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튜브를 통해 가끔 설교를 듣던 목사님이 이단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충격이 적잖았다. 그 목사님은 회색지대가 없는 분이었다. 모든 말씀에 백과 흑이 분명했다. 모든 의문에 답이 딱 떨어졌고, 많은 목사님들이 회피하는 말씀에도 거침이 없었다. 그분을 지지하는 이들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던 것들을 목사님으로 인해 알게 되었다고 좋아했지만, 바로 그 점이 목사님이 이단 판정을 받은 이유인 것 같았다. 그 목사님이 정말 이단일까? 아니면 이단 판정을 내린 분들이 과오를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답을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지금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성경에 분명히 위배되어서 개신교로부터 이단으로 판정된 여러 종파들은 차라리 쉽다. 어렵고 혼란스러운 것은 위의 목사님의 예처럼, 개신교 안에서 목회자나 교파들 이 엇갈리는 경우다. 어떤 목회자는 살아 역사하는 마귀를 직시하고 물리쳐야 한다고 하고, 어떤 목회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마귀는 이미 패했으므로 다시 물리치는 행위는 필요 없다고 한다. 어떤 교파는 구원의 성령님과 능력(두나미스)의 성령님의 역사를 구분하지만, 그렇지 않은 교파도 많다. 국가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퇴행하는 사회를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목회자가 있고, 일체의 정치적 행위와는 거리를 둬야 한다는 목회자도 있다. 어이가 없지만, 기독교 안에서 ‘자유 우파’와 ‘진보 좌파’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그분들은 모두 자신의 옳음을 확신한다.
그리고 알파벳 약자로 표기되는 수많은 기독 단체들. 한글로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는 이름을 쓰면 좋겠지만, 의도가 정체성을 숨기는 데 있는 것인지 대부분 고만고만한 알파벳 약자들이다. 알파벳 약자로 명명된 이름만으로는 그 단체의 정체성을 알 수가 없다. 모두 예수를 내세우고 복음을 주장하지만, 그 속에 사악한 의도를 감추고 있는 단체는 없을까...? 알파벳 약자 이름의 단체마다 내세우고 있는 많은 목회자의 얼굴에 일반 성도들은 더욱 혼란에 빠진다.
‘좌우를 분변’할 수 없는 시대가 되고 만 것 같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매사 분명하게 답을 주시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답 대신 숙제를 주신 것 같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몹시 어려운 숙제다.
지금은 교회가 아닌 세상의 잣대로도 옳음과 그름이 혼란스럽거나 또는 뒤바뀌는 시대다. 논란 자체가 있을 수 없던 ‘그른 일’들이 어느 날 ‘옳음’으로 뒤바뀌어 있고, 믿어 의심치 않던 '옳음'이 어느 결엔가 '그름'으로 자리를 옮겨 지탄을 받는다. 다수이면, 목소리가 크면 ‘참’도 ‘거짓’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왜곡의 시대임에 분명하다. 거리로 나서서 집단의 ‘힘’을 보이는 이들은 그것을 견딜 수 없거나 아니면, 그것을 만들고 싶은 이들일 것이다.
이 참기 어려운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나는, 어떤 마음, 어떤 자세를 갖는 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맞는 걸까...?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 죽지도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응답하셨을까?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의 간절함이 아무리 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을 것이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히 기도해도, 악해지는 사회와 반기독교적인 법률들이 제정되는 것을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옳음과 그름은 더 적나라하게 뒤바뀌고 반성경적인 법률과 제도들이 공공연히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교회 역시 타락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다. 누구도 바라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바로 그것이 ‘믿음’을 되돌아보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가 오직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하나님만이 굴리실 수 있고, 불의도 정의도 그 시작과 끝은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일정 시기,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뒤편에 계심을 믿는다. 아니 믿어야 한다.-가 맞겠다.
예수께서는 빼앗긴 조국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 12제자 중 한 사람인 시몬 젤롯은 당시의 레지스탕스였다. 조국 독립을 위해 폭력도 불사하는 열심당원인 시몬을 제자로 부르시면서 그에게 어떤 언급을 하셨는지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자신의 신념과 행위에 대한 시몬의 언급도 없다. 하지만 예수는 열심당원인 시몬을 부르셨고, 부름에 응답한 시몬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열심 당원이 아닌 제자의 삶을 살았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예수는 사회 혁명가가 아니었다. 예수는 당시의 괴로운 사회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으셨고, 독립을 외치지도 않으셨다. 이 점은 세례 요한 역시 같았다. 예수는 가난한 자를 도우라 하셨지만, 그 책임 소재나 해결책을 언급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는 당면한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사회에 관심이 없으셨을까? 그럴 수는 없다.
예수는 자신의 일과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야 할 일의 경계를 아셨고, 그 경계를 지키시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셨던 것 같다. 예수께서 집중하신 일은 당연히 ‘죄인의 구원’이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지만,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스라엘은 1948년 결국 독립된 나라를 세운다.
나라를 위해, 정치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자주 본다. 그런 분들의 공동체 의식과 태도에 저절로 존경심이 나온다. 날씨에 상관없이 기꺼이 거리로 나가는 분들도 역시 존경한다. 그런 분들을 대할 때면, 저들은 전방에 나가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데, 나는 안전한 후방에서 비겁한 평화를 누리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간혹 교회공동체 안에서 그분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주신 빛의 양에 따라 각기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분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 사회 공동체를 확장시키고 지키는 버팀목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길을 찾아본다. 죄인의 구원에 집중하신 예수처럼 하나님에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탄식과 분노를 주께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따라가겠다는 '나의 모습', '나의 사명'에 집중하는 것, 그런 길이 있었다.
그 길 어디쯤에선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고 확신하길 조용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