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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Feb 04. 2023

길 2: 빛과 어둠에 관한 논증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남과 북』과 김은숙의 「미스터 션샤인」

길 1: 빅토리아 시대를 걷던 손턴 씨와 마거릿에서 이어집니다.




비평 작품


엘리자베스 개스켈, 『남과 북』, 이미경 옮김, 문학과지성사(2014)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김유미 옮김, 더스토리(2019)

극본 김은숙, 「미스터 션샤인」, 연출 이응복, tvN, 2018.07.­2018.09. 방영




창조인가, 파괴인가?

―「미스터 션샤인」 속 창조적 파괴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


 극본 김은숙, 「미스터 션샤인」, 연출 이응복, tvN, 2018.08.04. 방영, 9회


『남과 북』을 읽는 동안 자연스레 우리나라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떠올랐다. 이 소설의 배경처럼 조선 말기 사회는 격변의 시기였고, 여러 척도를 기준으로 한 계급이 발생했다. 신분에 따라, 국적에 따라, 부의 정도에 따라 강자와 약자가 달라졌다. 「미스터 션샤인」은 이들 모두를 꼼꼼히 보여준다.


특히 고애신과 유진 초이의 대비가 눈에 띈다. 고애신은 지체 높은 집안 출신으로 전통적인 기준에서는 상류층이지만 망해가는 조선의 백성이다. 유진 초이는 천민 출신이나 강대국인 미국 국적의 군인으로 새롭게 등장한 상위계층에 속한다. 자의든 타의든 일반 백성의 삶을 쥐어짜온 조선의 신분 질서는 운명을 다하고 있었다. 외세의 압력만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다. 조선 내부적으로도 변화의 조짐이 있었다. 조선이 타인을 인간 대 인간으로 바라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김은숙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잠시 작가의 사랑 공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김은숙의 드라마가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하지만, 나는 이에 반기를 든다. 그녀는 신데렐라보다 훨씬 집요한 사랑을 얘기한다. 신데렐라 속 왕자와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은 신분도 높고 재력도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을 결코 하나로 묶을 수 없는 차이가 있다.


동화 속에서 왕자는 전혀 희생하지 않는다. 왕자의 신분과 재력은 그저 왕자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장신구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저 조력자의 역할을 맡은 조연이다. 김은숙의 남자 주인공들은 다르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의 명예와 재력을 희생시킨다. 그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 사랑을 증명하는 수단이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재산은 가시적이다. 가진 걸 모두 포기하고 선택한 사랑이었으니 얼마나 애틋하냐는 시청자들의 세속적인 계산 아래 그들의 선택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버린 순수한 사랑으로 비친다.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이 특성이 정점에 달아 유진 초이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마지막 총 한 발과 자신의 목숨까지 전부 바친다. 김은숙의 사랑은 자기 파괴적이다. 「미스터 션샤인」 속 인물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 그들은 기존의 자아를 파괴하여 이상적 자아를 실현한다. 이때 조선의 신분제는 함께 부서진다.


고애신의 사랑은 크게 두 갈래의 결이 있다. 민족적 사랑과 개인을 향한 주변적 사랑이다. 전통적인 가치에서 민족 또는 나라는 개인에 우선했는데, 고애신의 사랑은 전통적 가치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이용하고 배신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인적인 미안함을 느끼곤 했지만 그뿐이었다. 선택의 순간마다 그녀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민족을 택했다.


미국에서 온 유진 초이는 자유주의 그 자체이다. 그는 근·현대적 가치관에 따른 개인적 가치 실현을 추구한다. 유진 초이는 끝까지 조선의 흥망에는 관심이 없음을 밝힌다. 하지만 그는 정의와 사랑 중에서 갈등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조선을 구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조금도 비껴가지 않은, 고애신을 향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고애신이 조금의 고민도 없이 늘 정의를 선택하였던 것처럼. 그들의 모든 순간은 한결같이 닮아있었다.

  

“당신은 당신의 조선을 구하시오, 난 당신을 구할 거니까. 난 그리 선택했소.”

극본 김은숙, 같은 드라마, 2018.09.29. 방영, 23회


『남과 북』과 「미스터 션샤인」은 둘 다 서로 다른 신분을 극복한 사랑을 그렸다. 『남과 북』은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다른 길에 대해 말한다. 사업주와 노동자는 서로 다른 처지에 있었고, 북부 사람과 남부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의 화해는 ‘더 나은 삶’이라는 동일한 목표 공유를 전제로 한다. 과거와 현재가 공유하는 (고정된) 가치를 위해 인물들이 변화하는 것이다. 이는 ‘선’이 고정된 객관적 대상이라고 여기는 전통적 관점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미스터 션샤인」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에서 결코 변치 않은 인간의 굳센 심지를 드러냈다. 인물들은 각기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같은 편에 섰다. 고애신은 사랑하는 민족을 지키고자, 유진 초이는 사랑하는 고애신을 지키고자, 김희성은 자기 가족이 쌓은 업보를 갚고자 동지가 되었다. 「미스터 션샤인」은 21세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우리는 더이상 서로 같은 목적을 공유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더불어 사는 삶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처럼 김은숙의 세계에서 화해는 우리가 별개의 존재로 여기던 것들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한 세계에서 창조와 파괴는 동의어가 된다.


“천년만년 가는 슬픔이 어디 있겠어? 천년만년 가는 사랑이 어디 있고?”
“나는 있다에 한 표.”
“어느 쪽에 걸 건데? 슬픔이야, 사랑이야?”
“슬픈 사랑.”

극본 김은숙, 「도깨비」, 연출 이응복, tvN, 2016.12.30. 방영, 4회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


루쉰, 「고향」, 『아Q정전』, 전형준 옮김, 창비(2021), 64면


화해에 대한 정의는 시대에 따라 바뀌어왔다. 앞으로 또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겠다. 하나 그대로인 것은 화해를 향한 인간의 희망이다. 탄광 깊은 곳의 카나리아 같다는 예민한 작가들은 남들보다 먼저 골짜기 발견한다. 사람들에게 골짜기를 보여주고 나서 산을 믿으라고 한다. 그들의 주장은 의심스럽지만 일리가 있다. 세상의 모든 골짜기는 산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어둠은 어디에나 있어서 이제는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인간 내면에 이미 어둠이 있다. 어둠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으로 빛을 믿을 수 있다면… 이보다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 시대를 초월하여 거듭되는 빛과 어둠에 관한 논증은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게 하는 길이다.






참고 자료


배경 출처: Watch North and South | Prime Video https://www.amazon.com/North-and-South/dp/B08P8CW629

굿바이 말고 씨유 어게인 https://brunch.co.kr/@buttercup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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