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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Feb 11. 2023

어디로 갈까요?

영화 〈가버나움〉 (2019)과 영화 〈페르세폴리스〉 (2008)

나는 누군가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게 위선적이라고 느낀다. 오늘날 대학 교육은 더 이상 엘리트층의 특권이 아니라고 하지만 제도권 내의 교육만을 받고 성장한 내가 자유로운 가치관을 지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자유니 이념이니 떠들면서 무례를 범하기보다는 최대한 정중하고 치밀하게 접근해보려고 한다.


폭력의 원인은 무엇인가? 폭력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가버나움〉에서 부모님의 입장을 변호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분명 잘못이 아주 많은 보호자였다. 그러나 나는 〈가버나움〉이 부모의 잘못과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교묘히 섞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둘 다 비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부모님을 고소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부모의 잘못을 더 아프게 꼬집었다.


- 찢어지게 가난하면서 아이를 낳는 것은 잘못이다.

- 학교에 보내지도 못하면서 아이를 낳는 것은 잘못이다.

- 아플 때 병원에 데려가지 못하면서 아이를 낳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사람들은 어디까지 옹호할 수 있을까? 아래의 주장도 그럴듯한가?


-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이 아이를 낳는 것은 잘못이다.

-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이 아이를 낳는 것은 잘못이다.


실제로 리처드 도킨스는 인터넷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적 있다. (그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되려 다운증후군이 유전될 가능성이 낮은 것을 근거로 들어 자신의 주장이 히틀러의 우생학과 관련 없다고 변명했으나, 추후 시각 또는 청각 장애가 있는 태아도 가려내는 것이 현명하고 합리적이라고 표현했다.)

낙태를 하느냐, 다운 증후군 아이를 세상에 내놓느냐 중 택일하라면 도덕적이고 현명한 선택은 낙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미국, 특히 유럽에서 임산부 대부분은 낙태를 선택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한 발 더 나가서, 만약 당신의 도덕성이 저와 마찬가지로, 행복의 합을 크게 하고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바람에 기초하고 있다면, 임신 초기 낙태 기회를 버리고 다운 증후군 출산을 강행하는 건 비도덕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낙태 트윗에 대한 리처드 도킨스의 사과문


다음 주장은 어떠한가?


-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서 아이를 낳는 것은 잘못이다.

- 아이에게 물려줄 충분한 재산이 없으면서 아이를 낳는 것은 잘못이다.


과연 지구상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위에서 펼친 나의 이야기가 '그러므로 부모의 자격을 제한해서는 안된다'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면 이는 미끄러진 비탈길 오류일 것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내가 짚고 싶은 부분은, 아이를 낳은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우리는 결국 어느 시점에서 합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회는 개인이 아이를 낳는 문제에 대해 개입할 권리가 없다. 만일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합의한 내용에 대해 (그것을 규범으로 만들 만큼 강력하게) 정당화할 수 없다. 힘으로 규범을 만든다면 몰라도 말이다.


따라서 나는 부모 자격을 제한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 아이를 보호하려는 시도에서 사회의 역할을 찾고 싶다. 자인은 출생 신고도 되지 않은 소년이고, 자인의 여동생 또한 서류가 없어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사회의 '규범'은 사람들을 평등하게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가버나움〉에서 규범은 제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차별한다. 서류 더미가 압도하는 창고에 해당 사건을 다룬 서류가 새로 놓인다. 이제 '서류'에 기록된 자인이 규범에 의해 인정받은 것 같기도, 자인과 같은 수많은 사례가 상상되기도 한다.


이런 일은 어디서나 일어난다. 우리나라의 사례로는 최근 여성가족부의 표현 그대로, '법적 가족 개념 정의에 대한 소모적 논쟁'을 들고 싶다. 우리나라는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가족만을 '법적 가족'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로 인해 그 외의 형태로 가족을 꾸린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 예를 들어, 친족과 연을 끊고 친구와 사는 사람에 대해 의료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의 진정한 가족인 친구는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없다. 규범적인 시각에서 그들은 소모적 논쟁거리에 불과하다.


규범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그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매 순간 규범은 폭력이 된다. 이는 〈페르세폴리스〉에서도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마르잔이 완전히 이란을 떠나기 전의 세계는 흑백만 있을 뿐 색이 없다. 인물들은 회색도 아닌 흑과 백으로만 칠해졌다. 이란은 섞이는 것을 배제하고 이념적 순수성만을 좇아 자유를 억압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마르잔은 프랑스로 떠났다. 그런데 마르잔이 걸친 빨간 외투가 눈에 띈다. 가족의 역사가 뿌리내리고 소속감을 주던, 모두 같은 색상이었던 이란을 떠나자 그는 홀로 외로운 이방인이다.


이란 사회와 프랑스 사회 어디에도 편입되지 못하는 마르잔의 처지는 '공항'이라는 애매한 공간을 닮아 있다. 마르잔은 공항에서 매번 가족들, 자신의 이란을 돌아보았다. 떠나려니 이란을 사랑하고, 머물려니 자유를 사랑한다. 공항에서 시작해서 공항에서 끝나는 이 영상은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나는 결코 자인이 부모를 고소한 심정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자인에게 나는 그 자신도, 그의 부모도 아닌 제삼자, 사회의 작은 조각이다. 그날 법정에서 나는 자인의 부모뿐 아니라 판사, 변호사, 방청객, 방송사 직원, 프로그램 시청자의 모습으로 함께 심판대에 올랐어야 했다. 그동안 재판관 역할을 자처했던 사회는 이제 피고인 신분이다. 사회는 사태를 책임지지 못할 만큼 무책임했다. 규제의 사회에서 포용의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인이 소년 교도소에 있고 마르잔이 프랑스 공항에 있는 상황이 벌어진다.


현재의 마르잔은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와 같은 차림으로 공항에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택시 기사는 마르잔에게 묻는다. "어디서 왔어요?"


질문이 틀렸다. 나는 마르잔을 어디로 데려가야 할까?




참고 자료


낙태 트윗에 대한 리처드 도킨스의 사과문 https://newspeppermint.com/2014/08/24/abortion-down-syndrome-an-ap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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