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멎는 곳에서 죽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꿈이오."
〈미스터 션샤인〉 9회 김희성의 대사
역사를 갈래에 따라 나누면 정치사, 경제사, 문화사, 사회사 등 여러 가지로 나뉜다. 교과서는 그중 정치사를 비중 있게 다룬다. 역사 중에서도 비주류로 취급되는 분야가 바로 민중사이다. 일반 민중들의 삶과 죽음은 교과서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김은숙 작가는 민중을 전면으로 내세워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애기씨도, 유진 초이도, 김희성도, 구동매도, 함진댁도, 아범도, 장포수도, 황은산도 정치인이나 주요 인사가 아니었다. 신분이나 재산이나 각양각색의 그들을 묶은 단 하나의 이름은 바로 의병이었다. 드라마 속 궁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은 중요했으나 오직 민중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만 중요했다. 작가는 무용한 이름 중에서도 가장 무용한 이름을 골라 그들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이 드라마는 더욱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8월 15일에 맞이한 대한의 광복은 미국의 힘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역사를 배우다가 의문이 생긴다. 조선의 쇄락에서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나라를 지키려고 싸운 이들의 목표는 번번이 좌절되었다. 나라는 빼앗겼고 독립은 남의 손을 빌렸다. 그렇다면 그들의 역사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
이는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이 드라마가 식민사관을 조장한다는 비난이 있었다. (나 또한 이 비난 때문에 오래도록 드라마 보는 것을 꺼렸다.) 식민사관은 거칠게 말해 조선이 미개하여 성장하지 못하니 일본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부패한 정치인들, 무능한 왕, 수없이 많은 친일파가 드라마에 등장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식민사관을 반박하기 위해서라면 조선이 미개했는지 미개하지 않았는지 하는 논쟁은 필요가 없다. 사실 '조선은 미개하지 않았다'라는 주장만으로는 식민사관 자체를 무너뜨릴 수 없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부모님과 아이들이 함께 산다고 치자. 옆집이 어느 날 아이들에게 너희 부모님이 문제가 있으니 내가 너희를 키우겠다고 집에 쳐들어와 집안을 풍비박산 내고 아이 몇을 납치하거나 죽인다. 옆집의 행동은 옳은가?
누구나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
부모의 잘못과 옆집의 잘못은 별개의 문제이다. 한 잘못이 다른 잘못을 정당화할 수 없다. 너무 명백해서 글자로 풀어쓰기가 곤란할 정도이다.
앞서 말했듯이 "A: 1) a 국가가 힘이 없으므로 → 2) b 국가가 a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라는 명제에서 1)을 부정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다른 나라에 비해 약한 나라는 어느 시대든 있기 마련이고, 그런 식으로는 되려 식민사관과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것밖에 안된다.
그러므로 명제 A 자체를 살펴보아야 한다. 옳은 일인가에 대한 문제이므로 그 기준은 도덕성(정의로움)이다. 그렇게 되면 A는 '힘이 곧 정의다'라는 식의 아주 우스운 말이 되어버린다. 이런 주장은 아주 원시적인 수준의 도덕관에 불과하며 근대사회에서 결코 지지받을 수 없다. 이렇게 1)과 2)를 연결하는 인과관계를 부정할 때 식민사관은 무너진다.
그렇다면 다음 명제는 어떠한가?
B: 1) a 국가가 힘이 없으므로 → 2) a 국가 국민들이여 힘을 기르자
우리 모두 일상적으로, 역사적으로 경험했듯이 도덕적 시시비비는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도덕적으로는 일본이 백 번 중 백 번 잘못한 게 맞다. 하지만 일본이 잘못을 했을 때 조선은 이를 바로잡을 힘이 없었다. 독립군들의 저항운동은 도덕적 옳음을 실현시키기 위한 현실의 투쟁이었다.
명제 A와 B는 언뜻 닮은 듯 보이나 사실은 아주 다르다. 명제 A의 정당화는 도덕적 잣대로 판단되는 반면, 명제 B는 현실적 검토 과정을 거친다. A는 틀리고 B는 맞다. 〈미스터 션샤인〉이 A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식민사관을 옹호하는 일이다. 그러나 B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독립운동을 정당화하는 일이다. 의병들의 숭고한 정신에 찬사를 보내는 이 드라마는 후자로 보아 마땅하다.
사랑의 측면에서도 김은숙의 변주는 놀랍다. 보통의 작품들은 세상을 구하는 (남자) 영웅과 그 영웅이 사랑하는 단 한 (여자) 사람을 내세운다. 대게 영웅들은 정의 실현과 사랑 추구 중에서 고민하는 듯하지만 결국 언제나 세상을 구하는 일이 먼저이다. 로맨스는 그저 영웅의 노력을 빛나게 만들어주는 장신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 모든 클리셰를 깨부수고 아름다운 사랑의 슬픈 끝맺음을 보여주었다.
당신은 당신의 조선을 구하시오, 난 당신을 구할 거니까. 난 그리 선택했소.
〈미스터 션샤인〉 23회 유진 초이의 대사
조선을 구하는 것은 애기씨이고, 그런 애기씨가 사랑한 단 한 남자가 바로 유진 초이다. 유진 초이는 끝까지 조선의 흥망에는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한다. 하지만 그는 정의와 사랑 중에서 갈등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조선을 구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조금도 비껴가지 않은, 고애신을 향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고애신이 조금의 고민도 없이 늘 정의를 선택하였던 것처럼. 그들의 모든 순간은 한결같이 닮아있었다.
사람들은 김은숙 작가가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의 드라마 작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에 반기를 든다. 김은숙 작가는 신데렐라보다 훨씬 집요한 사랑을 얘기한다. 신데렐라 속 왕자는 신분도 높고 재력도 있었다. 그러나 동화 속에서 왕자는 전혀 희생하지 않는다. 왕자의 신분과 재력은 그저 왕자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장신구에 불과하다.
김은숙 작가의 남자 주인공들은 다르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의 명예와 재력을 희생시킨다. 그들의 계층과 부유함은 사랑을 증명하는 수단이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재산은 가시적이다. 가진 걸 모두 포기하고 선택한 사랑이었으니 얼마나 애틋하냐는 독자들의 세속적인 계산 아래 그들의 선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버린 순수한 사랑으로 비친다.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그것이 정점에 달아 유진 초이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마지막 총 한 발과 자신의 목숨까지 전부 바친다.
등장인물들의 사랑은, 그것이 애국심이든 동지애든 연정이든 무용했다.
드라마의 후반부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그들 대부분 죽음을 맞이했다. 조금 승리하면 크게 패배하고 한 걸음을 떼면 열 걸음이 무너졌다. 하지만 드라마를 본 우리는 그들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들의 삶이 가치 있었음을 깨닫는다.
삶의 가치는 결말에서 오지 않는다. 어떤 삶이든 죽음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삶은 어떻게 죽었는지보다는 어떻게 살았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사는 동안 의병이 되고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어차피 조국을 빼앗길 것을, 자신이 죽을 것을, 자신들이 새드 엔딩(슬픈 끝맺음)을 향해 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싸웠다. 가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해진 결말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었다.
무용한 이들 역사의 의미는 어떻게 귀결되었는지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건 정해진 끝맺음에도 불구하고 걸은 각자의 길에 있기 때문이다.
대사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단어 중에 '헛된 희망'이 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헛된 희망을 품고 살다 죽었다. 그것이 희망이 되기까지는 이름 없는 이들의 무수한 걸음이 있었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
루쉰, 『아Q정전』, 전형준 옮김, 창비(2021), 64면
헤어짐의 안녕에는 굿바이도 있지만 씨유도 있다. 헤어질 때 만남을 기약하듯이, 이별하며 사랑을 약속하듯이, 어둠 속에서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