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까지 H는 여러 차례 선을 봤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다르다고 했다. 겉으로는 축하한다 한턱 쏴라 웨딩드레스가 눈에 그려진다며 기쁜 척했지만 속으로는 엉엉 울었다. H가 정말 이번엔 영영 가버릴 것 같은 슬프지만 묘한 감정이 들었다. 아 물론 죽음이 아니라 결혼말입니다.
H로 말할 것 같으면 나와 고등학교 동창에다가 2년 정도 같이 살았던 유일한 노처녀 듀오 중 한 명, (고)독사 클럽의 최초 멤버이자 나를 뺀 유일한 멤버이다. 우린 평생 솔로로 잘생긴 연예인만 핥다가 40살 되는 기념으로 스위스 알프스 산맥에서 3만 원짜리 농심 컵라면을 먹자고, 혈서 쓰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한 건 아니지만 서로가 끝까지 솔로일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혹은 은연중에 네년보다는 내가 먼저 가겠지 싶은 마음도 있었을지도. 이제껏 '나는 솔로다'가 아닌 '우린 솔로다'의 동지감으로 똘똘 뭉쳐 살아왔건만 H가 솔로 둥지에서 떠날 준비를 하다니. 이제는 정말 '나만 솔로다'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서로의 모든 선을 옆에서 지켜봤다. 약간의 대리만족이라고 해야 하나. 서로의 아바타가 된 것처럼 집에 누워있어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천리안의 눈으로 선의 모든 과정을 훤히 꿰뚫어보고는 매번 '역시가 역시 했다'며 선의 실패를 자축했다. 우리에게 선은 '나만을 위한 단 한 명의 염색체 XY를 찾는 것'이 아니라 긴 밤 맥주 안주거리가 될 '낄낄거릴 에피소드 소재 찾기 미션' 같은 거였다. 둘 다 한 번도 두 번째 만남까지 이어 진적은 없기에 우리는 역시 솔로로 죽을 팔자라며 열심히 돈만 벌어 실버타운 옆집에 오순도순 살자고 매일밤 다짐했건만 이번에는 진지하게 흘러갈 것 같다고 H가 수줍게 말했다. 힝.
아. H마저 가버리면 나는 이제 누구랑 남자 연예인 사진 보면서 낄낄거리나. 이제 나는 누구랑 코인노래방 가서 3시간 동안 락을 부르며 목놓아 우나. 이제 정말 나는... 누구랑 놀아야 하나. 흑흑. 내 주변 친구들은 거의 다 떠났다. 친구들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그 강을 건너버렸다. ( 한두명은 다시 홀로 헤엄쳐서 돌아오기도 했.. )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를 따라 강 건너, 나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떠나버렸다. 아 요단강 말고 결혼말입니다.
사실 요즘 나에게 첫 조카가 생긴 후로 혹은 H의 핑크빛 연애기류가 흐른 뒤로 결혼에 대한 잡생각이 많아졌다. 나란 사람은 결혼이 어울릴까. 이 험한 세상 혼자 살아가기도 벅찬데 내가 과연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남자와 천년만년 함께 할 수 있을까. 나 자신 하나 케어하기도 힘든데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의 튼튼한 울타리가 될 수 있을까 싶은 그런 오지도 않을 미래를 미리 걱정하고 앉아있다.
한 남자와의 결혼과 아이 출산. 내가 한 남자의 아내와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것. 상상도 안된다.읔.
나는 아이들을 케어하는 곳에서 오랜 기간 시달리며 일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아기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지워버렸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자식이거늘. 물론 자기 자식의 똥은 보석처럼 예뻐 보인다는 말처럼 나도 막상 나의 아이가 생기면 금쪽같은 내 새끼 우쭈쭈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예쁘고 바르게 키울 자신이 없다. 아이도 남편도.
사실 이러한 생각은 매년 바뀐다. 어떤 해는 남편 없이 나 닮은 아기만 키우고 싶다가도 어떤 해는 자녀 없이 남편이랑 오순도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여보 자기 달링 하면서 단둘이서만 살고 싶고, 어떤 해는 그냥 혼자 실버 노처녀가 돼서 유기견 10마리를 키우며 자연에 살다가 삶을 마감하고 싶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현재로선 비혼을 열망하지만 그렇다고 혼자 늙기는 싫다. '혼자'있고 싶지만 '혼자만' 있기 싫은 아리송한 마음. '저 나이 되도록 결혼도 못한 김씨네 딸'로 남겨지기보다는 친한 노처녀 친구 한두 명과 함께 에프터눈 티를 마시며 곱게 재밌게 늙고 싶다. 나의 완벽한 노후계획에 H가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그런 H마저 내 상상 속 파자마 파티에 참석하지 않는다 생각하니 왠지 서글프다. 물론 H가 좋은 남자 만나 예쁜 아이들 10명씩 낳고 지지고 볶고 재밌게 살면 나도 친구로서 행복하고 진심으로 기쁘겠지만 현재로서는 구멍 난 가슴에 우리의 추억이 흘러넘쳐. 총 맞은 것처럼. 흑흑흑.
으허허헣어허허허헝.
으허허헣허허허허허헣허허허으허허헣허헝.
으헝. 제발 날 떠나지마 흑흑.
H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남자를 두세 번 만나다 보니 역시 자기는 아직까지 누군가를 만날 준비가 안된 것 같다고 그 분과 좋은 친구로 남기로 했다고 했다. 아쉽지만 어쩔수없는 선택이라나 뭐라나. 끼야야야야얏호. 나이스.
역시 H는 날 배신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아 어떡해. 이번에는 진짜 잘되길 바랐는데..."라 말했지만 속으로는 기쁨 만족 행운 행복 폭죽을 터트렸다. 나 참 못났다 못났어. 하지만 올해도 내년도 나는 솔로가 아니다. 우린 솔로다.
나의 이 못난 마음은 어디서부터 생긴 걸까. 친구를 뺏긴다는 마음보다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같이 지내며 수없이 많이 쌓아온 우리의 추억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과 다시는 예전처럼 지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컸던 것 같다.
이런 두려움과 불안감은 경험에서부터 나왔다. 이미 많은 친구들이 나를 떠났다. 떠났다는 표현보다는 '우정'이라는 둥지에서 떠나 '사랑'이라는 자기들만의 새로운 둥지를 찾아갔다. 그렇다고 관계가 끊어진 건 아니지만 예전만큼 우리는 무모하지도 않았고 애틋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재밌지도 않았다. 그들은 각자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난 아직인데. 난 여전히 즐겁고 재미난 일만 찾아 무모하게 살고 싶은데 같이 모험을 떠날 친구들이 없다. 어쩜 난 겁이 나서 어른이 될 준비를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다른 친구들이 결혼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듯이 H마저 나를 떠날 것 같은 미련스러운 마음에 며칠간 혼자 속앓이를 했다. 지금까지는 혼자가 아니라 H와 둘이라서 덜 외롭고 덜 불안하고 덜 급했다. 나는 알고 있다 언젠가는 H도 떠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될까. 둥지를 떠날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찾아야만 해야하는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