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베트남이 좋아서, 아니 흥미로워서 내 발로 들어와 이렇게 13년째 살고 있지만 몇 년에 한 번씩은 주기적으로 당장 떠나고 싶을 만큼 이곳이 싫어지는 시기가 온다. 타국 살이란, 어제까지만 해도 허허허 웃어넘길 수 있었던 문화적, 관념적 차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분통이 치밀어 오를 정도로 이해가 되지 않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곳은 하노이 우리 집 근처의 단골 커피숍이다. 막 들어온 한 남자가 사장님과 시끄럽게 인사를 주고받더니 내 반대쪽 테이블에 앉아 갑자기 양말을 벗는다. 그리곤 가방 어디에선가 손톱깎이를 꺼내 의자에 다리를 올리곤 발톱을 깎기 시작한다. 발톱은 속수무책 바닥으로 떨어지지만 근거리에 앉아있는 카페 사장님과 몇 명의 손님들은 아무도 이 장면을 신경 쓰지 않고 만담을 지속한다. ‘손발톱을 아무 데서나 깎으면 쥐가 그 손톱을 물어가서 어쩌고 저쩌고…’하는 그 무서운 전래동화로 조기교육을 받은 ‘한국인’인 나에겐 너무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나, 지난 12년간 ‘하노이안’의 정체성으로 살면서 익혀온 베트남 문화와 사고로는 ‘그럴 수도 있지’ 싶다. 그러나 한두 번 본 장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딱! 딱! 딱!’ 발톱이 잘리는 소리가 심히 거슬리는 걸 보니, 나의 한국살이 시간이 베트남살이 보다 두 배 더 긴 것을 무시하기는 어렵나 보다. 아니면 손발톱이 튈 때마다 늘 엄마에게 혼났던 어린 시절과 그때 읽었던 그 전래동화가 여전히 나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건지도.
아들 '만두'는 ‘메이드 인 비엣남(made in Vietnam)’ 아이다. 엄마 뱃속에서는 베트남 로컬 검진소를 다녔고,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도 하노이 한 국제병원의 베트남 의사 선생님이다. 일 년에 한두 번 한국을 간 것을 제외하고는 쭉 베트남에서 살았다. 만두는 작년 하반기에 베트남 사립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자신을 ‘베트남 사람’, 아니 정확히는 ‘하노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전까지는 국적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기도 했거니와, 베트남 친구들이 가득한 유치원을 다녔고, 하노이에서 한국사람이 드문 동네에 살고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몇 살이니?”
“여섯 살이요.”
“베트남에는 얼마나 살았니?”
“육 년이요.”
같은 동양인이긴 하지만 분명 생김새가 다른 이방인인 우리를 바라보며 이런 질문을 하는 베트남 사람들을 만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고작 인생의 1/3을 베트남에서 보낸 나보다 이 땅에서 태어나 온 일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만두에게 ‘베트남’이라는 아이덴티티는 더 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초등학교라는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면서 반에서 유일한 한국인 학생인 만두는 '국적'에 대해 조금씩 더 깊게 인지하고 구별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만두도 ‘정체성’, ‘다름’, 혹은 ‘소수자’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상충해서, 혹은 뒤엉켜버려서 울렁거리거나 폭발해 버리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 혼돈의 순간이 눈앞에 나타날 때 이 문화적 충돌에 대해 나는 부모로서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아니, 그보다 먼저 만두가 공공장소에서 누군가 손발톱 자르는 걸 보고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하노이에 새로 생긴 지상철을 처음 타보는 하노이 촌놈
베트남은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국적은 물론 시민권 같은 것도 얻을 수 없다. 그 말인 즉 슨 어떤 외국인이든 ‘베트남 사람 다 되었네.’라는 말 이상의 제도적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고 계속해서 허락(비자)을 받아야 머물 수 있는 신분이고, 베트남 국적이 없는 만두는 학교에서 베트남 정부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유일한 학생이다. 작년 말에 있었던 'Toyota배 사생대회'에서 만두의 그림이 학교 대표로 뽑힐 뻔했지만 외국 아이를 베트남 학교 대표로 뽑아 베트남 대표로 밀어주기는 역시나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것도 일본 기업 주최인 대회에서 한국 아이를. 힘든 건 없지만 쉬운 것도 없다.
이렇게까지 굳이 아이를 베트남 학교에 보내면서까지 자발적인 소수가 되는 이유가 뭐냐고들 묻는다. 우리는 학교 교육을 통해 아이에게 여러 언어를 더 학습시키려는 게 아니라, 아이가 다양함 속에서 차이를 배우고 소수자의 마음으로 다른 소수자를 더 잘 이해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부모가 처음부터 아이가 베트남어 전교 꼴등임을 인지하고 한 계단씩 올라가는 모습을 격려하고 있으니, 만두도 베트남어 학습에 대해 부담보다는 성취감을 더 느끼게 되었다. 그 덕분인지 만두는 베트남 친구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베트남어를 잘 못하는 나’가 아니라 ‘한국어를 특별히 더 잘하는 나’로 인지했다.
만두가 이렇게 큰 거부감 없이 베트남 학교에 적응하는 것은 아이의 속도에 맞춰서 기다려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선생님들 덕도 있겠고, 아직 다름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나이의 친구들 덕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같은 반 부모들 역시 유일한 이방인인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고 도와주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다. 과거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중부 지방의 일부 마을들을 제외하고는 사실 한국인은 베트남에서 가장 환대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부모나 아이가 중국처럼 베트남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다른 국적을 가졌다면, 베트남보다 더 가난한 나라에서 온 아이라면, 아이의 피부색이 베트남 친구들에 비해 눈에 띄게 달랐다면 분명 만두의 학교 적응 과정은 달랐을 것이다. 이곳에서 한국 국적으로 살아가는 게 너무도 다행인 동시에, 반대 상황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마음만 먹으면 다음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다른 나라에 있는 사람들이 화면을 마주하고 대화하며 일하는 게 익숙해지고, 가족 구성원의 국적이 점점 더 다양해지며,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여러 나라를 돌며 살아가는 노마드족이 늘어가는 마당에 도대체 ‘국적’이라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마도 만두가 살아갈 시대에는 ‘국적’을 제외하고도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지지 않을까? 지금 당장의 우리 가족에게 ‘Made by Korean(부모의 국적이 한국인)’이라거나 ‘Made in Vietnam(출생지가 베트남)’이라는 이미 이뤄진 사실보다는 ’Staying in Vietnam(베트남 거주 중)’이라는 현실이 더 중요하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