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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시현 Jul 15. 2024

글의 효용

 효용이란 ‘쓸모’를 말한다. 세상 모든 것이 쓸모가 있어야 된다는 점에서 효용성은 다른 표현으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설득력 있는 예외로 반박을 할 수 있겠지만, 단적으로 말할 때 쓸모가 있는 물건은 가치가 높고, 쓸모가 없는 물건은 가치가 낮다. ‘글’이라고  이 부분에서 특별히 예외가 될 이유는 없다.       

 

  낙서가 아닌 이상 모든 글에는 목적이 있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설명문의 목적은 이해, 논설문의 목적은 설득, 그리고 문학의 목적은 감동이라고 배운다. ‘효용성’의 시각에서 각 장르의 글들은 그 목적을 이루었을 때 높은 효용성, 다시 말해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전자제품 사용 설명서는 설명문이다. 사용법을 자세하고 쉽게 설명한 사용설명서나 사용법이 낯선 제품의 설명서는 높은 효용성을 갖는다. 소비자가 설명서를 읽고 제품의 사용법을 이해했다면 그 글은 목적을 충실히 이룬 것이다. 때문에 그 글은 충분한 가치를 갖는다. 소비자가 읽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글이라면 쓸모가 없는 글이다.

  논설문은 배경 지식과 사고력, 이해력을 다 동원해서 읽어야 하는 글이다. 신문 사설이 주위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논설문이다. 보편적 상식과 질서를 아우르면서 억지나 무리가 없이 정연한 논리를 펴는 사설은 설득을 넘어 때로는 감동을 주기도 한다. 독자를 설득시키기에 충분한 이런 글은 높은 가치를 갖는다. 그 가치를 알기 때문에 관련 선생님들은 이런 글들을 추려 논술이나 논리적 사고의 교재로 사용한다. 문장도 허술하고 논리도 약해서 설득력이 부족한 논설문은 가치를 가질 수 없다.      

  지금은 글이 넘쳐나는 시대다.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종이가 사라질 것을 우려했지만, 오히려 과학의 힘을 얻어 상상 못 했던 종이가 나오는 것처럼 인터넷은 다른 각도에서 상상 못 했던 주제와 양의 글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 글들은 대부분 설명문이 아니고 논설문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면 문학일까...?     


  그런 글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혹은 일상사를 풀어놓은 것들이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펴봐도 유사한 범주의 글이 많다. 유명인의 에세이집, 유명 강사의 지침서, 혹은 자기 계발서등, 그런 책들의 효용성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유명인의 생각이나 사생활이 몹시 궁금했던 이들에게는 그의 에세이집이 유용할 것이다. 다양한 지침서나 계발서, 명상집 역시 생활에 지치고 회의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는  따뜻한 위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만사 해결해 줄 것만 같은 지침서나 계발서의 결과나 지속성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인터넷에는 그보다 더 가벼운 글들이 넘쳐난다. 맞춤법을 찾아볼 필요도 없는 인터넷 세상에서는 생각을 거듭하는 수고나 문장을 다듬는 노력도 쉽게 덜어진다. 필연적으로 주제는 그 형식과 같이 갈 수밖에 없다.

  쏟아지는 글들을 문학화하기 위해서 붙이는 단어가 ‘에세이’인 듯하다. 에세이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수사가 ‘붓가는 대로’와 ‘신변잡기’이니 반박이 어렵지만, 그런 글들이 정말 에세이일까?

  좋은 에세이 한 편은 사람의 지성과 감성을 모두 감동시킨다. 그리고 수필이라면 빠지지 말아야 할 요소가 작가의 ‘성찰’이다. 에세이라고 불리는 글들에 이런 감동과 성찰이 잘 녹아 있는지는 한 번 돌아봐야 할 일이다.

  좋은 세상이어서일까? 종이책을 출판하는 것도 깜짝 놀랄 만큼 쉽다. 지금도 크지 않은 금액을 들여 자비출판한 지인들의 책이 우편으로 온다. 그런 책들을 볼 때마다 나는 왠지 민망해진다.

  비는 꼭 와야 하지만 너무 많이 오면 홍수가 되고 장마가 된다.      


  갑자상소를 올려 세종의 한글창제에 반대한 최만리는, 관리로서의 삶 대부분을 집현전에서 근무했고, 후에는 청백리로도 선정되었지만, 한글 창제에 반대했다는 이유 하나로 이완용과 크게 다르지 않게 취급되고 있는 인물이다.  

  대학시절, 훈민정음 강의 첫 시간에 교수님은 최만리에 대해 언급하셨다.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에 대한 자부심이 가슴 한 가득인 우리들에게 교수님의 뜻밖의 말씀은 확실히 새로운 세계였다.


 최만리의 한글 창제 반대 이유를 대부분은 그의 사대사상으로 국한해 보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물론 ‘대국에 부끄럽다’고 하는 부끄러움을 저질렀지만, 그의 염려는 더 깊은 곳을 함께 보고 있었다. '언문'하다 보면 그 쉬움에 빠져 결국 공부에 게으를 것이다. 쉬운 공부만 하고 어려운 공부는 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미래는? 백성의 미래는? 최만리는 그런 세상을 염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그의 성찰이 세종을 따라가지 못했지만, 그의 염려는 일정 부분 설득력이 있었다. 교수님은 덧붙이셨다. 쉬운 것이 당연히 좋지만, 쉬운 것만 찾지 마라, 어려운 것을 해야 성장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어려운 것도 해라      


   아무 생각 없이 와작와작 씹어먹는 뻥튀기 같은 글이 있다. 그리고 건강을 위해 꼭꼭 씹어 먹어야 하는 현미밥 같은 글이 있고, 마지막, 큰돈 들여 정성을 다해 먹어야 하는 보약 같은 글이 있다. 뻥튀기도 현미도 보약도 모두 필요하다. 문제는 비율일 것이다. 보약만 먹어서는 안 되지만 뻥튀기만 너무 많이 먹어서도 안 된다. 뻥튀기는 효용성이 낮은 음식이다. 뻥튀기 같은 글은 어떨까...?


  언제부턴가 어렵고 재미없는 것이 죄악시되고 있다. 하지만 어려운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때로는 아니 가끔은 어렵고 난해한 글도 읽어야 한다. 고 더 높은 무언가를 원한다면 더욱 그래야 한다.


  필요한 것은 판단이다. 인터넷 공간이나 서점에 범람하는 강물처럼 넘쳐나는 글가운데 어떤 것이 뻥튀기 같은 글인지, 어떤 글이 보약이 되는지, 24시간 우리 옆에 붙어 있는 것 같은 작가, 강사, 강연자라는 타이틀과 그 타이틀로 나오는 글들이 한 잔 마시면 잠깐 시원하고 달콤한 청량음료는 아니었는지, 그리고 나는 그 가치에 합당하게 돈과 시간을 쓰고 있는지 정말 판단해야 한다.      


  ‘효용’이란 어휘는 글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효용’은 보통 실용의 영역이고 예술이나 문학과 같이 비실용의 분야에서는 분명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어휘다. 그럼에도 굳이 ‘효용’을 언급한 이유는 아마도 ‘글’의 내재적 범위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 하겠다.      

  나는 늘 기다린다. 반짝이는 이성과 관대한 감성, 차가운 논리와 뜻밖의 시선이 육화 돼 듯 정연하고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된 한 편의 글을, 또는 한 권의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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