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는 키가 크다. 왕년에는 180cm가 넘었으나 지금은 노쇠 노쇠 늙어서 노쇠가 되어 175cm까지 줄었다. 우리 엄마도 키가 크다. 소실적에는 키 크고 날씬하여 젓가락이란 별명이 있었으나 지금은 165cm까지 줄고 상체비만이 되어 숟가락으로 별명이 바뀌었다. 키다리 유전자를 물려받는 오빠와 나도 키가 크다. 오빠는 187cm이고 나는 168.4cm이다. 나는 우리 집안이 키가 큰 게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퇴사를 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뒤로 우리 가족은 키만큼이나 옆으로 점점 퍼져버렸다.
우리는 조금씩 자주 계속 뭔가를 먹는다. 딱히 많이 먹지는 않는다. 다만 입에 공백이 생기는 걸 싫어한다. 살찌는 달고 짠 음식을 좋아하는 것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린 움직이는걸 극도로 귀찮아한다. 나는 내 방 컴퓨터 앞에, 엄마는 거실소파에, 아빠는 큰방 침대에 누워 각자 공간의 지박령이 되어 하루죙-일 쩝쩝거리며 보낸다. 우리 세 식구가 유일하게 얼굴을 마주 보는 건 하루 3번 식사시간 때뿐이다 마치 견우와 직녀처럼.
그러다 아빠가 텔레비전에서 맛있는 음식을 보거나, 내가 새로운 맛집 정보를 알아내거나, 엄마가 밥 차리기 귀찮거나, 날씨가 덥거나 춥거나 비 오거나 눈 오거나 해가 뜨거나 할 때, 즉 매일 오골오골 모여 외식을 하러 나간다. 뭔가 거창하게 먹으러 나가는 것 같지만 우리 세 돼지의 식당은 이미 정해져 있다. 아빠의 아귀찜집, 나의 짜장면집, 엄마의 돈가스집. 소름 끼칠 정도로 우리는 같은 루틴을 그리며 식당 세 군데를 쳇바퀴처럼 돌아다닌다.
다들 급격하게 5kg 이상 체중이 불어나 걷는 것도 예전만큼이나 가볍지 않고 굼떠졌다. 각자 한 명의 인격체로 있을 때는 살찐 것에 대한 심각성을 못 느끼지만 세 명이 동시에 같이 다니면 그 시너지 효과가 나온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이 우리를 보더니 요즘 살림살이가 많이 좋아졌냐며 세 식구 모두 행복해 보인다는 말로 돌려깠다.
마침 방송마다 다이어트며 내장지방의 위험성이며 성인병이며 떠들어대는 바람에 건강도 걱정되고 해서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되고) 우리 세 뚱뚱이는 올해 여름, 인생 마지막 다이어트를 하기로 했다. 그 어느 누구 하나 낙오자가 될 수 없게 서로 잘 이끌어가자며 굳은 결심을 했다. 큰 일을 앞두고 돼지머리를 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우리 가족도 다이어트라는 큰일을 앞두고 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의식을 하자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고 결국,
거룩한 김치 삼겹살 의식을실시했다.
돼지머리나 돼지삼겹살이나 어차피 같은 맥락이 자나ㅏㅏ.
당분간 못 먹는다는 생각에 많이 뱃속에 저장이라도 해두자 싶어 우리 가족은 이 날 많이도 먹었다. 하도 자연스럽게 고기가 계속 나오길래 무한리필인 줄 알았는데 아빠의 단골 고깃집이라 고기가 떨어질 때마다 알아서 챙겨달라고 미리 부탁한 거란다. 이것이 자고추. 자연스러운 고기 추가요. 역시 우리 아빠는 배우신 분이다.
고기를 푸짐하게 먹은 다음날, 딱히 허기가 느껴지지 않아 우리 모두 아침을 걸렸다. 나름 간헐식 다이어트이라 공복을 오래 유지하는 게 살 빠지는 첫걸음이라며 서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잠시 참기름을 사러 나갔다 온 엄마가 귀신을 본 사람처럼 집으로 헐레벌떡 들어와서는 우리 동네 현미관 중국집이 40주년 행사를 한다고 했다.
아 현미관이여.
내가 어릴 때부터 먹고 자랐던, 2천원이었던 짜장면을 5천원인 지금까지 늘 이용했던 혓바닥의 고향 같은 곳이다. 동네 터줏대감 중국집이 40주년 행사를 한다니. 아빠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아니라고, 예의가 아니라며 말도 안 된다고 격노하셨다. 아니 무슨!
짜장면 한 그릇이 삼천원이라니니ㅣㅣㅣㅣㅣㅣㅣ
말도 안 된다며 격노하셨다.
먹어줘야지 그럼 그럼. 동네 사람과의 의리를 위해 먹어야지.
우리는 아침 겸 점심으로 중국집 40주년 축하를 위해 예의를 차리러 갔다. 초콜릿빛 짜장소스를 마주하고 앉으니 절로 가슴이 웅장해졌다. 짜장면은 언제나 옳다.
이제 더 이상 음식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자고 다짐하고 나는 부랴부랴 도서관에 가서 [한 달 반 만에 9kg 감량 운동 없는 맛불리 다이어트] [운동 없이 8kg 감량 저탄수화물 다이어트 레시피][유지어터 권미진의 먹으면서 빼는 다이어트 레시피] [읽으면 살 빠지는 이상한 책]을 빌려왔다. 운동해서 뺄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식단으로만 살을 빼겠다는 나의 강한 의지가 돋보이는 탁월한 도서 선택이라며 엄마는 나를 칭찬했다. 책만 봐도 벌써 살이 빠지는 기분이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삐뚤어진 신념을 가지고 입으로만 다이어트를 하는 아가리어터가 되어있었다.
아침으로는 한식을 먹고 점심으로는 간단하게 감자나 옥수수를 먹고 저녁은 미숫가루를 먹었다. 우리는 이틀을 잘 견뎠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몸무게를 쟀다. 제일 처음 엄마는 무게를 챘는데 1kg가 더 쪘다. 체중계가 이상한 것 같다고 체중계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단추가 많은 옷을 입어 돼지젖처럼 무게가 많이 나온 것 같다며 단추 무게라 했다. 옆에 있던 아빠는 말도 안 된다며 우리 몰래 뭐 먹은 거 아니냐며 엄마를 조롱하고는 호기롭게 체중계에 올랐는데 저번과 별 다르지 않았다. 아빠는 아무래도 아파트가 오래돼서 지반이 기울어진 것 같다고 체중계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본인 느낌으로는 한 3kg 정도는 빠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둘 다 아무것도 안 하고 집안에서만 돌아다녀서 그런 거라며 다이어트는 내가 전문이라 큰소리쳤는데 1.7kg 더 찐 걸 보고 아무래도 내 옷도 두껍고 아파트가 기운게 맞다고 엄마 아빠말에 공감했다. 아무래도 1.7kg만큼이나 허언이 는 것 같다.
먹는 걸 급격하게 줄이니 아침 점심을 더 많이 먹게 된다고, 차라리 건강한 음식을 스트레스받지 않고 먹는 게 더 다이어트가 될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한 우리의 잘못된 믿음으로 살 안 찌는 건강한 단백질과 신선한 야채, 특히나 매운 게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불족발 대짜를 시켜 야무지게 먹었다.
고추는 살 안 쪄. 백김치는 살 안 쪄. 물에 빠진 고기는 살 안 쪄. 맛있는 건 살 안 쪄.
그렇게 그날 우리는 혓바닥 수위 조절에 실패했다.
우리 가족은 절대 음식조절해서는 살 뺄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자 식사는 원래대로 먹되 다른 방향으로 도움을 받아보는 게 어떨까 논의했다. 텔레비전에 나온 한의사 선생님이 살이 빠지는 혈자리가 있다는 말에 침을 놓으면 빠른 다이어트가 되지 않겠냐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식욕저하에 도움을 주는 귀에 위치한 기점혈, 몸속 독소를 빼준다는 인중에 위치한 수구혈, 동자혈, 승읍혈 등등 얼굴에만 해도 여러 군데가 있었다. 이 모든 혈자리에 침을 맞으면 살이 쭉쭉쭉 빠지겠지? 한의원에 가서 당장 살 빠질 수 있는 모든 혈자리에 침을 놔달라 부탁해야겠다. 우리가 뚱뚱한 만큼 많이 더 많이 놔달라고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