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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Oct 12. 2022

나는 창조주이자 창조물

영화 〈리틀 포레스트〉

음식을 만들 때에는 하나의 세계가 창조된다. 이 영화에서는 작물을 키우고, 재료를 다듬고, 보글보글 끓이는 등 음식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주로 담긴다. 반면 음식을 먹고 난 뒤 찌꺼기를 처리하는, 즉 세계를 허무는 과정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인물들이 창조하는 자신만의 세계, 그것도 아름다운 세계에 집중한다.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인생은 살기 싫다고. 회사 생활이라는 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게 그렇게 많지 않더라고. 생각할 여유도 없이 왜 사는지도 모르겠고 월급날이나 꾸역꾸역 기다리면서 사는 게, 어느 날엔가 문득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터질 것 같더라고.

영화 〈리틀 포레스트〉 中 재하의 대사


오늘날 사람들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각종 역경은 한 개인이 해결하기 어렵다. 열심히 일하면 집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버린 청년들이 늘어났다. 버블이 꺼진 일본에서는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고 아르바이트로만 사는 사람들이 생겼다. 우리나라에서 소확행이 유행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혜원은 사랑에도 취업에도 실패하였고, 재하도 직장생활을 그만두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기력한 상황에서 개인은 어떻게 자아실현을 할 수 있을까?


영화 속 인물들은 어찌할 수 없는 외부세계가 아닌 인간의 내면세계에 집중한다. 영화 내내 내레이션을 통해 끊임없이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보여준다. 왕따를 당해 괴로워하는 아이를 위해 나서는 대신 음식을 해준다. 이 지점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 차원의 문제로 치환하려는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본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듬어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생각할 여지도 있다.




영화 속 음식의 재료가 주로 식물인 점에 주목해 보자. 엄밀히 말해 채식과 육식 둘 다 살생이지만, 인간은 고기를 먹을 때 살생의 이미지를 더욱 강렬하게 느낀다. 드뇌 빌뇌브 감독의 〈다음 층〉이라는 단편영화(https://youtu.be/t60MMJH_1ds)는 〈리틀 포레스트〉 대척점에 있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어떠한 교류도 없이 거의 날것의 고기를 먹는다. 너무 무거워서 테이블이 아래층으로 떨어지면 그곳에서 마저 먹는다. 그러다가 끊임없이 아래로 하강하고 영화는 끝이 난다. 반면 〈리틀 포레스트〉에서는 식물의 재생력에 주목하였다. 다 먹은 토마토를 던진 자리에 다시 토마토가 자라나는 장면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재하네 사과가 태풍에 떨어졌듯이, 각자의 내면세계는 끊임없이 외부세계의 영향을 받는다. 혜원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엄마가 만들어준 세계가 부서진다. 엄마만의 양배추 빈대떡, 엄마가 개발한 크림 브륄레는 기성 음식과 다를 바 없었다. 내면세계의 창조주에서 외부세계의 창조물로 전환되는 장면은 차갑고 시리다. 그러나 자신 또한 거대한 자연의 작물 중 하나라는 사실은 외부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봄, 겨울, 가을, 겨울을 지나면 다시 봄이 돌아온다. 열매를 심은 자리에 열매가 난다. 이는 깨지지 않는 자연의 약속이다. 혜원의 엄마도, 혜원도 말없이 떠났다. 그들은 휴대전화도 인터넷도 잊은 듯 연락이 없다. 그러나 떠난 이도 남은 이도 연락을 기다리지 않는다재하와 은숙은 개별적 인간이라기보다는 마을로 대변되는 거대한 자연의 일부에 편입되어 다만 넉넉한 마음으로 혜원이 돌아올 것을 믿는다. 그들의 관계는 자연에 기대어 맺어졌기 때문이다. 자연의 순환성에 의지하는 그들의 관계는 인간적인 책임의 표시인 '연락'에 기댈 필요 없이 돈독하다.


봄과 겨울의 성패를 구분할 수 없듯이, 그들의 사랑은 성공도 실패도 없다. 그들은 떠날 때에 돌아올 것을 안다. 혜원이 떠날 수 있던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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