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엄마의 지인의 친구의 아는 사람의 아들들들이 아닌 친구의 소개였다. 정확하게 하자면 친구의 직장동료의 친구를 소개받았다. 직장동료가 괜찮은 남자가 있는데 여자친구를 소개받고 싶다고 해서 친구가 나를 덜컥 소개해준 것이다. 퇴사하고 심심하던 차에 오랜만에 연애세포 공장이나 돌려볼까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응했다.
며칠 뒤, 그 남자에게서 먼저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핑크빛 프로필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클릭해서 확실하게 봐버릴까 아님 참았다가 실물을 볼까 잠시 고민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조상님의 지혜처럼 먼저 보고 실망을 하든 환호를 하든 하자 싶어 클릭해 보니 흩날리는 벚꽃 나무들 사이에 45도 얼짱각도로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옆모습이라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 대충 봤을 때 키가 작았다. 그래 일단 하이힐은 패스.
사진사가 대충 찍은 건지 그 사람의 비율이 원래 그런 건지 사진으로는 어림잡아 160cm로 보였다. 상체 70cm, 하체 70cm. 신발굽 20cm. 나도 못생겼기에 상대방의 외모를 입에 올릴 입장은 아니지만 항상 속으로 바라는 유일한 조건은 나보다는 컸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하이힐은 고사하고 요즘 기본 신발에도 깔창이 최소 2cm는 착붙돼서 생산되니 상대방은 최소 170cm은 됐으면 하는 나의 작디작은 바람 하나뿐인데 그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런 젠장. 사진으로 실망해 버렸다. 미디어가 사람을 망친다고. 미리부터 실망해 버려 마음이 짜게 식어버렸다. 원래는 만나기 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설레설레 열매를 먹고 소개팅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맛으로 살아야 하는데 최첨단으로 발전된 우리나라 IT기술이 나의 환상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비록 키는 작지만 다른 건 클 수도 있다는 작은 희망은 있었다. 아 물론 야망이나 꿈같은 거 말입니다. 메시지로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그는 차분했고 선한 느낌이었다. 그래 사람을 키만 보고 판단할 순 없지, 잠시 중단됐던 연애세포 공장이 다시금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만나기 이틀 전날, 새벽에 배고파 비빔라면에 계란까지 야무지게 얹어서 짭짜리 하고 매콤하게 먹은 게 탈이 났다.약속을 취소해야 하나 싶었는데 내가 먼저 취소해 버리면 안 될 것 같아 상대방에서 은근 약속취소를 강요했다. 눈치를 못 챈 건지 아님 연애가 급했던 건지 그는 굳이 아픈 병자인 나를 우쭈쭈 달래며 잠시라도 볼 수 있으면 만나고 싶다는 식으로 대놓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렇게 까지 나오는 상대방의 의지를 눌러버리기엔 친구 체면도 있고 해서 약속을 취소하진 못... 않았다. 휴.
그렇게 소개팅 날이 되었다.
어쭙잖게 대충 어디선가 읽은 연애기술에서 소개팅에 상대방보다 조금 늦게 나타나야 기대감을 증폭시킬 수 있다고 하여 나는 정각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모퉁이에 숨어있었다 (.. 굳이?) 하지만 약속 시간이 됐음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문자를 해볼까 하다가 지각생의 후광효과를 위해 참고 기다렸는데 10분이 지나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약속 장소를 못 찾나 싶어 지하철역 앞으로 걸어갔고 문자를 하니 2분 뒤 그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이 ㅅㄲ 뭐지.. 혹시 나랑 같은 연애기술 책을 읽었나 싶은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그를 처음 본 인상은.. 혹시가 역시 했고 역시가 역시 했다. 그는 사진빨의 도움을 하나도 받지 않은 사진 날것의 그대로 1대 1 비율을 가진 짧고 땅땅하게 다부진 남자였다. 기대를 안 했기에 실망도 안 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어이구, 괜.. 괜찮으세여?
허준 납시오.
아직도 몸이 많이 안 좋냐며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런 ㅆ. 나는 그날따라 화장이 찰떡같이 잘 먹어 집에서셀카 100장 정도 건지고 나온 최적의 풀메이크업 상태였는데. 허허. 가만있자, 내 외모를 돌려깐 건가. 지능범이군.
나의 장염을 걱정하던 그는 인터넷에서 추천받아 장염환자에게 좋다는 음식점으로 나를 안내했다. 사실 밥을 먹을 거라 생각을 하지 못해서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8분가량 걸어가니 지도에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진정한 맛고수들만 안다는 3대 4대 5대째 레시피 대물림 장인가게로 추정되는 아주 오오오오래된 시래기국밥집으로 들어갔다. 터미널 근처라 그런지 혼밥 하는 어르신들이 몇 분 계셨다. 그중 몇 분은 벌써 대낮에 소주 한 병을 까 드시고 계셨다. 혼란하다 혼란해.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며칠 굶은 나의 속을 달래기 위해 뜨끈하고 영양 많은 시래기국밥을 검색검색하여 데리고 왔는데 연애를 책으로 배운 나는 이 구수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시래기의 콤콤한 냄새와 테이블 양쪽 복도를 바쁘게 오가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경쾌한 소리를 내는 점원분들 그리고 '아줌마 여기 국밥 2인분 주소'라 외치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보라색 반짝이 드레스를 입은 나는,
안맞은 옷을 입은것 같아요.
나는 개똥벌레. 친구가 없네.
그는 분명 좋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아픈 나를 위해 이렇게 까지 생각해 주다니. 고맙지만 뭔가 참 애-매 했다. 그의 성의는 고맙지만 나는 시래기국밥을 못 먹는다. 초등학생 입맛이라 국밥류를 좋아하진 않는다. 그의 배려는 빛나고 감사했으나 나의 취향을 고려하지 못했다. 그래도 티 내면 안 될 것 같아 다 나아버린 배를 괜스레 부여잡고는 아직까지 몸이 좋지 않아 많이는 못 먹겠다고 돌려 말했다. 알아보고 계획세운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맨밥만 몇 숟가락 퍼먹었다. 아 이를 어째하면서 그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고 우리가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편식하는 내입에 떠다 넣어줄 기세였다.
천천히 먹을게요 라 말하니 그제야 안심한 듯 아 이를 어째하면서 그는 쭈압쭈압 시래기국밥을 연신 퍼먹었고 깍두기까지 야무지게 얹어 참 잘 말아 드셨다. 기미상궁인 줄 알았네. 국밥도 잘 말아 드시고 소개팅도 잘 말아드시었다. 30대 후반이 되니 낭만이고 나발이고 현실을 이렇게 마주하는구나 싶은 생각에 기분이 다운되었다. 잘 좝수시는 그를 보고 있자니 고놈 참 복스럽게 먹는구나 싶은 외할머니 마음 같은 측은함이 들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음 장소로 커피숍으로 갔다. 지나친 배려를 해주는 그는 커피숍 매장이 널찍하고 뷰맛집이라 좋은 자리도 많은데 굳이 나를 배려한답시고 화장실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달달한 카페모카에 생크림 와빵 많이 올려진 차가운 음료를 먹는 게 내 유일한 낙인데 그는 장염에는 생강차가 좋다며 굳이 굳이 따뜻한 진저레몬티를 주문해줬다.
장소불문한 지나친 배려 감사요.
그러면서 본인은 상큼한 애플망고스무디 호로록.
.....왜그러세요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건데요.
내 배가 걱정되시면 왜 그냥 아예 화장실에 테이블 갖다 놓고 변기 위에 앉아서 이야기하지 그랬어요.
대충 우리는 40분 정도 이야기를 주고 나눴다. 그가 가진 많은 장점들이 그의 작은 키를 보완하여 키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남자는 분명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그의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이야기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고, 그와 나는 서로 각자 일방적인, 본인 위주 이야기만 주구장창 늘어놓았다 마치 랩배틀 하듯이.
그의 끝도 없는 과도한 배려와 친절이 나에게는 크나큰 부담이 되었고 오히려 반감을 샀다. 늦은 나이에 설레는 연애보다 친구같이 편한 연애를 원하는 그와는 달리 난 보기만 해도 가슴 터질 것 같은 불같은 연애가 하고 싶었다. 0도에서 시작하고 싶은 그와 100도에서 시작하고 싶은 나, 서로의 온도가 맞지 않았고 그렇게 우리는 이어지지 않았다. 잘 가요 나의 주치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