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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스머프 Jan 10. 2023

퇴사만 31번, 습관적 퇴사자의 고백

5. 시차적응

무려 210일 동안 글을 올리지 않았다는 브런치 알림을 봤다. 지금은 그 후로도 약 보름이 더 지났다. 말하자면 220~230일여간 브런치에 글을 쓰지 않았단 거다. 

짤이 너무 옛날 건가??

그럼 그동안에는 무엇을 했느냐. 두 가지 일을 했다. 그중 하나는 출근을 하면서 했다. 그래서 '퇴사자 인 더 하우스'를 이어갈 수 없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퇴사자'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뭐 바쁘기도 했고ㅎㅎ) 그 말은 지금은 또 회사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출근이었다. 


그래서 오늘 할 이야기는 그간의 얘기이자 글쓰기에 관한 것이다.


객원기자로서 외신 번역 위주의 기사를 써달라는 언론사 측의 제안으로 일을 시작했다. 외국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글이 많이 도와주고, 또 기자일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기본 번역이 된 외신을 기사화하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제안을 수락했다. 물론 원고료가 쏠쏠했다는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그리 많지 않지만 한 달 용돈으로 사용하기에 충분한 고료를 받았다.

하지만 작은 언론사가 언제나 그렇듯 사람이 바뀌고, 또 상황이 급변한다. 기존에 있던 기자들 대부분이 내부갈등으로 인해서 언론사를 떠났다. 따라서 거의 모두가 떠난 빈자리를 채울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회사는 급한 대로 객원기자 중에서 채용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당시 객원기자 중 그나마 기사다운 기사를 쓴다고 판단되는 나를 선택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출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는 거다. 게다가 해당 언론사에서 다루는 분야가 AI였기 때문에 더더욱 관련 기자가 될 생각을 하지 않았다. 

IT회사에 2년 넘게 있었지만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해서는 눈곱만치도 몰랐고, 특히 AI는 뭐 아예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테크 분야를 전문적으로 쓰기에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그 분야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지독한 '문과' 성향이기도 해 새로운 기술엔 호기심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연봉을 좀 세게 불렀다. 인터넷 언론에서는 줄 수 없는 금액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되면 출퇴근을 할만한 이유가 생기는 거고, 안 되면 집에 있으면 되는 일'

이었기 때문에 좀 세게 질렀다.


그런데 계약이 됐다. 요구한 연봉을 준다는 거였다. 그리고 연말까지만 계약하고 싶다는 나의 요구도 받아들여졌다. 어쩌면 그 이유로 나의 급여 요구를 수용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얼떨결에 출근을 하게 된 나는 아주 기계적으로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외신을 살펴보고 어떤 기사를 쓰겠다고 데스크에 통보한 뒤 써보라고 하는 기사를 썼다. 하루에 4~6개의 외신 번역 및 취재기사를 기계처럼 뱉어냈다. 집에 와서는 머리가 지끈 거릴 정도였지만 어쨌든 기계처럼 쏟아내고 6시 땡 치면 나왔다. 그렇게 2주 정도 외신 쓰는 기계처럼 보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뒤바뀌는 데는 하루면 족했다. 3주 차에 새로운 국장이 들어왔다. 그리고 나에게 기계가 아닌 기자가 되라고 했다. 그때 바로 그만두겠다고 했다면 여운이 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정한 기자' '제대로 기사 쓰는 기자' 이런 말들은 언제나 나 스스로 추구하던 모습이었고, 그걸 추구한다는 이유로 나가는 것은 스스로 용납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출근한 지 한 달도 채 안된 시기에서 나간다니... 아무래도 좀 그랬다.

새로 온 국장은 테크 분야에서 '고인물'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테크 전문지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신문에 25년간 재직했고, 은퇴 전까지 전국 기자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재직 중인 언론사의 초대 국장이었다가 제대로 기사를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더 다닐 이유가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국장이 원하는 진정한 기자, 기사 잘 쓰는 기자가 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나로서는 나쁠 것이 없는 선택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언론사에서 기사를 잘 쓰는 기자가 되라는 것은 나무랄 데 없는 요구니까. 


문제는 '잘' 혹은 '제대로'라는 표현이었다. 


국장에게 있어서 기사를 제대로 쓴다는 의미는 '종이신문에 기재될 수 있을 만큼'이었다. 학창 시절에 논술 공부한다고 신문 스크랩하며 글쓰기 연습을 해본 사람이라면 익숙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신문체' 혹은 '기사체'. 딱딱하고 재미없으며 가장 읽기 싫은 그 문체를 구현해 내는 것이 기사를 제대로 쓰는 것이었다.

유튜브 캡처

물론 신문사에 나름의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 문체로 많은 양의 기사를 쏟아내고 있던 터라 문제가 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스스로 기사를 제대로 쓰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은 국장이 기사를 데스킹 하는 첫날 알게 됐다. 기사는 내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규칙이 많았다. 


약 7년 전에 있었던 언론사에서 매일 경제 출신의 편집국장이 "나는 처음 입사해서 6개월 동안 한 줄짜리 주식 시장 현황만 썼다."라고 자랑처럼 자신의 고된 글쓰기 훈련과정을 말했던 게 떠올랐다. 그때 당시 나는 속으론 그렇게 미련한 짓을 하니까 지금 언론사가 다 망해가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오~"하고 반응했었다.


국장도 그런 훈련과정을 겪었을 거다. 그런 훈련과정을 거쳐 기사로서의 규정과 틀을 다진다.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지만. 


기성 언론에서 말하는 기사는 법칙이 아주 많다. 이는 한 번에 익힐 수가 없다. 그리고 원칙을 벗어나는 경우도 아주 많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적용하기도 힘들다. 따라서 오랜 숙련을 거친 자가 데스킹을 보면서 고쳐나가거나 틀릴 때마다 지적하는 수밖에 없다. 


절대로 한 번의 교육으로 다 정립되지 않는다. 그 문체에 익숙해지고 자다가도 그렇게 기사를 쓸 수 있도록 훈련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훈련은 사람이 아닌 기계가 더 잘 받는다.


'아... ㅆㅂ 이런 걸 AI 시키지. 좋은 거 많은데...'


대표적인 좋은 거

국장은 현장에서 취재하고 자유롭게 기사를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유로운 글을 쓰기 위해서 기본 틀을 정확히 알고 그 글을 완벽히 마스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 글을 쓸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물론 나도 그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글쓰기에 대입할 생각은 없다. 정말로 그렇다면 젊고 유망한 작가는 절대로 탄생하지 못할 테니까. 


사실 현업 기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우리 언론이 가지고 있는 틀이 전형적인 일본식,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일제강점기 일본 언론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언론의 태생이 일제 강점기에 있다 보니 그때의 틀이 정답이라 생각하고 그 틀을 고수해 왔다. 아니 그 틀을 더욱 공고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 왔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다른 형식의 기사를 비난하는 것이다. 


우리 언론은 기사의 본질적인 가치가 '가장 효율적으로 사실을 전달하는 것'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 형식에 벗어난 기사는 '기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때부터 기사는 존재했고, 역사를 기록하는 것만큼 철저한 원칙이 있었다. 바로 거짓 없이 적되 쓰는 사람의 의견을 넣어 평한다는 것이다. 모든 글이 그렇다. 하지만 우리 기사는 어떻게든 이 글이 기자의 의견 없이 사실만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게 바로 일제강점기의 습관이다. 어쩌면 엄혹한 군사 독재 시절의 흉터일 수도 있다. 완전한 근거에 입각하지 않으면 쓰지 않으면 잡혀가서 고문을 당할 수도 있고 또 취조 시 할 말이 없으면 안 된다는 근원적인 두려움으로 만들어진 효율성이란 방패. 


그러나 이 효율성은 지금 각종 권력에 할 말은 못 하면서 자신들이 지켜야 할 틀로만 남아 언론을 망하게 하고 있다. 취재가 덜 됐다는 말은 기사를 막기 위해 데스크에서 하기 가장 좋은 말이니까.

국장은 '아끼다 똥 된다'는 말을 자주 하면서 기사거리가 있으면 발효시키지 말고 얼른얼른 쓰라고 책망하듯 말했다. 하지만 언제나 틀이 정확히 지켜져야 기사를 출고할 수 있었다. 뭐 편하긴 했다. 써서 던지면 규격에 맞춘 글로 재탄생시켜줬으니까. 그 과정은 재미있는 글을 가장 재미없게 만드는 과정으로 보였고, 또 과정은 매우 더뎠다. 


심혈을 기울여 쓴 기사는 대체로 똥이 돼서 나왔다. 국장은 왜 수정한 기사를 보지 않느냐고 했지만 솔직히 너무 재미없어서 볼 수가 없었다. 


사실 이렇게 재미없는 글이 나오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찾으라면 요즘에는 소송이 크다. 워낙 언론 및 표현의 자유라는 것에 대해 개념이 적은 우리는 모욕죄, 허위사실 공표죄 같이 외국에선 이미 사문화된 법들이 아직 살아있다. 아니 아주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 - 물론 요즘에는 다른 나라에서도 죽었던 법이 살아 나온다고는 하더라... -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에 언론사 내부가 이런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지만 나름대로 소송에서 지지 않는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조치들을 가지고 있다.


뭐 다 좋다. 기사의 역할을 사실 전달로 보는 것도, 소송당하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해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그런 기사가 재미있고, 독자들이 좋아하며, 그런 기사야말로 끝까지 읽힌다는 국장의 말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이것은 완전히 기자들의 논리에 빠져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 근거로 우리는 이제 포털에서조차 기사를 끝까지 읽지 않고 있고, 유튜브가 그 자리를 완전히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긴 글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기사를 읽지 않는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사람들이 모든 긴 글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면,
혹은 더 이상 긴 글을 선호하는 사람이 없다면
작가들은 다 굶어 죽었게?


기자들이 정확히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람들은 모든 긴 글을 다 읽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사를 안 읽는다는 거다. 왜냐면 읽히지 않고 재미도 없으며 틀에 박혔으니까. 그 틀에 박힌 글이 읽히고 재밌다면 그것은 나이가 지긋한 퇴역 기자일 거다. 어쩌면 그들도 안 읽을 수도...


사실 외신을 번역하다 보면 피식하고 웃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기사에 비유를 하기도 하고 비꽈서 표현하기도 하며 소위 젊은이들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섞기도 한다. 또한 어떤 분야의 권력자를 아주 일상적으로 조롱한다. 그래서 기사를 보면서도 웃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기사를 보며 웃는 일은 없다. 기사 자체가 매우 경직되어 있어서 웃으면 안 된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렇게 경직된 기사는 곧 경직된 사회를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외국인이 만약 한국은 많이 경직된 사회냐고 묻는다면 비교적 그렇지 않다라고 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언론사의 기사는 일제강점기나 독재 권력이 있던 시대의 원칙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경직되어 있다. 따라서 언론사는 경직되어 있다는 게 맞다. 


그 경직된 자세와 글은 사람들이 종이신문을 보지 않는 이유가 됐고, 이제는 포털 기사를 보지 않는 이유가 됐으며, 앞으로 아무도 언론기사를 보지 않을 이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대와 그릇이 다 변했는데 그 안에 내용물이 백 년 동안 그대로라면 썩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거다.


기사는 거의 대부분 두괄식으로 쓰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앞에만 읽고 뒤는 읽지 않기 때문에 앞서서 설명을 다 해야 해서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종이 신문을 만들던 때 얘기를 꺼냈는데 "지면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것은 뒤에서부터 삭제한다"는 것이었다.


모두 아시다시피 지금은 98%의 뉴스 소비자가 종이신문 외의 매체에서 뉴스를 읽는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온라인에는 지면이 없다. 그래서 외신은 가능한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고 애를 쓴다. 그 많은 정보를 줄줄이 나열하면 읽지 않기 때문에 기자의 필력을 요구하고 그러면서 농담도, 비유도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여전히 신문지면을 염두하고 기사를 쓴다. 왜냐구? 그 틀에서 벗어나면 기사가 아니니까.


솔직히 헤드라인, 혹은 앞에 몇 줄만 읽고 넘기는 글을 쓰기 위해 왜 훈련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너무나 큰 모순이지 않은가? 독자들 대부분이 제목만 읽고 넘길 글을 쓰기 위해 고된 훈련한다는 것이? 그 시간에 이야기를 전할 필요가 있는 곳을 취재하는 게 어떨까?


흠... 좀 다른 이야기지만 사실 틀에 얽매인 채로 재미있는 글을 쓰는 경지란 전문 작가로서도 상상하기 힘든 영역이다. 

셰익스피어(좌), 톨스토이(우상), 도스토예프스키(우하)

역사적으로는 셰익스피어가 가능했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도 가능했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이백과 두보, 그리고 조조가 총애했던 아들 조식, 우리나라에는 최치원 정도가 가능했을 거다. 하지만 기자 중에서 그게 가능했다는 사람은 들어보지 못했다. 내가 알기로 기사 잘 쓰는 기자는 취재 잘하는 기자다. 틀을 잘 지키는 기자가 아니라.

물론 취재를 잘하려면 기사에 무엇을 담을까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독자들이 궁금한 게 뭘까 고민하는 것은 글 쓰는 사람의 도리다. 그런데 취재를 하기 전부터 독자들이 뭘 궁금해할지 정해놓고 그것을 취재하라는 것은 현재의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음. 그래, 요약하자면 역량이 부족했다. 그런 기자가 되기에는.


어쨌든 원래 맺었던 계약이 끝나고 그만뒀다. 회사는 처음에 정한 급여가 너무 많다며 조정을 원했고, 나는 연봉을 조정하면서까지 계약기간을 연장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테크 분야라서 더 쉽게 결정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만약 예전처럼 사회문제와 정치문제를 다뤘다면 연봉 문제로 그만두기는 명분이 없었을 거다.


물론 갑작스럽게 퇴직을 하다 보니 아쉬움이 많다. 그간 연결이 된 사람과 일이 많았는데 그리고 하려고 했던 일도 꽤 있었는데 그걸 못 마치고 나오게 됐다는 게 특히 그랬다. 좀 더 깊이 알고 싶은 분야도 생겼고, 좀 더 사귀어 보고 싶은 분야의 전문가들도 있었는데 그런 고리가 이제 연결되기 어렵다는 점이 아쉽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더 많은 고리가 생기기 전에 나왔다는 것이. 기사 쓰는 건 좀 배우고 나왔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글쓰기 틀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한참 해야겠다.


글쓰기에도 시차적응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익숙해진 것에서 벗어나는 연습. 그 기간이 시차적응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지금 분명한 건 그 딱딱한 문체를 빨리 떨쳐내지 않으면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게 될 것이란 거다.


아듀 AI!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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