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011년, 빙밍(Bình Minh) 마을에서
기약 없는 여행 동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느릿느릿한 삶을 사느라 나의 여정은 더디고 또 더뎌졌다. 여행 지도 위에 하나씩 늘어가던 점들은 더 늘어날 기미를 잃은 채 꽤 오랫동안이나 멈춰져 있었다. 마지막 점 위에서 나는 스쿠버 다이빙에 빠졌고 예상보다 돈을 빨리 탕진해 버렸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돈이 다 떨어져서 귀국했다'라는 말은 사실 핑계에 불과했다. 여행하면서 만난 외국 친구들의 '돈을 벌며 여행하는 방법'에는 무척이나 솔깃한 것들이 많았다. 한 달 동안 북유럽 어느 부자들의 개인 요트를 청소하고 관리해 준 뒤, 무려 일 년을 여행할 경비를 벌어왔다는 친구를 만났고, 인도 여행을 하며 고른 원석들을 유럽의 동업자에게 보내주며 충분한 돈을 벌고 있다는 친구도 있었다. 나를 코스타리카에 있는 자기 회사에 디자이너로 채용해 주겠다는 어느 배우 같은 외모의 아저씨도 있었고, 찬란하게 빛나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한눈에 보이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며 운영을 도와달라는 친구도 있었다. 스쿠버 다이빙 강사가 되어 같이 일해보자는 제의도 있었고, 심지어 자기와 결혼해서 함께 살자는 흔치 않은 제안까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거절했다. 이제야 내 삶을 비워내는 방법을 조금은 알 것만 같았는데, 채 비워내기도 전에 '생각보다 쉽게 다시 채워 넣는 방법'을 알았다는 것이 그리 좋지많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돈이든 다른 무엇이든.
1년은 훌쩍 넘을 것만 같던 여행은 그리 길지 않게, 그리고 '홀연히' 끝나버렸다. 신기하게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나 두려움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지금'을 사는 법을 익히기엔 이 여행이 나에게 충분했고, 길 위에서 매 순간 쌓이고 쌓인 에너지들은 내가 여행을 마치고 일상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충분한 양분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못 가본 여행지에 대해 미련은 있었지만 '지금의 그곳' 보다 '다음번의 그곳'에 대한 설렘을 즐기기로 했다. 내가 '언젠간 꼭 가야만 하는 곳'이라고 노래해 왔던 중남미 여행은 서른 뒤로 미뤘다. 이십 대에 꿈꿔온 그곳은 푸릇푸릇한 청춘보다는 뭔가 조금 더 완숙함을 가지고 가야만 더 잘 여행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고 서른이 넘으면 그 완숙함이 자연스레 생기거라 믿었다. 그러나 서른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 어찌어찌 생길 줄로만 알았던 '완숙한 삼십 대의 나' 따위는 존재하지 않은 채 여전히 깨지고, 여전히 허덕이고, 여전히 미약한 내가 서 있다. 내가 마흔이 되면 그곳에 갈만한 완숙함이 생길 수 있을까. 마흔이 넘어간 그곳에서는 지나가다 눈 마주치는 세 발자국 거리의 사람에게 자연스레 탱고 스텝으로 다가가 함께 춤을 추며 유창한 스페인어로 인사할 수 있을까.
여행에서 돌아온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질문들을 했다. '여행이 어땠냐', '뭐가 제일 좋았냐', '위험하지는 않았냐', '얼마 동안 얼마를 썼냐' 등등. 그러나 그 다양한 이야기의 마지막엔 모두 같은 물음이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뭐 할 건데?"
그리고 그 뻔한 질문에 나는 매번 같은 대답을 해야만 했다.
"이제 생각해 봐야지."
"이제? 여행하는 동안 생각 안 해봤어?"
"응. 여행하면서는 앞으로 뭐 할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거든."
"그럼 뭐 했는데?"
"하루하루 살기 바빴지."
"음..."
귀국 후 짧은 시간의 고민 끝에 내가 찾은 곳은 한 국제개발협력 단체의 면접장이었다. 베트남, 몽골, 동티모르, 케냐, 르완다 등에 있는 단체의 해외 사업장으로 파견되어 1~2년 정도 일할 활동가를 뽑는 면접이었다. 나는 여행에서 경험하고 배운 것들을 모두 덤덤하게 말했다. 살림은 궁핍했지만 마음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에게서 배운 것들, 그리고 '국제개발협력'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그 무엇은 잘 모르겠지만 다시 가서 그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합격되었다. 운이 좋았다.
파견 희망 국가를 적는 1 지망과 2 지망의 빈칸에 나는 모두 '베트남'을 적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추위라면 질색인 나에게 '몽골'은 절대 살러 갈 수 없는 나라였다. 몽골에서 활동하고 온 한 선배가 '한겨울엔 화장실에서 바지를 내리는 것이 싫을 정도로 추워서 밥을 적게 먹었다'라고 한 이야기는 가히 충격이었다. 나는 잘 먹고 잘 쌀 수 있는 더운 나라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이 분야의 많은 종사자들이 그곳이 이 길의 결승점인 것 마냥 '아프리카'만 외쳐대는 그 분위기가 싫었다. 반골인 나는 다시 또 '케냐'와 '르완다'에 등을 돌렸다. 21세기 최초의 독립국 '동티모르'는 당시 나에게 너무 생소한 나라였다. 그러나 교육을 받으면서 희망 국가를 바꾸고 싶을 정도로 끌렸지만 당시 치안이 불안정하여 남자를 선호한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그래서 결국 나의 유일한 선택지는 '베트남'이 되었다. 내가 만약 그때 베트남이 아닌 다른 나라에 가게 되었다면 지금 나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몇 달간의 사전 교육을 받으며 파견을 준비하고 있던 어느 날, 교육을 받고 집으로 향하던 어느 지하철에서 함께 있던 선배가 물었다.
"유리 씨는 왜 가려는 거예요?"
면접 때도 받은 기억이 없는, 그 뻔하고도 생소한 질문을 듣고선 나는 순간 멍해졌다. 덜컹덜컹 덜컹덜컹, 반복적인 지하철의 소음만이 내 귀에 들어왔다. 꽤 오랜 시간인 듯 순간을 보내고 나서야 나는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이렇게 말했다.
"그냥 거기에 가서 '내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요."
고백하건대 나는 베트남에 오기 전까지 이 나라에 대해 너무도 무지했다. 내가 베트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곤 아주 편협하고 일반적인 것들 뿐이었다. '한국군도 참전했던 큰 전쟁이 벌어졌던 나라', '사회주의 공화국', '쌀국수로 식사를 하는 나라', ''신짜오(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나라' 정도. 그리고 삼 개월간 내가 머물러 본 '태국'과 '베트남'이 가까우니 '두 나라가 고만 고만 비슷하겠지'라는 얼토당토않은 판단까지 내린 상태였다.
하루는 베트남 북부지역의 겨울이 춥다는 이야기를 듣고 양면 점퍼를 하나 사러 옷 매장을 들렀다. 그러나 나는 매대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때까지 내가 상상했던 베트남은 회색과 국방색뿐인 탁한 세상이었고, 그곳에 갈 예정인 나는 베트남전 참전국인 한국에서 온 외지인이라는 사실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화려한 색의 옷을 입으면 왠지 주민들 사이에서 너무도 눈에 띌 것만 같았고 왠지 그래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나는 고심 끝에 내 상상 속의 베트남과 어울리는 어두운 회색의 점퍼를 골랐다. 그러나 베트남 땅을 밟은 지 며칠 만에 나의 상상은 완전히 무너졌다. 형형색색의 매우 화려한 의상을 입은 동네 아줌마들을 하나둘씩 만나면서 결국 내가 고른 칙칙한 색의 그 점퍼가 오히려 이곳에서 제일 눈에 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베트남의 길거리 패션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저렇게도 화려할 수 있구나', '과함(Too much)의 끝은 어디인가'를 배워나갔다.
내가 살던 마을은 '빙밍(Bình Minh) 마을'이었다. '해가 뜨는 새벽'이라는 뜻의 빙밍 마을에는 사실 동틀 녘보다 황금들판에 둘러싸인 해 질 녘의 '황혼(Hoàng hȏn)'이 일품이었다. ‘세계 2위의 쌀 생산국’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식어를 대변하듯 일 년에 이모작은 기본이었고 그 사이사이에도 농민들은 쉬지 않고 열심히 무언가를 계속 심어댔다. 대지는 쉴 틈이 없었지만 비옥하고 물이 풍부한 이 땅에선 뭐든지 무럭무럭 잘 자라났다. 그러나 농부들에게 소득이 나는 기간은 한 해 중 약 두어 달뿐이다. 그래서 나머지 열 달은 다른 일을 했다. 농부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투잡, 쓰리잡이 기본이었다. 특산품이 있는 마을은 특산물을 가공해 팔았고, 작은 가게를 열거나 집에 물건을 쌓아놓고 이것저것 판매를 하기도 했다. 미장이나 시멘트를 섞고 나르는 등의 건설현장에서도 일했고, 하노이 시내에서 온갖 일용직 노동을 하며 하루를 버티는 삶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간혹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한국, 일본 등의 타국에 이주노동을 다녀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곳에서의 삶이 어떤지 물을 때면, '그곳의 삶이 질이 좋던 나쁘던 방법만 있다면 다시 가서 돈을 벌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동네 주민들에게 이주노동은 인생 역전의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큰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십여 년 전 이곳은 사제 폭죽을 만드는 동네로 유명했다. 그러나 집에서 규제 없이 만드는 폭죽 때문에 사고가 빈번히 일어났고 결국 나라에서 사제 폭죽 만드는 것을 금지시켰다. 많은 가정에서 큰 수입을 잃었고 농사로는 벌이가 턱없이 부족해졌다. 하루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꽝'하는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지진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읍내에 있는 어떤 집에서 사고가 났다고 했다. 다음날 그 집의 아빠와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돈을 벌기 위해 일부 사람들은 아직까지 집에서 몰래 사제폭죽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웃인 '땀흥(Tam Hưng) 마을'의 특산품은 '들쥐고기'였다. 벼 수확의 시기가 돌아오면 논밭엔 어김없이 옹기종기 모여 들쥐 몰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몇 주간 마을 시장의 좌판에는 하얗다 못해 뽀얀 들쥐가 수북이 누워 있었다. 사람들은 저울로 달아 파는 들쥐고기를 한 움큼씩 사갔고 마을 길에선 한 손에 들쥐고기가 담긴 봉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자전거나 오토바이 핸들을 잡은 채 오가는 이들을 자주 마주쳤다. 6살 때 인생에서 크게 손꼽힐 만한 한 사건으로 쥐를 끔찍이도 혐오하게 된 나로서는 그 근처를 지날 때마다 게슴츠레 눈을 떠서 내 시야를 흐릿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 사는 이상 안보는 게, 혹은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이 내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우리 센터의 남자 직원들이 파티를 한다면서 부엌으로 나를 데려갔다. 실실 웃으며 나를 데려가는 한 친구가 뭔가 미심쩍게 느껴졌지만 결국 나는 커다란 솥에 각자의 요리로 탈바꿈되고 있는 쥐고기들을 목격했다. 그리고 나는 내 손을 잡아 끈 그 친구의 등짝을 사정없이 때리며 그곳을 뛰쳐나왔다. 들쥐를 잡아대고 들쥐 고기로 요리를 해 먹는 일명 '들쥐 주간', 그 풍경들은 그곳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그 풍경은 나에겐 절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곳에 머무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여행하는 것과 머물러 사는 것의 차이를 느끼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좋아했던 우리 마을의 해 질 녘 황혼이 매일같이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는 현실도 하나둘씩 알게 되었다. 또한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저녁이 되면 해는 또 지고, 다음 날이 되면 어김없이 해는 다시 또 나타난다는 사실을 일깨운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