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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Oct 19. 2022

0.3%의 벌꿀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2022)

이 사람... 날 완전히 망가지게 두지 않는구나.


〈나의 해방 일지〉 15회 염미정의 대사 中



마지막 회에서 구자경이 새 출발을 하려고 위스키를 꺼냈을 때, 500원짜리 동전이 데구루루 떨어져 하수구에 빠지는가 싶더니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어느 리뷰에서 동전의 학이 훨훨 날아가려는 구자경을 의미한다고 한다. 나도 그 동전이 꼭 구자경 같다. 데굴데굴 떨어졌는데, 시궁창에 아주 처박히지는 않고 3분의 2 지점에서 멈췄다. 눈을 뜬 모든 순간 그를 괴롭게 하던 '이 세계' 일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느끼고 벗어날 것을 암시하는 장면처럼 느껴진다.


한편, 염미정은 구 씨가 떠나고, 엄마도 돌아가시고, 아빠가 재혼하신 뒤로 버려졌다고 느꼈다. 완전히 망가지기로 결심한 순간에 구자경이 전화를 걸었다. 그때 염미정은 아, 이 사람이 내가 완전히 망가지게 하지는 않는구나, 싶었다고 한다. 염미정도 딱 3분의 2 지점에서 멈췄다. 바로 그 지점에서 서로가 서로를 구원했다.


옛날에 TV에서 봤는데 미국에 유명한 자살절벽이 있대.  근데 거기서 떨어져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 인터뷰를 했는데, 3분의 2 지점까지 떨어지면 죽고 싶게 괴로웠던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느낀대.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죽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발을 뗐는데, 몇 초만에 그게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느낀대.

〈나의 해방 일지〉 9회 구 씨의 대사 中




염미정은 구 씨를 마음껏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장단점을 따지지 않고, 그의 아픔까지 사랑하였다. 그렇게 계산 없이 주고 또 주는 사랑을 했다. 이 순수한 사랑은 속세의 먼지가 여기저기 가라앉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환상적이고 깨끗한 요소이다. 아이는 유모차에 태우지 않고 업을 거라는, 한 살짜리 당신을 업고 싶다는 염미정은 자신이 알 수 없는 그의 유년 시절의 상처까지 아끼고 사랑한다.


염미정이 남자한테 돈이나 뜯긴 미련한 여자인 걸 들키기 싫어했듯이, 구자경은 자신의 밑바닥을 염미정에게 숨기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 세계'로 돌아갔을 때 염미정과의 연락을 끊었다. 전화번호를 바꾼 건 염미정에게서 오는 연락을 도저히 거절할 자신이 없어서인가. 그러다가도 염미정이 너무 보고 싶어 달려가는 모습이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치부를 숨기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사랑하고 마는 마음 역시 추앙이었다.




이 드라마에 성차별적 요소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사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여자 친구가 좋아할 테니까' 좋은 직장 다니고 좋은 차를 몰고 싶다는 인물은 찌질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나는 이 드라마가 성차별에 동의한다기보다는 현실사회의 성차별적 요소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믿고 싶다. 차에 관심을 보이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남자였음에도 하나같이 여자가 좋아할 거라고 말하는 그들의 모순을 근거 삼아. 이 드라마는 해방 클럽의 규칙에 따라 행복한 척 하지도, 불행한 척하지도 않고 정직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렇게 딱 5분. 하루에 0.3%의 설렘이 함유되어 있다면 그럭저럭 살만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는 벌꿀이 0.3%만 들어가도 불량식품이 아닌 과자로 친다. 0.3%면 도저히 채우지 못할 만큼 크지도, 느끼지 못할 만큼 미미하지도 않다. 그 정도면 제법 괜찮은 과자―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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