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터비즈 Jun 11. 2020

'연애'도 대리 만족하는 시대

감정 대리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이유

점심 메뉴 통일 좀 하지 마세요. 나는 다른 거 먹고 싶단 말이야

익명의 제보자가 페이스북 ‘대신 찌질한 페이지’에 보낸 사연이다. 팔로워들은 해당 게시글에 “누가 내 얘기하냐”라는 공감 섞인 댓글을 남겼다. 이 페이지는 지난해 사용자들 사이에서 ‘대놓고 찌질할 수 없는’ 이들의 감정을 제보를 받아 찌질함을 대리해주어 화제가 됐다. 뿐만이 아니다. ‘대신 화내주는 페이지’, ‘대신 욕해주는 페이지’, ‘대신 뻔뻔한 페이지’ 등 감정을 대행해주겠다는 페이스북 페이지들도 등장해 인기를 끌었다. (현재는 여러 페이지의 활동이 뜸하다.) 팔로워들은 ‘나’의 감정을 대리해주는 게시글에 ‘좋아요’를 누르며 실제로 표현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감정을 해소했다.


열 마디 말보다 하나의 이모티콘이 낫다?

매월 카카오톡을 통해 전송되는 이모티콘 메세지 수는 20억 건이다. 페이스북 메신저 사용자들은 매일 50억 개의 이모티콘을 사용한다. 그럴만도 하다. 잘 고르기만 하면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나 화났어" 등의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멋쩍은 감정도 손 쉽게 표현할 수 있다. 과거에는 이모티콘이 의미 전달을 도와주는 수단이었다면, 현재는 이모티콘 하나만으로도 전달자의 감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 디자인이 정교하지 않더라도 감정을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이모티콘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모티콘으로 감정을 대신 전달하는 경우가 보편화 됐기 때문이다.


나 대신 감정을 느껴주는 브라운관 속 그들

<나 혼자 산다>, <전지적 참견 시점>, <미운 우리 새끼> 등 요즘 내노라 한다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액자형 관찰 예능이라는 점이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예능 프로그램에 접목한 형태다. 출연진의 일상을 관찰한 영상을 보며 연예인 패널들이 감상과 해석을 더하는 식이다. 관찰 예능의 시청 포인트는 영상을 지켜보는 패널들의 반응이다. 시청자들은 '나'의 리액션을 대신해주는 패널과 감정을 공유하며 재미를 느낀다.


<하트 시그널 시즌 2> 방송 화면 캡처 / 출처 채널 A


지난해 6월 인기리에 종영한 <하트시그널 시즌2>는 감정을 해설하기 까지 했다. 자칭 연애심리 전문가라는 패널들이 관찰 영상을 보며 출연자의 행동에 '저 남성의 자세를 주목하세요. 사람은 관심이 있는 이성의 행동을 따라하게 됩니다. 지금 두 남녀의 자세가 비슷하지 않나요?'와 같은 해석을 덧붙이며 관찰의 재미를 돋궜다. 현실감 넘치는 출연자들의 행동 묘사와 패널들의 예리한 감정 분석은 시청자들이 마치 내가 그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대학생 이모 씨(22·대학생)는 "방송을 보며 마치 내가 연애를 하고 있는 듯한 대리만족을 느꼈다. 연애를 할 여유가 없는 나로서는 프로그램을 즐겁게 시청했다."고 말했다.


퇴사? 명품 쇼핑? 대신 해드려요 유튜브 통해 대리만족 한다


일상에서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감정을 느껴보기 위해 유튜브에 접속하는 사람들도 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있는 '퇴사 브이로그(Vlog)'가 대표적인 예다. 퇴사.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사표를 품고 산다지만 막상 결정을 내리기 쉽지않은 일이다. 그런데 영상 속 브이로거들은 사직서를 작성하는 영상을 촬영하며 퇴사 전의 고민을 함께 나누기도 하고, 퇴사 당일의 일상을 촬영하며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담아낸다. 아침 출근길부터 모든 업무를 정리하고 동료들과 송별회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식이다. 퇴사 브이로그 영상은 구독자들에게 '나도 언젠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떠날 수 있겠지'라는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나'의 소비욕을 해소해주는 하울(Haul)영상도 구독자들 사이에서 인기다. '8000만원어치 명품 쇼핑 했어요! 쇼핑 박스 같이 뜯어봐요'와 같은 제목의 영상 속 유튜버는 쓸어 담듯이 구입한 고가의 명품 제품을 품평한다. 유튜버들은 명품의 디테일을 하나하나 만져보며 어느 부분이 예쁘고 왜 이 제품을 구매하게 됐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상을 접하는 구독자들은 이를 단순한 돈자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쁜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는 한편 "쉽게 접할 수 없는 물건을 영상으로 접하는 것만으로도 대리만족이 된다"는 반응이 대다수다.


감정 대리 콘텐츠는 왜 인기를 끌고있나


감정 대리 콘텐츠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몇몇 전문가들은 본인의 감정을 해소하는 데에 서투른 현대인들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온라인 대화를 오프라인 대면 관계 보다 더 익숙하게 생각하는 디지털 네이티브가 많아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 스스로의 감정 표현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쌓아뒀던 감정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감정 대리 콘텐츠를 찾는다는 해석이다.


감정 대리 관련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는 것이 일시적인 감정 해소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나, 실제 개인의 감정을 해소하는 데 있어서 본질적이지 않은 방법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감정 대리 콘텐츠의 인기가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진 않다. 콘텐츠 소비 시장에서 디지털 네이티브의 영향력은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 위 글은 책 <트렌드 코리아 2019>를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인터비즈 이슬지, 임현석
inter-biz@naver.com


작가의 이전글 1초에 200개씩 팔리는 국민커피, 잘 나가도 불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