 금속 탱크를 이용한다. 현대적인 숙성 방식을 통해서 블랙체리향이나 다른 나무 향도 맡을 수 있다고 한다. 보통 위스키 같으면 오크향이 너무 강해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 위스키는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아메리칸 위스키의 호밀(rye) 위스키 경쟁 부분에서 금메달까지 수상했다.


클리블랜드 위스키 / 출처 클리블랜드 위스키 공식 홈페이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로스트 스피릿은 6일 숙성한 위스키를 판다. 고강도의 빛과 열을 쫘서 몇 년 동안에 걸쳐 일어날 화학작용을 빠른 시간 안에 일어나게 하기 때문이라고 업체는 설명한다. 해당 위스키는 위스키 가이드인 ‘2018년 위스키 바이블’에서 4600여 개의 위스키 중 상위 5% 안에 들었다.


6개월이나 6일은 양반이다. 블루리본 맥주로 유명한 파브스트(Pabst)는 5초만 숙성을 한다. 단 5초! 이도 사실은 오크통에 전혀 넣지 않으려다가 버번 위스키 규정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다. 규정에 따르면 버번 위스키는 오크통에 숙성을 해야 한다고 돼 있지만 얼마 동안 해야 하는지 시간은 적시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파브스트는 5초 동안 위스키를 흘려 보내는 식으로 규정을 지켰다. 그래서 그런지 위스키 색이 원래 대로 투명하다. 업체 측은 “5초가 세일즈 포인트가 됐다”며 “숙성 위스키 업계가 우월 콤플렉스를 버려야 한다”고 밝혔다.


파브스트(Pabst)의 위스키(좌)와 에드링턴(Edrington)의 '렐레티비티(Relativity)'(우)


이쯤 되면 ‘듣보잡’ 업체나 신생 업체만 고속 숙성 위스키를 만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아니다. 영국의 유명 위스키 맥켈란을 만드는 에드링턴(Edrington) 그룹은 ‘렐레티비티(Relativity)’라는 이름의 40분 동안 숙성한 위스키를 만든다. 숙성 시간은 단 40분이지만 과학을 이용해 18년 동안 숙성한 듯한 부드러운 맛이 난다고 홍보한다.


당연하지만 기존 위스키 업체나 협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전통을 중시하는 위스키 매니아들도 마찬가지다. 위스키를 만드는 데 지름길은 있을 수 없다며 고속 숙성 업체들이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인간은 절대로 시간을 이길 수 없다는 얘기다. 고속 숙성 위스키가 대중화가 되고 업체들이 나중에 가격을 낮추는 전쟁을 하기 시작하면 위스키 업계가 전체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전통을 중시하는 유럽에서는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 유럽에서는 위스키로 불리려면 적어도 3년 동안 나무통에서 숙성 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클리블랜드 위스키와 같은 업체들은 유럽에서는 판매를 하지 못한다. 또 이러한 고속 숙성 트렌드가 현재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 위스키 시장의 수요를 따라가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인기 있을 때 팔아야 하는데 숙성된 위스키가 없으니 고속 숙성을 한다는 얘기다.


고속 숙성 위스키 업체들은 속임수를 쓰거나 허황된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고 항변한다. 전통에 매몰돼 단지 숙성 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위스키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며 작은 신생 위스키 업체들이 전통의 강호들과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으로 위스키를 만들어야 하고 그 대표적인 방식이 숙성 기간을 줄인 것이라는 얘기다. 고속 숙성이 기업의 세계에서 흔히 ‘혁신’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아직 맛보질 못해서 고속 숙성 위스키가 진짜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고속 숙성 위스키를 마셔본 사람 중에는 나쁘지 않다는 평을 내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일반 위스키와 겨뤄서 상까지 받는 걸 보면 가짜는 아닌 듯 하다.



위스키 얘기를 읽으면서 간장과 된장이 떠올랐다. 대표적인 ‘슬로 푸드’로 우리 음식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들이다. 과거엔 집에서 담가 먹었지만 이젠 대부분 화학적인 과정을 거쳐 공장에서 만든 걸 사다 먹는다. 물론 아직도 집에서 자연적인 재료와 과정을 이용해 담가 먹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만든 걸 파는 장인들도 있다. 하지만 공장에서 만들어진 장들과 비교하면 그 시장은 매우 작다. 위스키도 우리의 전통 장들이 간 길을 그대로 따르는 건 아닐까?


과학 기술의 발달이 가져다 준 편리함과 빠름은 거부하기 힘들다. 하지만 세상에는 시간이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 것도 많다. 시간이라는 요소가 없으면 무너져 내릴 모래성 같은 것들 말이다. 배움이 그렇고 우정이 그렇고 사랑이 그렇다. 우리는 가끔 시간을 너무 가볍게만 여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 참고

- 월스트리트저널: Why Wait? Whiskey Is Aging Fast



 필자 김선우

-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인문지리학과 졸업

- 워싱턴대(시애틀) 경영학 석사

- 동아일보 기자

- 새로운 삶을 발견하기 위해 현재 미국 시애틀 근처 시골에서 작은 농장 운영 중

<40세에 은퇴하다> 작가


인터비즈 임현석 신혜원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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