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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Jan 28. 2023

길 1: 빅토리아 시대를 걷던 손턴 씨와 마거릿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남과 북』과 김은숙의 「미스터 션샤인」

비평 작품


엘리자베스 개스켈, 『남과 북』, 이미경 옮김, 문학과지성사(2014)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김유미 옮김, 더스토리(2019)

극본 김은숙, 「미스터 션샤인」, 연출 이응복, tvN, 2018.07.­2018.09. 방영




빅토리아 시대, 묻힌 이름들의 삶


“어떤 사람들은 소면실 한쪽에 바람을 일으키는 환풍기가 있어서 먼지가 해결된대요. 근데 그 환풍기가 엄청나게 ―아마 5~6백 파운드 정도― 비싼데 수익이 하나도 생기지 않아 그런 거 설치하려는 업주들은 몇 명 없어요. 게다가 그거 있는 데서 일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어요. 오랫동안 보풀 삼키는 데 익숙해져서 환풍기 때문에 그걸 먹지 못하면 배가 엄청 고파진다고, 그래서 그런 데서 일해야 한다면 임금을 올려줘야 한다는 거였어요.”

엘리자베스 개스켈, 『남과 북』, 이미경 옮김, 문학과지성사(2014), 161면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North and South』를 생각할 때 나는 원제의 순서대로 북쪽을 먼저 떠올리고 그런 다음 남쪽을 생각한다. 이 소설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공간적 배경은 북부로, 남부 지방은 격변의 중심지인 북부와 대비되는 정도의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북부의 밀턴은 면직공장이 늘어선 곳으로, 작품 속 빅토리아 시대 자본주의의 심장부이다. 이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된 19세기의 영국을 이해해야 한다. 당시 런던은 산업혁명을 일으킬 만큼 급진적이었지만 도시로 몰려든 사람 모두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만큼은 아니었다.


린지 피츠해리스의 『수술의 탄생』에 따르면, 거리는 마차에서 나오는 똥으로 범벅이었고 사람들은 모두 검댕으로 뒤덮여 있었다. 원시적인 개방 하수도에서는 메탄가스가 뿜어져 나왔으며, 묘지에서 흐르는 진물의 악취가 동네에 진동했다(린지 피츠해리스, 『수술의 탄생』, 이한음 옮김, 열린책들(2020), 35-36면). 동시대 작가 조지 오웰은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 2페니를 내고 줄에 기대어 잠을 청하는 빈민층에 관해 서술했다(George Orwell, 『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 Penguin Classics(2001), 190면). 상위계층,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었던 여왕 빅토리아의 시대에는 이름 없는 이들의 삶과 죽음이 만연했다.


『남과 북』은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고통스럽게 태어난 소설이다. 인구와 빈곤과 노동의 밀도에 압도당한 노동자의 처지는 베시의 말에서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면직공장에서 일하다 폐병으로 요절한 소녀 베시 말이다.




손턴 씨: 신사에서 인간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남아 있게 하는 최후의 방어선은 타인이 겪는 고통에 대한 온전하고 진실된 인식이며 이러한 인식은 모든 편견을 뛰어 넘는다.

「맨부커 수상 한강 NYT 기고, 미국사회에 잔잔한 울림」, 뉴스프로(2017.10.12.), https://thenewspro.org/2017/10/12/while-the-u-s-talks-of-war-south-korea-shudders/ (원문: 한강, 「While the U.S. Talks of War, South Korea Shudders」, The New York Times (2017.10.07.), http://nyti.ms/2g1vsAc)


개스켈이 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두 축은 갈등과 (개스켈이 제안하는) 화해이다.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는 대립을 골자로 하여 북부와 남부, 신흥 자본가와 전통적 상류계급, 사업주와 노동자, 여성과 남성 등 사회적 역할과 지위 때문에 야기되는 다양한 차원의 갈등과 이를 넘어선 화해를 다룬다.


현실 세계에서 우리의 삶이 그렇듯, 각 인물은 이야기 속에서 여러 역할을 맡는다. 주인공 마거릿은 남부 사람이자 상류층에 가까운 여성이다. 이렇듯 한 인물의 경험은 여러 각도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 인물들은 때론 심각한 갈등을 겪지만, 그들은 ‘대화’를 통해 서로 이해하게 된다.


이는 소설에서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진 사업주와 노동조합 간의 관계 변화에서 두드러진다. 수완 좋은 사업가인 손턴 씨와 노동조합의 일원 히긴스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을 꺼리지 않았다. 그들의 화해는 일차적으로 히긴스와 손턴 씨의 대면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후 손턴 씨가 노동자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친분을 쌓음으로써 상대방을 보다 진중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개스켈은 손턴 씨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답한다. 


“‘신사’는 타인과의 관계만을 설명할 뿐인 용어입니다만, 우리가 ‘인간’으로서 그 사람을 말할 때는 그의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생각하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 같은 책, 258-259면


마거릿이 ‘신사다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자, 손턴 씨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며 ‘인간다움’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손턴 씨는 인간 대 인간으로 상대방을 대한다. 그런데 이 관점은 관심보다는 무관심에서 비롯된다. 기꺼운 마음으로 하층민을 보살피는 상위계급으로서 노동자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마거릿과 달리, 그는 노동 시간 외의 일과에 관여하는 것은 불쾌한 간섭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저도 저 자신의 자유를 아주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타인이 제게 끊임없이 지시하고 충고하고 가르치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제 행동에 대해 사사건건 계획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수모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 사람이 더없이 현명하고 더없이 막강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저의 반발심과 분개심은 똑같을 겁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 같은 책, 191면


나는 신중하려고 했지만, 위의 구절을 읽고 손턴 씨가 자유주의자라고 결론지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도 매우 유사한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자기식대로 인생을 살아가다가 일이 잘못되어서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런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게 되면 다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길로 억지로 끌려 가는 것보다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이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서병훈 옮김, 책세상(2008), 42면


손턴 씨의 ‘인간 대 인간’ 주의는 하층민과 여성 등 전통적인 관점에서 비주류, 또는 인간 이하로 취급받던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하지만 그의 관점은 오늘날까지 지적되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기계적 자유주의는 때론 사람들 간의 실질적인 차이를 무시하기도 한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권력 차이를 무시한 채 두 집단을 동등하게 독립적인 존재로 보면,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법규는 상호 합의를 통해 임금을 정할 자유를 침해하는 악법에 불과하다. 그러니 노동자로부터 자본가를 보호하려는 요상한 문장이 소설 곳곳에서 보이는 것이다.


“폭력은 안 돼요! 여긴 한 사람이고 여러분은 다수예요.”


엘리자베스 개스켈, 같은 책, 281면


수직적 차이를 수평적 차이로 바꿔치기했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이 작품은 여전히 옹호 받을 가치가 있다. 자본가 손턴 씨는 마거릿의 영향을 받아 노동자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는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서 조금씩 돈을 걷어 구내식당을 운영한다. 이 사업에 감동한 어느 부자가 기부금을 내겠다고 했을 때 손턴 씨는 이를 거절한다. 그는 구내식당 운영을 자선사업으로 여기지 않고 사업의 일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행위는 상위계층의 보살핌이 아니다. 사업을 가능하게 하는 동료에 대한 일종의 지지이다. 그는 여전히 인간 대 인간으로 상대방을 보고 있다. 그저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더 알게 되었을 뿐이다.


손턴 씨는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여 이익을 얻었다. 그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통해 믿음직스러운 노동자를 얻고 폭동의 위협을 줄였다. 손튼 씨의 행동 동기는 연민 같은 감정보다는 이해관계에 의한 이성적 판단에 있었다. 그런데 선한 행동에 따른 ‘이익’은 기독교적 믿음과 섞여 불분명해진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선을 추구하는 것은 인물들은 올바른 행동이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고통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선의 추구는 자신을 위해 더 나은 선택지이다. 어쩌면 개스켈은 도덕적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남부 사람들과 이성적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북부 사람들 모두에게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자고 설득하고자 했던 것도 같다.



 

마거릿: 여성에서 인간으로


“1년에 170파운드 정도가 나오지. 프레더릭이 외국에 가 있기 시작한 뒤부터 쭉 그중 70파운드를 보냈다. 네 오빠에게 그 돈이 다 필요한지는 모른다.”

엘리자베스 개스켈, 같은 책, 60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의 엄마가 딸들을 시집보내려고 안달이 난 까닭은 딸들에게 재산을 한 푼도 물려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성이 직업과 재산을 ‘갖기’는 커녕 ‘쟁취하기’도 어려운 현실은 버지니아 울프의 『3기니』에도 기록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남과 북』 속 마거릿의 삶도 그리 녹록지 않다.


마거릿의 집안은 가히 착취적이다. 마거릿의 아빠 헤일 씨에게는 1년에 고정 수입 170파운드가 있는데, 그중 70파운드가 해외 도피 중인 장남에게 가서 나머지 100파운드와 부수 수입으로 마거릿과 그녀의 부모가 근근이 살아간다. 게다가 소설 초반에는 아빠의 독단적인 결정을 따라 밀턴으로 이사해야만 했다. 목사 일을 관둔 아빠와 병으로 앓는 엄마를 대신해 마거릿은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한다.


마거릿은 자신의 오빠와 부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온 힘껏 집안의 일을 두루 도맡지만, 인생의 향방은 스스로 내린 선택보다는 가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남부에서 마거릿의 사회는 전통적인 관계 위주였다. 그녀가 부모님이나 친척과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주로 등장하곤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북부에서 마거릿은 대화를 통해 손턴 씨를 알아가거나 거리를 걷다가 베시를 만나는 등 주체적으로 인간관계를 형성했다. 그중 최초의, 그리고 가장 특별한 인연인 손턴 씨는 그녀에게 ‘인간다움’이라는 개념을 말과 행동으로 전달했다.


마거릿을 둘러싼 가족들은 북부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반면 마거릿은 특유의 진취적인 성향으로 여러 갈등을 겪으며 누구보다 북부에 잘 적응했다. 그녀는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자기 삶을 개척해나갔다. 손턴 씨의 사랑을 원하는 것보다 더욱 깊이 그의 존경심을 원하는 대목에서 인간으로서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그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중략) 자신의 이름을 들었을 때 손턴 씨가 기꺼이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는, 자신에 대한 그의 존경심을 말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 같은 책, 637면


그리하여 손턴 씨와 마거릿의 관계는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관계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띤다. 우선 부유한 남성과 빈곤한 여성, 부유한 귀족과 빈곤한 하위계층이라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부의 흐름이 유연해졌다. 소설 앞부분에서 귀족인 마거릿은 가난한 반면 상업에 종사하는 손턴 씨는 부유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부유했던 손턴 씨는 파산 위기에 봉착하고, 가난했던 마거릿은 어마어마한 재산의 상속인이 된다. 천지가 변하는 세계에서 흔들리지 않는 손턴 씨와 마거릿의 태도는 더욱 진실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아가 마거릿이 손턴 씨에게 투자하는 방식으로 그를 돕는 결말을 통해, 남성이 결혼을 통해 여성을 돕던 기존의 성역할을 전복시켰다.


내가 『남과 북』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결말부이다. 『오만과 편견』에서 인물들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는데,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돌린 것 역시 다아시가 보낸 지극히 사적인 편지였다. 『남과 북』에서 마거릿과 손턴 씨는 싸움에 가까운 대화는 꽤 나눴어도 별다른 편지를 주고받지는 않았다. 둘을 화해시킨 결정적인 매개물은 바로 계약서이다. 여성은 이제 사적인 공간에만 머물지 않고 공적인 영역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또한, 계약서는 갈등을 넘어선 화해의 증거이다. 마거릿의 말마따나 그들의 관계는 ‘우정의 단계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는(엘리자베스 개스켈, 같은 책, 313면)’ ‘계속적인 대립의 연속(엘리자베스 개스켈, 같은 책, 314면)’이었다. 그러나 마거릿은 대화가 통했던 헨리가 아닌 손턴 씨와 손을 잡았다. 더욱이 그들은 부부가 아니라 투자자와 사업가라는, 당시로서는 새롭게 나타난 형태의 사회적 동반자가 되었다.


계약서는 산업혁명 시대를 배경으로 계층 간 차이를 극복한 연대를 그려낸 『남과 북』의 주제를 집약한다. 마거릿이 준비한 계약서는 겉으로는 그들의 공적 관계를 표방한다. 궁극적으로는, 공적인 언어로 작성된 서류 너머에 존재하는 사적 인간을 상상하게 한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법률 서류와 결산 보고서 몇 장을 떨리는 손으로 재빨리 넘기면서 말을 이었다. (중략) 그녀는 이 모든 제안이 자신이 기본 수혜자가 되는 단순한 사업상 계약의 측면으로 여겨지기를 무척이나 바라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 같은 책, 695면




길 2: 빛과 어둠에 관한 논증에서 이어집니다.






배경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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