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는 로또 1등 당첨보다 더 기쁜 날이고 엄마에게는 제대로 똥 밟은 날이다 그것도 된똥이 아닌 질-퍽한 설사똥....이라고 엄마가 항상 늘 가스라이팅처럼 나에게 말했다. 그렇다. 2월 18일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다. 김씨네 노부부는 결혼기념일을 챙기지... 아니 딱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나 역시 부모님 생신, 설날, 추석은 챙겨도 결혼기념일은 챙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결혼기념일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다.
아. 어렴풋이 생각난다.
오빠와 내가 초등학생 때 생긴 일이다. 할머니가 부모님 결혼기념일에 우연히 우리 집에 놀러 오셨고, 그래서 파티를 하기로 했다. 폭죽은 내가 담당이었는데 쫄보였던 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무서워 두 눈을 꼭 감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실수로 옆으로 폭죽을 발사해 버렸다. 하필 옆에 오빠가 앉아 있었고, 폭죽이 눈에 닿지도 않았는데 어렸던 오빠는 지레 겁먹고 두 눈을 감싸 쥐고는 "아이고 나 죽네!" 하면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놀란 엄마가 오빠의 두 눈을 확인했고 상당히 멀쩡했지만, 그걸 본 할머니는 나에게 무척이나 화를 내셨다. 참고로 우리 할머니는 남아선호사상이 뿌리깊이 박히다 못해 아로새겨진 옛날 고조선 사람이다.
내가 오빠에게 장난쳤다는 이유로 결혼기념이고 나발이고 필요 없고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사람 무안하게 나에게 '못된 것''사나운 것'라 호통을 치셨고 억울한 나는 속상한 마음에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할머니 품에 안겨서 나를 향해 혀를 빼꼼 내미는 오빠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다시는 이 집 식구와는 케이크에 촛불을 꺼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폭죽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은 불안함에 앞으로 내 인생에 케이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일날 아빠가 사 온 초코 무스 케이크에 눈 깜짝할 사이에 트라우마가 사라졌다.
어쨌든, 결혼기념일은 엄마에게나 나에게는 안 좋은 기억이다. 외국에 나가 살 때도, 직장 때문에 타 지역에 살 때도 그냥 전화 한 통으로 결혼기념일을 알려주고는 평소와 다름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무려 40주년이라는 사실에 뭔가 특별한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과 40년을 한 공간에서 '아직까지' 산다는 것 자체가 축하할 일이다.오래된 다른 부부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제 부부 관계는 사랑의 힘으로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라는 끊을 수 없는 끈으로 묶인 전우애, 동지애로 겨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엄마에게도 아빠와 전우애로 살고 있는지 물으니, 엄마는 부부애도 아니요 전우애도 아니라 했다. 그냥 봉사활동하는 마음으로 산다고 했다. 요즘 사람들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불우 이웃 돕기와 독거노인들 반찬 나누기를 한다는데, 엄마는 굳이 그럴 필요 없이 고개만 돌리면 불우 이웃이 숨 쉬고 있기 때문에 돌을 닦는 부처의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하며 사는 거라 했다. 엄마는 해탈의 경지에 오른 게 틀림없다.
올해는 40주년이니 그냥 넘어가지 말고 조촐한 기념파티라도 하자고 했다. 딱히 크게 축하할 일은 아니지만 내가 그냥 케이크가 먹고 싶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재미있는 하루를 보내자 제안하고 기념일 3일 전에 부모님께 서로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라고 했다. 비싸고 좋은 거 말고 만 원 안쪽에서 재미있는 선물을 교환하는 '쓸데없는 선물 교환식'을 하는 게 어떠냐고 아이디어를 냈다. 사실 두 분 다 처음부터 만 원 이상 돈을 쓸 마음은 전혀 보이지 않긴 했다.
쩝.
드디어 2월 18일이 되었다.
동그란 상에 우리 세 가족은 둘러앉았다. 마침 오빠네랑도 시간이 맞아 그 집 식구들도 영상통화로 다 같이 라이브 케이크 커팅 행사를 볼 수 있었다. 조카도 오빠 무릎에 앉아 조부모님이 케이크에 초 끄는 모습을 시청했다. 그리고 아빠가 우리 온 가족이 한자리에 다 모였으니 덕담 한번 하겠다고 혀로 입술에 기름칠을 했다. 40년 전의 오늘이 없었다면 오빠와 나, 우리 둘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사랑스러운 손녀도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고 부모님의 결혼식이 석가탄생일이라도 된거마냥 뿌듯해하셨다. 사물도 제대로 구분 못하는 이제 고작 119일 된 신생아에게는 괴로운 덕담한마당이었다. 인터넷이 자꾸 끊긴다고 오빠가 영상통화를 급하게 종료하면서 오빠네는 아빠의 끝도 없는 덕담+셀프미담 제조 퍼레이드에서 벗어났다.
아빠의 물레방아 같던 되돌이표 덕담릴레이를 차마 계속 들어주지 못해 내가 얼른 선물교환식을 하자고 아빠 입을 봉쇄해 버렸다. 엄마는 40년 동안 살아줘서 고맙다고 수줍은 듯 나이키 종이가방을 아빠한테 건넸다.
오 나이키. 개이득.
만원으로 금액 제한을 했는데, 그래도 엄마는 아빠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긴 한가보다. 아빠는 뜻밖의 선물에 입꼬기가 승천했고 '뭘. 이런 걸 다.' 감동쓰나미에 저기 하와이까지 떠밀리려 가기 직전, 묵직한 종이가방을 열어보니,
분주아버지, 이거 마시고 정신채리세여.
무게가 꽤 나가는 나이키 가방을 손에 받아 든 순간, 묵직한 직육면체 박스감을 느낀 아빠는 나이키 신발인줄 알고 갬동의 눈물을 한 바가지 흘릴 뻔했는데 부채표 모양을 보는 순간 민들레 홀씨 날리듯 날아가버린 아빠의 눙무ㄹ...
본인이니까 아빠랑 이제껏 살아준 거라고. 가스 활명수 마시고 정신 똑바로 차리며 살자고.
40년 동안 살아줘서 고맙다 했다. 본인한테 본인이.
크. 모든 덕은 본인에게로.
우리 김여사, 아이라이크미, 땡큐미의 표본.
엄마의 선물에 실망한 아빠는, 주뻣주뻣 윗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딱 봐도 반지 상자였다. 결혼하고 나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선물을 사준 적 없어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면서 이걸 보자마다 엄마 생각이 났다고 선물을 주기 전에 엄청난 무드를 깔았다.
"오다 주웠다."
캬. 멘트보소. 경상도 최수종이 이 집에 있었구먼.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남자였어.
상자를 받아 든 엄마는, 가스활명수를 준 자기는 뭐가 되냐고 다음번 결혼기념일에는 제대로 된 선물을 준비하겠다고 울컥한 마음에 상자를 열었더니.
정말 오다 주웠네.
언행일치 제대로시네. 역시 한입 가지고 두말하지 않는 사람이야.
아귀인지 망둥어인지 모를 반지를 보고 없던 정이 더 없어졌다는 엄마의 말에 아빠는 엄마가 선물해 준 가스활명수를 뜯어 깡생수 마시듯 원샷했다. 내가 봤을 때는 도진개진인데. 그나마 가스활명수는 활용도가 많으니 엄마선물이 조금 더 낫긴 하다.
물고기반지를 보고 왜 엄마가 생각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의 40주년 결혼기념일이 이혼식이 될 수 있겠다고 찰나의 순간 나는 생각했다.
승자를 알 수 없는 선물 교환식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끝났다. 쓸데없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나는, 결혼기념일 폭죽 트라우마를 겨우 이겨냈는데 오늘 부모님의 얼굴들을 보고 있자니 그때보다 더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 김씨네 노부부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지만, 이혼 안 하고 이제껏 살아온 게 신기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