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역사

1화 :조선의 여성⑤

by 노란스머프

조선의 여성들이 고려의 여성에 비해 수동적이었다는 일반의 인식은 시대를 역행하고 있다. 인류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서서히 진보해왔고, 근대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여성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였으며, 더 많이 표현할 수 있길 바랐다. 물론 그 예외도 존재하고 그 속도가 너무 느려서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어느 때는 정말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회가 발전할수록 여성의 인권도 향상되어 왔다는 것은 큰 틀에서 명확하다. 동서양을 통틀어 19세기 중후반까지 가장 사회인식이 발달되었던 나라가 바로 중국과 조선이다. 그런 사회에서 여성인권만 바닥을 기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례로 고려시대나 조선 초까지 이렇다 할 여성 문호가 없었으나 초기를 벗어나 후기로 오면서 여성들도 글을 익히는 예가 늘어난다. 그저 집안을 챙기는데 일생을 바치던 여성상에서 벗어나 사회참여가 늘어났고, 자신을 충분히 표현해 남성들의 문학, 혹은 예술과는 결이 다른 결과물을 내놓는 경우도 늘어났다.

신사임당의 초충도(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그럼에도 왜 우리는 조선 여인의 억압과 억울한 처지만 떠올리게 되었을까? - 그래 이 글의 시작이 바로 이 질문이었지. - 그 질문의 일차적인 답은 전에도 한 바 있다. 일제강점기 잘못된 역사교육이 있었고, 큰 전쟁 이후 집안의 상속과 제사에 관련한 권한을 남성이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기서 이런 결과가 생기게 된 원인을 찾아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보면, 역시 성리학을 거론할 수밖에 없다.


조선의 선비들은 명나라의 황제를 자신들이 섬겨야 할 진정한 주군으로 여겼다. 이에 대해선 전에도 언급한 바 있는데, 많은 조선의 선비들이 조선의 왕을 불사이군의 ‘군君’으로 둘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뿌리 깊은 사대주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자에 대한 존경심이기도 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주자가 섬긴 왕, 그러니까 중국 한족漢族의 황제를 주군의 위치에 두었다. 이 땅의 왕은 중국 제국의 제후 정도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려의 왕을 몰아내고 조선을 세우는 것이 가능했다. 유교에서 가장 상위 단계의 가치인 충忠을 손상시키지 않고 선비들이 중심이 되는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위한 조치요, 자기모순을 해결하는 논리였다.

난설헌집(출처 -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

고려의 정당성을 부정할 만한 이유는 또 있었다. 원의 지배를 받던 고려가 전쟁을 통해 원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원의 기세가 쇠해 명나라가 득세한 틈에 공민왕이 독립을 선언하고, 황제를 자처했기 때문에 정당성을 가지기 어렵다는 전제를 가졌다. 고려의 왕에게는 정당성과 명분이 없다는 것이 선비들의 생각이었다.


물론 고려의 왕을 주군으로 여기며 충절을 잃지 않았던 선비들도 있었다. 이와 관련된 고사성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다. 당시 수많은 선비들이 불사이군의 도를 지켜내기 위해 두문동에 모여 살며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건국공신들은 이들을 협박하여 뜻을 꺾도록 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두문동에 불을 질러서 선비들을 죽였다. 두문동의 선비들은 끝내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는데, 이를 배경으로 생긴 말이 두문불출, 즉 밖의 소식도 모른 체 안에만 박혀 있는 형국을 뜻하는 말이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파병을 해준 명나라 신왕을 기리는 목적으로 지은 사당, 만동묘. 그 안에 세운 괴산 만동묘 정비 (출처 - 문화재청)

결과적으로 조선에는 명나라의 황제를 자신들의 ‘군’으로 생각하는 선비들만 남게 됐다. 역사에 있어서 100% 그랬는가 하는 문제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물론 살아남은 선비 중에도 이 땅의 왕을 왕으로 모시는 충신이 있었겠지... 하지만 그들이 주류는 아니었다. 일례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에 맞선 것으로 알려져 수백 년간 민족의 적이 되어버린 원균은 젊은 시절 화려한 전공에도 불구하고 출세길이 막혀 있었는데, 그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조상 중에 고려의 충신이 있었다는 데 있다. 고려가 멸망한 지 무려 20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주류 세력의 견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성리학을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학문에 정진한다는 뜻을 넘어서 사회 전반을 이끌고 가는 기준을 배운다는 뜻과 같았다. 성리학에서 옳다고 하는 이치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또 해석하는 게 당시의 상식이었다. 조선의 건국 공신들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원나라의 불교문화 때문에 권문세족들이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불교를 주류에서 강제로 치워내고, 그 자리에 유학을 채웠다. 그리고 이러한 성리학의 법도를 만든 명나라를 사대하고, 그 법도에 따라야 할 선봉에 바로 조선의 왕실이 있었다.


자, 무려 5편 만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발판이 마련됐다. 조선 왕실에서 시작된 조선 여성에 대한 족쇄가 어떻게 사회 전반으로 퍼졌고, 조선 말엽에 이르러 기형적인 억압의 형태로 표출되었는지 이야기를 시작할 수가 있게 되었다.


아, 행복하다. 이제 원래 하려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됐어!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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