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태어나 베트남의 북쪽 하노이에 온 여자와 부산에서 태어나 베트남의 남쪽 호찌민으로 온 남자가 있었다. 여자는 하노이 외곽에서 2년간의 NGO 활동을 마무리하고 곧 베트남을 떠나려던 참이었고, 남자는 2년간 지내던 호찌민에서 하노이로 직장을 옮겨 자리를 잡아갈 무렵이었다.
베트남의 가장 큰 명절인 ‘뗏’ 연휴 기간, 남자와 여자는 각각 자신의 상사에게 행적을 숨긴 채 태국의 따오 섬으로 떠났다. 여자는 오래전 3개월간 머물며 스쿠버다이빙 마스터 자격을 땄던 다이빙샵에서 무료로 펀다이빙을 할 셈이었고, ‘평소에 위험한 짓은 절대 마다하는 안전제일주의 원칙’을 가졌던 남자는 무엇에 홀린 건지 이번 연휴에 스쿠버 다이빙을 배워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방콕에서 출발한 야간 버스에 이어 새벽 배를 갈아타고 섬으로 들어온 여자는 태국 친구들과 어울리며 조용히 지내다 올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알고 있던 한국인 강사를 피해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러나 좁은 섬 안에서 금세 눈에 뜨인 여자는 결국 한국팀에서 붐비는 한국인 교육생들을 챙기는 일을 도와야만 했다. 여자는 이제 막 첫 교육을 앞두고 바닷가 식당에 들어온 10명쯤 되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인사를 하고 익숙한 듯 음식 주문을 도왔다. 어색함을 못 참는 여자가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방학을 맞아 한국의 각지에서 태국 여행을 온 대학생들, 본격적인 고시 공부를 하기 전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러 온 졸업생, 휴학을 하고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가는 중에 들른 청년, 휴가에 맞춰 여행을 온 직장인 등 다양한 사람들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그리고 모두의 소개가 끝날 즈음, 구석에 있던 남자가 약간의 부산 사투리를 섞어가며 말했다.
“하노이에서 왔어요. 베트남 하노이.”
난 다이빙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다이빙 보트 난간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바라보는 풍경을 좋아하기도 했다
하노이에서 온 여자는 하노이에서 온 남자가 반가웠다. 그의 겉모습은 그간 만나왔던 파트너들과는 너무 달랐고 이상형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다. 배가 불룩하고 수염과 머리가 덥수룩하고 또래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의 외관 때문인지 여자는 특별한 감정이 생겨나지 않았다. 자신의 나이를 믿지 않는 여자에게 남자는 대뜸 여권을 보여주었다. 놀랍게도 여권 속 남자의 생년월일은 여자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방콕의 ‘카오산 로드’에서 쉽게 만들어지는 위조 여권을 봐 왔던 여자는 여권 속 숫자를 섣불리 믿지 않았다. 남자는 주변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다니는 여자가 자꾸 눈에 띄었다. 여자는 모래가 묻은 채 그을린 맨발로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고, 다이빙 슈트의 하의만 걸친 채 비키니 상의가 드러난 채로 식당에서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다가 슈트가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바다로 나갔다. 다이빙에 필요한 무거운 공기통도 번쩍번쩍 들고, 배 위에서 여유롭게 있다가 노련하게 장비를 챙겨 입수하는 장면은 남자에게 더 특별해 보였다. 첫 바다 입수를 하다 겁을 먹고 다시 위로 올라갈 뻔했던 남자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남자는 대학 졸업반에 전기 기술자로 홀연 단신 베트남에 와서 맨땅에 헤딩하며 사회를 배웠다. 20대에 현장소장을 맡으며 베트남 인부들과 어울렸고, 영어를 배우려고 호찌민의 여행자 거리인 ‘데탐’을 드나들며 귀동냥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노이로 이직을 하며 더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여자는 베트남에 있는 한국 건설회사에 일하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다.
여자는 낮에 태국 친구들과 다이빙을 했고, 가끔씩 한국 팀도 함께 식사를 했다. 한국팀의 첫 바다 다이빙이 있던 날, 바닷가 식당에서 모두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각자 주문한 음식과 음료 값을 내고 나가려는데 종업원이 우리를 붙잡았다. 누군가 주문한 음식보다 돈을 덜 낸 것이다. ‘내가 얼마를 냈네’, ‘네가 얼마짜리를 먹었네’ 메뉴 판을 보며 모두가 다시 계산을 하고 있는데 직원이 결제가 되었다며 우리를 내보내줬다. 5일짜리 귀한 휴가에서 단돈 몇 천 원으로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남자가 결제를 한 것이다. 식당의 계산 착오일 거라고 생각했던 여자는 그런 남자가 이해되지 않았다. 여자는 저녁이 되면 해변가에서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다가 친구네 작은 방에 가서 몸을 뉘었다. 몽환적이고 아름다웠던 그 밤바다에서 한국인 교육생들을 만나면 함께 어울리기도 했지만 그중에 남자는 없었다. 스쿠버 다이빙의 첫 번째 관문인 오픈 워터 과정을 수료한 남자는 짧은 휴가를 마치고 먼저 하노이로 돌아갔다. 그리고 따오 섬에 남겨진 여자의 손엔 남자의 베트남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가 전해졌다.
다이빙 후 배 위에 올라 마시던 연유가 듬뿍 들어간 홍차
하노이에 돌아온 여자는 무려 ‘한국 음식’을 사주겠다는 남자의 약속을 기억하며 남자에게 냉큼 연락을 했다. 시골 마을의 NGO 관사에 머물던 여자에게 한국 식당은 일 년에 한두 번 한국에서 손님이 왔을 때나 갈 수 있었던 귀한 곳이었다. 쎄옴(오토바이 택시)을 타고 나가, 콩나물시루 버스를 타고,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타서 한 시간여 만에 하노이 한인타운으로 갔다. 따오 섬에서 했던 약속대로 남자는 고기도 사주고, 회도 사주고, 아귀찜도 사줬다. 그뿐 아니었다. 한국 소주도 사줬고, 우리 동네에선 볼 수 없는 서양 커피(아메리카노)도 사주고, 라이브 클럽에도 데리고 갔다. 여자는 2년간 가까이하지 못한 귀한 음식들에 홀려 매 주말마다 쎄옴 기사를 찾았다.
나이가 한참 많은 상사들과 한인타운 기숙사에 살면서 술 심부름, 밥 심부름만 하는 무료한 생활을 해오던 남자도 주말을 기다렸다. 물론 눈치 없는 여자가 ‘한인타운에 밥 잘 사주는 착한 회사원 오빠가 있다’고 주변에 자랑을 하며 매번 같은 처지의 언니 동생들을 우르르 데리고 나왔지만, 동생들에게 베푸는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남자는 자존감이 높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여자에 대해 점점 더 알고 싶어졌다.
몇 번의 주말을 함께 보내고 나자 여자는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던 결혼과 가족에 대해 떠올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결혼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 순간이 오게 된다면 가진 돈이 얼마든 ‘사랑하는 이를 위해 회와 아귀찜을 사주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 너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맞다, 여자가 마음을 연 데에는 사실 오랜만에 귀하게 먹은 회와 아귀찜이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여자의 활동 계약이 끝났지만 남자는 베트남을 떠나는 여자를 잡을 수 없었다. 만약 그 앞을 막는다면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던 여자가 행복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결국 여자는 계획했던 대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두 달이 넘는 귀로 여행에 올랐다. 남자가 신경 쓰였던 여자는 하노이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으로 갔다. 남자가 2년간 살았던 호찌민이었다. 호치민에서 다시 서쪽의 국경마을로 간 여자는 캄보디아를 다녀왔고, 덕분에 베트남에 2주간 더 머물 수 있는 비자를 얻었다. 다시 베트남에 돌아온 그녀는 어쩌면 다시는 베트남에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간 가보지 못했던 곳들을 훑으며 천천히 북으로 올라왔다.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여정은 친정 같았던 타이족 가족이 있는 마이쩌우였다. 여자가 마이쩌우에 도착하자 하노이에 있던 남자도 콩나물시루 버스에 올랐다. 남자는 여자보다 베트남에 2년이나 더 살았지만 이렇게 버스에 꾸역꾸역 끼어서 5시간 동안 시골길을 달려본 건 처음이었다. 여자가 머물던 마을에선 마치 사위가 온 것 마냥 남자를 환영했고, 둘은 종일 지켜보는 여러 시선을 피해 오토바이를 빌려 무작정 마을 밖을 나섰다.
구불구불 산길을 신나게 달리는 오토바이의 뒤에 앉아 여자는 '이런 일을 하고, 저런 일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수십까지의 꿈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만약 아이가 있다면 어린 아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여행작가 오소희 씨처럼 살고 싶다고, 아이를 데리고 세상 이곳저곳 자유롭게 훌훌 여행하며 많은 것을 배우게 하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출산은커녕 결혼도 생각 없던 여자였다. 핸들을 잡은 채로 그 모든 이야기를 들으며 시원한 바람을 맞던 남자가 답했다.
“그래. 하고 싶은 거 다 해.”
시골에서 갓 잡은 각종 고기 요리, 그냥 먹어도 맛있는 신선한 야채와 과일들, 어렵게 구해오신 팔뚝만한 민물 생선 찜, 땀흘려 농사지은 쌀로 지은 밥과 술까지 늘 고마운 한상차림
둘은 마이쩌우에 있는 동안 매 끼니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음식을 대접받았다. 그리고 떠나는 날이 되자, 여자는 홈스테이를 운영하면서도 매번 숙식비를 안 받으려 하는 가족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전하기 위해 지갑을 열었다. 남자가 돈을 꺼내려는 여자의 손을 가로막았다. ‘성의 표시인데 돈을 그냥 드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하면서 배낭 어딘가에서 구겨진 봉투 하나를 찾아왔다. 베트남 사람을 대하는 불손하고 오만 방자한 한국인들의 태도를 수없이 봐온 여자는 봉투를 챙기는 남자의 그 모습이 너무 좋았다. 남자는 다시 콩나물시루 버스를 타고 하노이로 돌아갔고, 여자는 남자와 라이딩하던 그 길을 지나 산속 국경을 통과해 라오스로 넘어갔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