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 노자에게 복음을....

by 심시현


중국의 위인들 이름 뒤에는 무슨 돌림자처럼 –자가 붙어 있다. 이유를 찾아보니 생각보다 단순했다. 중국에서는 뛰어난 업적을 쌓은 인물의 권위를 높이고 존경을 표현하는 한 방식으로 성씨 뒤에 –자를 붙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공자는 공 씨 선생님, 노자는 노 씨 선생님 정도가 된다. 물론 선생님이라는 호칭의 권위는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을 것이다.


도덕경을 읽으면서, 그의 제자들이 정말 노자의 사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존경했을까 싶은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욕심 없이 그야말로 ‘도인’처럼 산 노자는 존경할만한 인물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 같았다.

사람들은 수용하거나 동의할 수 없는 이론이나 사상을 접할 때,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하기보다는, 사회적 동물답게 ‘어렵다’ 또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라는 완곡어법을 쓴다. 노자는 많은 부분, 그런 의미에서 어려운 사상임에 분명했다.


노자는 정치제도와 교육 등을 통해 현실을 개혁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한 공자나 맹자의 현세 집중적 사상과는 궤가 달랐다.

노자에 의하면 없음이 있음보다 낫고, 비워져 있는 것이 채워져 있는 것보다 낫고, 양보다 음이 낫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선문답 같은 이 사상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모습을 노자 스스로 설명해 놓았다. 이 설명을 들어보면 노자가 하는 말이 조금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이 싸움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뛰어난 사람이 출세의 길을 달려 높은 자리에 오르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탐심과 도둑질에 눈멀지 않기 위해서 돈을 귀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에 탐심을 일으키는 값지고 귀한 것은 애초에 전시하지 않아야 한다.

노자는 이런 세상이 구현되려면 사람들이 아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봤다. 아는 것이 없으면 욕심도 갖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배운 우리에게 이런 세상은 사실 상상조차 힘들다. 노자는 좋은 임금은 백성들을 배불리 먹게 하되, 아는 것이 없게 하고, 특별히 많은 생각을 하며 고민을 쌓지 않게 하는 지도자라고 했다. 이런 노자 사상을 지지하는 이들은 현대의 정치, 경제,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는 ‘엘리트주의’나 ‘줄 세우기’라는 대학입시의 폐해를 언급한다.


공자와 노자는 춘추전국시대라는 같은 시기에 활동했다. 공자는 도덕과 예의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을 받아 줄 임금을 찾아 ‘천하주유’를 했고, 노자는 ‘도’와 ‘무위자연’을 설파했다. 두 사람을 따르는 추종자도 있고 일부 지지도 받았지만, 전쟁이 일상이었던 전국시대에 두 사람의 사상을 받아들일 위정자는 없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사상은 현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결과는 달랐다. 현세에 집중한 공자의 사상은 중국을 넘어 동양사상의 주축이 된 반면, 노자는 그런 주류의 사상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거기에 대해 노자는 분명 ‘그러거나 말거나’였을 것이다. 사실상 노자는 공자의 ‘입신양명’을 가볍고 하찮게 여겼다. 노자는 주나라가 쇠퇴한 이후, 서쪽으로 가 은둔의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서쪽으로 가던 노자가 ‘함곡관’이라는 관문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관리인 윤희라는 사람이 간곡하게 청하자 단숨에 5000 여자의 글을 써서 주었는데, 이 글이 ‘도덕경’이라고 한다. 노자의 비범함이 나타나는 단적인 ‘예’이기도 하다.


‘도’는 노자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지향점이다. 도덕경을 보면 도가 무엇인지 설명되어 있지만, 신기하게도 도에 대한 설명을 볼수록 ‘도’의 정체성이 모호해진다. ‘도가’에서는 ‘도’는 사람의 인식 너머에 있는 것이라고 처음부터 못을 박는다. 사람의 인식 너머에 있는 것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애초에 없다.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는 사람의 인식이 미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개념을 형성할 수도 없다. 도를 더 단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있음’과 ‘없음’이다. 있음은 사람의 인식체계 안에 있는 것이며 한정되고 유한한 것이다. 그 인식범위를 넘어선 것이 없음이다. 한정되고 유한한 것이 만물의 시초가 될 수는 없음으로 만물의 근원은 ‘없음’이다. 노자는 올곧게 이 ‘없음’을 추구했다.

도를 가장 쉽게 표현하면 ‘모름’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이 점이 노자가 당대의 다른 위인들과 다른 점이다. 공맹을 비롯해 그 시대 대부분의 위인들은 자신들의 ‘앎’을 설파했다. ‘모름’을 지각하고 인정한 이는 노자가 유일하다. 모든 ‘앎’은 ‘모름’에서 시작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노자의 인식은 현대인보다 더 세련되어 보인다. 무엇보다 노자의 사상은 ‘있음의 과잉’에서 비롯된 현시대의 많은 문제에 하나의 답을 주고 있다.


‘있음’을 배척한 노자는 당연히 인간 삶의 모든 애씀과 결과 지향성을 부정했다. 유교의 궁극적 목표인 ‘입신양명’은 ‘있음’의 대표 격이다. 말이 옛말일 뿐 ‘입신양명’은 현재를 사는 대부분이 추구하는 인생목표이다. ‘양’이 아닌 ‘음’을 추구한 노자의 사상에서 비춘다면 이 모든 것은 헛된 일일 뿐이다. 여기에 대해 노자는 세상은 ‘저절로 그러함’으로 나아간다고 했다. 인간의 노력이 세상의 ‘저절로 그러함’을 깨뜨릴 수는 없다는 의미로 들린다. 이런 사고는 자칫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빠질 수 있어 보이지만, 노자가 염세주의자나 허무주의자로 불린 적은 없다. 이에 대한 노자의 답은 ‘이 세상의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단단한 것을 부린다’라고 할 수 있다. 부드러운 것에 자연의 순리, 세상의 질서, 단단한 것에는 사람의 고집, 노력 등을 대입하면 이해가 아주 어렵지만은 않다.

‘저절로 그러함’을 ‘팔자’라 하든 혹은 ‘운명’이나 ‘운’이라 하든 인위적 ‘애씀’이 ‘저절로 그러함’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세상살이의 연수가 더할수록 인정하게 된다.


‘도덕경’을 이루는 하나의 원칙을 꼽아보면, 그것은 역설이다. 노자사상의 수용 여부,

깊고 낮음을 떠나 하나의 텍스트로만 볼 때 도덕경의 키워드는 여지없이 ‘역설’이다.

좋은 스승은 말이 아닌 침묵으로 가르치고, 없음이 있음보다 낫고, 음이 양보다 낫고, 덜 배운 것이 많이 배운 것보다 낫다는 노자의 모든 가르침은 일반적 상식을 거부한다.

낯선 듯 익숙한 이것은 대체 무엇일까? 도덕경을 읽으면서 머릿속을 내내 떠나지 않던 생각이다.

나는 도덕경을 두 번 읽었다. 어려서 읽을 때는 사실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고, 이번에는 원문을 좀 더 쉽게 풀이한 책을 읽은 때문이지, 그때보다는 한결 나았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느낌이 두 번 째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성경 때문이었다. 성경과 노자는 역설이라는 점에서 매우 흡사했다.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돌려대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마시우라, 나중 된 자가 처음 될 것이다. 성경 역시, 예수의 말씀 역시 모두 역설이다. 뿐만 아니라, 절대자 하나님을 우리는 절대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 역시 ‘모름’이라고 정의해도 과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는 빛에 따라서만 알고 깨달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노자의 도는 분명 ‘하나님’께 닿아 있다. 이것은 나의 역설일지도 모르겠지만, 노자는 구체적이진 않지만 어렴풋이라도 하나님을 알고 있는 듯싶었다. 아니면 절대자의 존재와 그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던지...

노자가 유대 땅에 태어났더라면, 아니 노자가 600년 후에 태어났더라면... 노자는 자신의 사상의 실체를 만나게 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노자에게 복음을... 시간을 역행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성경과 노자를 연결하는 나의 생각이 엉뚱하거나 얼토당토않아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아무래도 그래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