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늘 떠오르는 한 가지 기억이 있다. 그날은 내가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때는 졸업을 앞둔 한겨울, 매서운 바람이 코끝을 시리게 하던 시절이었다. 며칠 밤낮없이 과제와 씨름한 터라, 친구와 나는 이미 영혼의 절반은 안드로메다로 떠나보낸 상태였다. 그 시절 우리는 입버릇처럼 "아, 진짜 힘들다"는 말을 숨 쉬듯 내뱉었다. 너무 힘들어서 이젠 힘든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고나 할까? 그야말로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는 초월적인 경험을 하고 있던 극단의 나날들이었다.
새벽 6시가 채 안 된 시간이었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친구와 나는 학교 근처 24시간 국밥집으로 향했다. 유난히 추운 날이라 팔짱을 낀 채, 마치 되돌이표처럼 "힘들다, 피곤하다,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비틀거리며 걷던 순간, 우리 앞에 웬 5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비니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두툼하고 품이 아주 큰 패딩은 그의 몸을 더욱 웅크리게 만들었고, 오른손은 가슴 깊숙이 찔러 넣어 마치 손끝에 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했다. 그는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차가운 새벽 공기와 그의 따뜻한 입김이 만나 자욱한 연기를 만들어내는 가운데, 우리의 대화를 들은 것 같은 그가 마침내 입을 열어 한마디 했다.
".... 사는 게 힘드시죠?"
그렇다면 먼저 하늘로 보내드립죠
내놔 니 목숨
... 라며 패딩 안에 숨긴 흉기를 떠내서 우리를 협박할 것 같았다.
혹시나
흉기말고 다른 걸 불쑥 꺼낼지도..?
이른 아침이라 주변엔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쫄보 두 명이 감당하기엔 앞에 선 아저씨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나와 친구는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최대한 밝고 불쌍한 학생의 모습을 보여서 그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어야 해!' 물론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이미 울고 있었다.
아니요 아니요
저희 진짜 행복해요
힘든 거 없어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죄송합니다.
미인대회 나간 그 어떤 참가자 보다 밝게 웃지만 턱주가리는 경운기처럼 떨고 있는 친구를 보니 상황이 실감이 났다. 우리의 대답을 들은 그 아저씨는 묘한 표정으로
"... 음 그렇다면."
그 순간, 그는 짧은 대답과 함께 꽁꽁 봉인해 두었던 오른손을 패딩 속에서 꺼내더니,
천천히 우리 쪽으로 겨누었다. 그 순간 우리는 바닥에 붙은 껌보다 더 낮은 자세로,
으아아아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막
아ㅏ아아아아아ㅏㄱ 죄송함돠ㅏㅏㅏㅏㅏㅏ
우리의 대답과 동시에 봉인이 풀린 그의 손에는
예수님 믿으세요 교회 나오세요
믿음으로 힘듦을 치유받으세요
자매님
......?
나는야, 새벽 전도를 하는 차가운 도시의 전도사라네.
우리 자매님들 힘들지 마세여
그러지 마세여
....♡
...........?
덕분에 천국과 지옥을 갔다왔수다.
그리고는 '으 춥다'와 수줍은 미소와 함께 다시 오른손이 추운지 패딩 속에 손을 넣고는 다음 전도할 사람을 찾아
총총걸음으로 떠나셨다.
그날 깨달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죽음의 공포보단 낫다는 걸.
전도사님, 덕분에 숨 쉬는 모든 순간에 감사해요!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