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이 질긴 인연의 시작인 줄
2009년 봄, 나는 멀쩡히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밀었다. '못해먹겠어!' 라며 사표를 던진 게 아니라 느글느글한 웃음을 머금으며 '저 여행 가려고요.'라는 말과 함께 스-윽- 하고 사표를 내민 것이다.
사실 나의 회사 생활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당시에 뭐라 칭해야 할지도 모르는, '디자인으로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그 무엇'을 그것도 궁핍한 통장으로 지속해 오던 프리랜서 생활에 비하면 정말이지 회사라는 평탄하고 쉬운 길이었다. 역할이 많던 적던, 그 달에 내가 할 일을 마무리하며 어찌어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김없이 내 통장엔 숫자가 찍혀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점심시간을 기다리면 됐고, 점심을 먹고 오면 퇴근시간까지 버티면 되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월급날이 오면 나는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의무감에 가득 찬 소비들을 했다. 그리고 월급 다음날이 되면 또 한 달 뒤의 그날을 기다렸다. 반복과 반복. 내 삶은 매우 간단하고 쉬운 패턴으로 바뀌었다.
아저씨들만 그득한 회사에 나 포함 단 둘 뿐인 어린 여직원은 뭘 해도 예쁨을 받았다. 일부는 나를 '요즘의 젊은 여자애'들과는 다르다며 '귀여운 남동생' 정도로 취급했고, 그러면서도 '남자들만 그득하니 재미없다'는 회식에는 꼭 오라고 했다. 몇 번 웃어주고 웃겨주면 밥 값을 내줬다. '나 그런 사람 아니야'라며 커피도 못 타게 했고, '내가 해줄게'라며 힘쓰는 일도 못하게 했다. 꽤나 예쁨 받았고, 꽤나 쉽게 돈을 벌다. 하지만 나를 다르게 대하는 그것들이 편할 리가 없었다. 매달 25일을 기다리는 재미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회사에서 하는 일도 나의 업무에서도 나는 가치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이렇게 시간을 기다리며 보내는 의미 없는 삶으로 내 인생이 끝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날이 너무나도 훤하게 보이는 재미없는 그런 삶.
내 갑작스러운 사표를 받은 이사님이 말했다.
"그럼 여행 갔다가 다시 와."
나는 다시 느글느글 웃으며 대답했다.
"언제 돌아올지 몰라요. 기다리지 마세요."
내 입사부터 초지일관 잘난 척만 해댔던 팀장은 마지막 날까지 훈수를 뒀다.
"그래서, 여행을 가는 목적이 뭔데?"
"목적이요? 음... 사람 만나려고요?"
"에이, 그게 무슨 목적이야. 잘 생각해 봐. 여행은 왜 가는지에 대한 이유와 계획을 가지고 가야지."
"아... 네..."
그 뒤로도 팀장은 한참이나 의미 없는 잔소리를 해댔다. 누구는 얼마 동안 어디에 와인 여행을 다녀왔고, 누구는 재즈를 좋아해서 어디 어디를 여행을 했다는 등의 가르침. 어쩌고 저쩌고 블라블라 시부렁시부렁... 그래 너는 계속 떠들어라, 나는 이만 떠난다.
마지막 퇴근길, 홍대 앞 라이브클럽 '빵'으로 향했다. 사장님에게 툭 인사를 건네고 카운터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아 맥주를 꺼냈다. 먼저 와 있던 친구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그만뒀어?"
"어."
친구는 내 퇴사에 대해 더 이상 아무 말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우린 평소처럼 나란히 앉아 공연을 보면서 말도 안 되는 농담 따먹기를 하며 낄낄거렸다. 나는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맥주를 마셨다. 그날의 공연들은 다 좋았다. 유일하게 찝찝했던 건, 그 팀장의 뒤통수에 '빽!' 하고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나온 나 자신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생각 없이, 조금 더 느긋하게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내 손에는 1년간의 회사 생활로 모은 전 재산과 줄이고 줄인 13킬로의 낡은 배낭, 그리고 별 고민 없이 끊어버린 뭄바이행 비행기 티켓이 있었다.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세상 밖으로 나갔던 스물둘의 어느 밤, 인도 델리 공항에서 함께 노숙을 하던 한 여행자가 물었다.
"너 해외여행 처음이야?"
"응."
"근데 왜 인도에 온 거야?"
"응.... 몰라."
"얘 큰일 났네..."
"왜?"
"첫 배낭여행을 인도로 왔으니까 넌 다음 여행도 계속 인도에 오게 될 거야."
당시에는 그게 뭔 시답잖은 소린가 했지만, 신기하게도 몇 년 후의 나는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또다시 배낭을 꾸려 인도로 떠났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래야만 했다. 마음을 비워서일까, 생각이 없어서일까, 시간이 여유로워서일까, 아니면 내가 나이를 몇 살 더 먹어서일까. 두 번째 나의 인도는 첫 번째의 그 경험과는 많이 달랐다. 더 천천히 걸을 수 있었고,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인도 친구들을 진심으로 사귈 수 있게 되었으며, 징글징글하기만 했던 길거리의 삐끼들과 능글거리는 변태들마저 애교로 보였다. 어제보다 오늘의 여행이, 오늘보다 내일의 여행이 더 행복했으며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순간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침내 인도가 더 사랑스러워졌고 결국 인도에서의 여정은 늘어지고 또 늘어졌다.
나는 어느새 인도 북부의 '다람살라'에 있는 해발 평균 1800m의 마을, '맥그로드 간즈'까지 흘러 들어갔다. '맥그로드 간즈'는 목숨을 걸고 히말라야를 넘어와 정착한 티베트 난민들과 그들의 망명 정부가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곳엔 '달라이 라마 14세'의 개인 사원인 '냠걀 사원'이 있는데, 그분을 뵙고 직접 설법을 듣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기도 했다. 물론 '달라이 라마'는 타국에 출타하신 날이 더 많아 그곳에서 직접 만나 뵈는 행운을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남걀 사원'에 가면 티베트 스님들이 서로 마주 서서 마치 싸우는 듯 큰 소리로 박수를 치며 대화하는 하는 '최리(티베트 불교의 교리문답 법)'를 보거나, 망명한 티베트 주민들이 온몸을 바닥에 엎드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절하는 하는 모습, 사원 한 편의 마니차를 돌리며 기도를 하는 모습, 외국인 수행자들이 명상을 하는 모습, 그리고 다양한 티베트 주민들이 사원 곳곳에 앉아 여유로이 쉬고 있는 모습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이 사원은 이곳 사람들에게 일종의 '마을 사랑방'과 같은 곳이었다.
맥그로드 간즈에서 나의 생활은 지극히 단순했다. 나는 언덕바지에 있는, 그러나 건너편 히말라야 산이 훤이 보이는 저렴한 방에 머물면서 숙소 근처 노점에서 식사를 때우거나 떠나는 여행자에게 얻은 여행용 냄비로 감자나 고구마, 계란 등을 삶아 먹기도, 혹은 차를 끓여 마시기도 했다. 내 어릴 적 코흘리개 친구들과 너무도 똑같이 생긴 숙소 앞 학교의 티베트 아이들과도 자주 놀았고, 오다가다 만난 주민들 집에 초대받아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마을에는 주민들과 여러 엔지오 단체에서 하는 행사들이 꽤 자주 있었는데 나는 시간이 되면 그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중에는 평화롭지만 너무도 절실했던 그들의 'FREE TIBET' 촛불집회도 있었다. 나는 티베트 사람들에게 점점 끌렸으며 이 마을에 점점 더 오래 머물고 싶어졌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같이 '냠갈 사원'에 갔다. 그곳에서도 특별히 하는 것은 없었다. 멍하니 앉아 티베트 스님들의 '최리'를 구경하기도 하고, 가져간 책을 읽기도, 음악을 듣기도, 혹은 풍광을 바라보며 그냥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을 오가는 길에서 매일 마주하는 사람들과도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그곳에서의 삶은 하루하루 특별할 것 없는, 그러나 여유롭고 따듯하고 풍요로운 시간들로 가득했다.
'냠갈 사원'에는 늘 같은 자리, 본당에서 떨어진 한 구석의 벤치 위에서 가부좌를 하고 있는 수행자가 있었다. 벽돌색의 티베트 승복을 입고선 털실로 직접 짠 노란색 머리띠로 흑발의 단발머리를 단정히 한, 작고 마른 체형의 50대 여성이었다. 얼핏 봐선 모르겠지만 그는 티베탄이 아닌 외국인이었다. 누가 봐도 동양인 얼굴을 했지만 사실 그의 국적은 미국이었다. '맥그로드 간즈'라는 이 작은 동네가 유독 나에게 더 특별했던 이유는 사실 다름 아닌 그 때문이었다.
명상을 하고 있는 그를 남몰래 봐오던 나는 어느 날부턴가 스을쩍 눈인사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우린 나란히 그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시간이 쌓이고 쌓이자 그는 나에게 절의 구석구석을 소개해주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시켜 주었다. 그러나 어떤 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옆에 멍하니 앉아 있다 오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그와 대화할 때 나는 너무도 평온한 느낌을 받았다. 그 당시 내 영어 수준은 더욱 말이 아니었는데, 그는 그런 나를 배려하여 최대한 쉬운 표현을 써가며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을 해주었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지윽하게 쳐다봐 주는 그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나는 왠지 대화를 하기도 전에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몽땅 다 알아차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국에 살고 있는 그의 남편과 아들 둘은 뒤늦은 나이에 수행자의 길을 걷는 그를 이해해 준다고 했다. 그는 특별한 숙소도 없이 비를 피할 정도의 공간에서 노숙을 했고, 식사 역시 누군가가 보시를 해 줄 경우에만 아주 기본적인 곡기를 채웠다. 수중에 10루피가 생기면 5루피짜리 빵을 사서 생을 지속할 만큼만 매 끼니 나누어 먹었고, 100루피가 생기면 당장 필요한 만큼만의 빵을 사고 나머지 돈으로는 좋은 음식을 사서 부처님 앞에 올리거나 다른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단돈 5루피가 모자라 100루피짜리 버스 티켓을 사지 못했던 것을 기억하며, 자신의 삶에서 필요한 돈은 그 부족했던 단돈 '5루피'일지도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다.
인도로 오기 전 알게 된 한 언니를 '맥그로드 간즈'에서 다시 만났다. 그 언니는 회사를 다니다가 큰 마음을 먹고 1년짜리 세계 여행을 나왔는데, 워낙 소극적인 성격에 자존감마저 떨어진 상태라 여행 내내 늘 긴장상태였다. 어디를 가든 큰 크로스백을 들고 다녔는데 그 안에 웬만한 물건들은 다 넣은 채 무겁게 이고 지고 다녔다. 밥을 먹을 때도 잔디에 누울 때도 언니는 늘 그 가방을 벗어 놓지 못했다. 그리고 누구를 만나든 어느 곳에 가든 맘껏 웃거나 즐기지 못했다. 불편한 여행을 의무적으로 지속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던 나는 조금 내려놓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언니를 냠갈 사원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어김없이 벤치에 앉아있는 그가 반겨줬다. 둘을 서로 소개해 준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고, 둘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까'에 대한 이야기를 더듬더듬 나누었다. 그리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대화의 끝, 처음으로 언니의 얼굴에 편안한 '진짜 미소'가 얼핏 보였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고 언니가 절을 둘러본다며 자리를 떴다. 내가 다시 옆에 앉자 그는 온화한 미소로 말했다.
"넌 너무 행복해 보여."
"그래요? 하하. 근데 전 그게 제일 큰 고민이에요. 이 행복이 없어질까 두려운데요."
그는 인자하게 나를 바라 볼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몸이 아픈 날이 있었다. 아무 기력이 없고,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누워서 아주 깊은 잠을 꾸고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나면 사라지는 그 증세. 여행 중 가끔 찾아오는 증세. 나중에 생각하면 '말라리아나 뎅기열 같은 풍토병이 가볍게 찾아온 건 아니었나' 싶기도 한 그 증세가 '맥그로드 간즈'에서도 또 나타났다. 이틀을 방에서 박혀 있다가 기력을 찾고 나서야 다시 사원을 찾았다. 걱정하던 그는 나에게 요리를 해주고 싶다고 했고 간이 부엌이 있는 숙소에 머무는 다른 여행자에게 부탁을 해서 그를 초대했다. 그는 한 라오스 스님과 함께 음식 재료를 가지고 왔다. 조촐한 부엌에서 그가 만들어 나누어 준 음식은 따듯한 수프였다. 유부처럼 보이는 재료를 넣은 담백한 요리였다. 정말이지 마음까지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하루는 그가 나에게 부탁을 했다. 이곳에서의 수행을 언젠가 글로 남기고 싶은데, 사진을 찍어 줄 수 없냐고 했다. 책을 쓰면 사진 제공자로 내 이름을 꼭 넣어주겠다면서. 흔쾌히 오케이를 한 나를 그는 절 밖의 구석진 계단 밑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초록색 나무 벤치가 하나 있었다. 그는 이 벤치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며 절에 있는 시간 외에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가진 모든 세간살이를 목격했다. 그의 작은 천 가방 안에는 칫솔과 치약, 경전과 염주, 노트와 펜과 앨범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옷 한 벌, 머리띠 한 개, 슬리퍼 하나. 이게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었다. '여행자는 자로고 짐이 적어야 한다.', '가방의 무게는 곧 삶의 무게다.'라며 13킬로의 배낭을 메고 허풍을 떨고 다녔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곳에 머문 지 한 달이 가까워오자 나는 다른 곳으로 가는 버스 티켓을 확 사버렸다. 이곳에 더 머물다간 기약 없이 눌러앉아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맥그로드 간즈를 떠나기 하루 전날 나는 평소처럼 '남걀 사원'을 찾았다. 역시나 변함없는 미소로 맞이해 주는 그에게 나는 내가 여행하며 들고 다녔던 책을 한 권 펴보였다.
"제가 좋아하는 책이에요. 여기에 좋은 글귀를 하나 써주세요."
잠시 고민하던 그는 한 자 한 자 정성껏 글씨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는 나에게 책을 돌려주며 '스펠링 맞지?' 하는 농을 던졌다.
Forgiven is most important key to be happiness.
나는 정말 행복한 것일까. 그녀는 누구에게 용서받기 위해 이 힘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써준 글을 몇 번씩 곱씹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책을 다시 가져갔다. 그에게 다시 받아 든 책의 글귀 위에는 예쁜 꽃 그림이 새로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평소같이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나는 차마 내일 떠난다는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그때, 마치 내 고민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곳에 언제까지 있을 거지?"
"아... 사실은..."
내가 내일 떠난다고 얼굴을 붉히며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그의 온화한 표정은 변함없었다. 마치 '나는 다 알고 있었다'는, '다 이해한다'는 그 표정. 그리곤 딱 하나의 질문을 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지?"
"암리차르요."
"그래. 건강하고. 아프지 말고."
이 덤덤한 이별의 대사와는 달리 목구멍에서 뭔가 뜨겁게 올라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게 된 나는 그에게 서둘러 인사를 하고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사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잠시 멈춰 고개를 들었다. 순간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아니, 수도꼭지처럼 펑펑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늘 그랬듯 그는 같은 자리에서 우두커니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단을 뛰어 내려와 매일을 걷던 그 길을 미친 듯이 걸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그 길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인사를 건넸지만 나는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마치 오래전 남자 친구와 헤어진 뒤 펑펑 울며 길거리를 걸었던 그때가 기억났다. 그 눈물은 8개월 간의 여행 중에 흘렸던 가장 뜨거운 눈물이었다.
그가 내 책에 써준 그의 글귀
다음날 아침, 버스 정류장이 있는 마을의 유일한 중심가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암리차르 방향으로 가는 작은 버스에도 승객이 몇 명 없었다. 버스 창가석에 앉아 출발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열려있는 창문으로 봉투 하나가 쑤욱하고 들어왔다. 깜짝 놀라 밖을 내다보니 그가 까치발을 들고 웃으며 봉투를 들이밀고 있었다.
"가면서 먹어."
누런 종이봉투 안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티베트 빵 두 개와 과자와 음료가 들어 있었다. 나와 어긋날까 봐 아침 일찍부터 우리 숙소 앞 길에서 기다렸는데 결국 만나지 못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바로 온 것이다. 그가 가진 것이 얼마 큼인지 알기에, 그리고 새벽부터 서둘러 준비한 정성을 알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버스가 출발했다. 코끝이 찡해진 채로 나는 빵을 뜯어먹었다.
통장의 잔고를 모두 털어내고 나서야 나는 이 긴 여행을 마쳤다. 나는 이 여행 안에서 가난하지만 행복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에게서 삶에 대한 여유로움과 낯선 이를 진심으로 환대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들을 보며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국제개발협력 활동가가 되기로 했고, 그 첫발을 내디딘 곳이 바로 '베트남'이었다. 그러나 베트남에 오기 전 내가 가진 베트남에 대한 유일한 기억은 코흘리개 시절 외삼촌이 까만 피부의 나를 놀리며 부르던'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라는 가사의 노래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베트남에 대해 너무도 무지한 채로 들어와서는 한 농촌 마을에서 2년을 살았다.
그와의 인연이 다시 생각난 것은 그때였다. 베트남에서 2년을 지내고 난 뒤 한 달간의 마지막 베트남 여행을 하며 미운 정 고운 정을 정리하고 떠나려던 그때. 베트남이 지긋지긋해서,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내 짝사랑이 먹히지 않음을 인정하고 '다시는 안 올 거야'라면서 등을 돌리던 그때에서야 나는 문득 ‘맥그로드 간즈’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가 문득 다시 떠올랐다.
"그럼 당신은 미국에서 태어났어요?"
"아니, 나는 베트남에서 태어났어."
"와! 베트남이요? 저 너무 가보고 싶은 나라 중에 하나예요."
그러자 그는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돼! 가지 마! 그곳은 너무 위험한 곳이야!!"
"네??..."
"가지 마. 위험해..."
왜 그 대화가 이제야 생각났는지는 모르겠다. 난 왜 그녀가 미국인이라고 생각하며 베트남 사람이라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는지, 왜 그간 나는 베트남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으며 베트남과 전혀 인연이 없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대화를 유추컨대 그녀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으로 가서 새 삶을 꾸린 베트남 남부 출신의 '보트피플'이었던 것 같다. 전쟁이 바꾸어 놓은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이 그제야 내 머릿속에 그려졌다. 문득 그녀와 있던 '맥그로드 간즈'에서의 공기가 그리워졌고, 애증의 베트남과 나를 연결하는 무언가가 분명 있었음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알지 못하는 뜨거움이 밀려왔다. 내가 2년간 베트남과 왜 이렇게 끙끙대며 씨름하고 있었던 것인지 그 답답한 무언가의 실마리를 찾아낸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의 기억을 떠올린 건 베트남의 이 질긴 인연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