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2022년을 마무리하며
올해 나는 180만 원을 벌었다. 1년간 내 한국 통장에는 총 392만 원 정도가 입금되었고, 베트남 통장에는 총 약 80만 원(15,264,800 vnd) 정도가 입금되었다. 그 둘을 얼추 합친 총 480만 원 중 300만 원은 한국의 산부인과에서 ‘자궁경부암 0기’의 경계상에 있다는 진단을 받아 암환자 등록이 되어 보험사에서 받은 ‘암 진단비’였고, 40만 원은 여름에 한국에 다녀오면서 등록된 아이의 육아수당을 받은 것이었다. 그조차도 재외국민은 출국 후 3개월이 지나면 육아수당 지급이 정지되기 때문에 올해 한국에 한 달 정도 머물다 온 나는 10만 원씩 총 4개월간의 육아수당을 받았다. 10만 원은 아이를 키우는 정신적, 육체적 노동과 그 가치에 비하면 너무도 야박한 돈이었지만, 막상 그 수당마저 끊기니 아쉬웠다. 나라에서 돈을 주며 나의 노동을 인정해주든 아니든 ‘무조건적인 육아를 해야 하는 엄마’의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마침 ‘덴마크의 복지’에 관련된 책 <덴마크 사람처럼>을 보면서 부러움이 커지다 못해 배알이 꼬였지만 나는 결국 ‘내 1년 치 육아 노동에 대한 급여는 고작 40만 원’이라는 사실을 꾸역꾸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숫자에 내가 1년 동안 이곳저곳에 글을 쓰고, 자문과 강의를 하고, 남은 책을 팔고, 워크숍을 기획하고 진행하여 번 돈까지 합치니 ‘올해 내 연봉은 180만 원’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든 일에서 돈이 우선순위가 되는 것은 없었지만 바쁜 한 해를 보낸 것 치고는 유독 수입이 적은 한 해였다.
상반기가 끝나갈 무렵 코로나가 풀리면서 정시 출퇴근의 일을 할 수 있는 여러 제안들이 다시 찾아왔다. 늘 하고 싶은 데로 살라면서 있는 그대로를 응원해주는 남편이지만, 아내의 일자리 제안 소식에 정리하고 있던 가계부 엑셀 파일 한 칸에 나의 예상 근로소득을 슬며시 추가했다. 가정의 총 기대 수익이 늘어난 엑셀 파일을 보며 본인의 빨라진 정년을 상상하는 남편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이번에도 그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시 해나갈 자신이 점점 더 없어진 데다가, 지금의 내 삶을 꾸리는데 여전히 돈 버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몇 년간 가까운 지인들이 하나둘씩 아프게 되는 모습을 보면서, 또 나 자신도 암의 문턱 앞에 와 있는 걸 알게 되면서 나는 하려던 모든 것을 멈췄다. 아이가 먼저 보였고, 주말마다 최선을 다해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아이만을 위한 절대적 희생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 속에서 나도 남편도 각자의 행복을 누리려고 노력했다. 아이에게 행복을 기대하는 엄마가 아니라 스스로 행복한 에너지를 만들어 아이에게 전하는 엄마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를 보냈다. 육아로 쉬던 풍물 동아리에도 근 7년 만에 다시 찾아갔다. 평소 치던 장구를 계속 칠까, 아니면 새롭게 꽹과리를 배워볼까 기대했지만 인원이 모자라 큰 소리가 더 필요하다는 이유로, 그리고 나이가 제일 어리다는 이유로 힘이 필요한 북채를 잡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나는 손바닥에 피 물집이 잡히도록 신명 나게 북을 두드렸다. 풍물을 꽤나 재미있어하는 아이를 대동하고 하노이 이곳저곳으로 공연도 다녔다. 내가 다시 떠올리게 되는 어린 시절 풍물의 흥이 아이에게도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혼자 글 쓸 때의 게으름을 벗어나고자 하는 장치로 어딘 글방에도 들어갔다. 30대 후반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과 함께 모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 돈을 내고 많은 시간을 들여 압박감을 이겨내며 글을 써내야 하는 일, 게다가 여러 사람들과 글에 대한 다양한 피드백을 주고받는 일까지…… 과정들은 쉽지 않지만 켜켜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기분이 들었다. 주로 온라인으로 합평을 했기 때문에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그 누구보다 서로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는 글동무들도 생겼다. 글동무들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내 글을 열심히 읽어주었고 하노이에서의 내 삶을 낯설게 봐주었다. 그건 내 글에 대한 피드백 이상으로 내가 이곳에서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으로 느껴질 만큼 큰 위로가 되었다.
그간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한발 걸치고만 있던 채식에 대해 본격적인 실천을 하게 되었다. 역시 몸이 아파 보니 실행력이 강해졌다. 요리를 너무 귀찮아하는 나를 위해 지속 가능한 쉬운 건강한 채식 요리법을 찾기 시작했다. 점점 육식을 멀리하게 되었고, 밀가루와 가공식품도 끊었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보지 못하고 저장만 해 두었던 육식과 채식에 관련한 다큐멘터리들을 하나하나 다 봤다. 어느새 우리 집 식탁에는 샐러드와 채소 반찬이 수북해졌고, 편식 없는 아이는 덩달아 다양한 채소들을 많이 먹게 되었다. ‘채식이 아니면 안 돼!’가 아니라 ‘채식해도 괜찮아!’라는 열린 마음으로 건강한 음식들을 찾아나갔다. 아니, 내 식습관에서 건강하지 않은 음식들을 하나씩 빼내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마침내 붉은 고기를 안 먹고도 살 수 있게 된 나는 소고기로 만드는 쌀국수 ‘퍼 보’나 돼지고기로 만드는 ‘분 짜’ 말고도 하노이에서 먹을 수 있는 베트남 음식이 많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필요에 의해 하노이의 채식식당을 찾아서 저장하다 보니 어느새 내 ‘구글 맵’ 안에는 물방울 모양의 청록색 점들이 빼곡해졌다. 아이가 자라 부모 곁을 떠나게 될 때 따로 물려줄 건 없으니 내 ‘구글 맵’을 공유해 주면 되겠다는 우스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건강한 식습관을 지키기 위해 걷기, 요가 등의 운동도 꾸준히 하게 되었다. 요즘은 내 유튜브에 테니스 영상들이 수두룩하게 뜰 정도로 테니스에 푹 빠져있다. 평소의 나는 하노이 여름 날씨에도 땀을 잘 흘리지 않고 하루 종일 마시는 물의 양이 1리터도 되지 않는 체질이지만 숨이 헐떡일 정도로 테니스를 치고 나면 한 겨울에도 주룩주룩 비 오듯 땀을 흘리고 물을 벌컥벌컥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올해 받고 싶은 생일 선물로 테니스 채를 골랐고, 평일 패션은 늘 운동복 차림일 정도로 테니스에 집중하고 있다. 오래된 테니스 경기 애청자인 남편은 걸어가다가도 느닷없이 자세를 잡고 오른팔을 휘두르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마냥 뿌듯해했다. 나는 그 언젠가 온 가족이 테니스 코트에서 땀 흘리며 뛰는 꿈을 꾸게 되었다.
역시 돈이 안 되는 활동을 많이 했다. 여기저기 베트남 친구들이 하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들을 대가 없이 도왔고, 도움이 필요한 곳과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을 열심히 연결해 주었다. 한국에서 찾아온 단체나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해 밥 한 끼에 자문하고 도움을 주다 보면 결국 내가 소모품이 되어 버리는 기분이 들어 속상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내가 이곳에서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에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언제쯤 나는 그런 위로로부터 자유로워질까? 언제쯤 나는 외부의 시선과 상관없이 스스로를 더 깊게 인정할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올 한 해 내가 가장 잘한 일은 고작 180만 원을 번 것이다. 모두 돈을 벌고자 하는 일은 아니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니 어쩌다 들어온 적은 수입들이었다. 180만 원을 벌었다고 해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 외에 나머지 시간은 나와 내 주변을 돌보는 데에 온전히 힘을 썼다. 돈을 받지 않거나 적게 받았을 뿐 사회에 필요한 일들을 기꺼이 해왔다. 플러스와 마이너스로만 구분할 수 없는, 숫자로 매겨질 수 없는 엑셀 밖의 중요한 가치들이다. 이제 그 가치를 지켜내는 것에 제법 익숙해졌으니 내년에는 남편의 얼굴에 옅은 미소를 뗘주는 날도 함께 왔으면 좋겠다. 허허허. 얼마나 좋아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