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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Sep 14. 2022

코스모폴리탄

영화 〈스파이의 아내〉 (2021)


나는 일본 영화나 드라마가 잘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에 평소에 즐겨보지 않았는데 이 영화에서 아오이 유우의 연기를 보고 아주 깜짝 놀랐다. 나 같은 문외한도 놀랄 만큼 분명히 대단한 연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지는 못했다. 타카하시 잇세이가 연기한 유사쿠가 "나는 코스모폴리탄이야"라고 말했을 때부터 나는 코스모폴리탄이 나로부터 얼마나 먼 단어인지 하는 상념에 사로잡혔다.




코스모폴리탄에 대한 캠브릿지 영어사전의 정의는 someone who has experience of many different parts of the world인데, 내가 이해하기로는 민족주의와 대비된다. 민족주의는 민족이 중심이 되고 민족이 가장 중요하지만, 코스모폴리탄의 정의는 세계가 기준이다. 따라서 국적과 상관없다.


기억이 안나는 어느 때에 우연히 코스모폴리탄이라는 단어를 듣고 참 좋은 단어라고 생각했다. 나의 성별과 국적이 마치 나의 약점인 듯 느껴졌기 때문에 최대한 그것들이 없는 척 무시를 하고싶어했다. '스웨덴'이 아니라 'Sweden'이라고 말하라던 스웨덴-영국 혼혈인, 알 수 없는 말로 소리치던 아저씨, 태권도복을 입은 나에게 닌자 얘기를 꺼내던 얼굴들……. 내 삶의 지나친 위협은 절대로 아니었지만 거스러미만큼이나 거슬리고 번거로운 탓에 나는 내게서 대한민국과 아시아의 색을 모두 빼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코스모폴리탄이라니, 그것은 얼마나 허울 좋은 핑계인가? 애국심이나 충성심이 없다는 파렴치한 말보다는 '세계시민'을 지향하는 신세대가 된 듯한 그럴듯한 정의감이나 만족감을 준다. 그러나 이 느낌은 민족주의가 아주 깊게 뿌리내린 우리나라에서 '세계시민'이라는 단어만큼이나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내게 해주신 이야기가 있다. 물론 그것은 과거의 일이다. 내가 겪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다 지난 일 아니냐고 물으면 나는 도저히 그렇다고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배신 행위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나는 내 두 눈으로 그분들의 주름진 형태를 본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안아주시고, 내 귀에는 그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할머니 댁에서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집 냄새를 맡는다. 나는 온몸으로, 나의 온 감각을 동원해서 그들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조부모님의 이야기는 내게 아직 살아있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한 것은 1945년 8월 15일이라고 하나 나는 진정한 자유를 맞이하였는지에 대해 비판적이다. 해방 이후, 소련이나 미국의 신탁통치로부터 벗어나 자립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체계를 세워야 했다. 민법이나 형법 같은 기본적인 법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었을까? 선조들은 모두 일본으로부터 베껴야만 했다. 그 외에도 오늘날 우리가 이어오고 있는 학문에는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 사정이 이런 탓에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할 때에도 나는 순결한 환희를 느끼지 못한다. 지난 역사에 대한 슬픔, 기회를 빼앗겼다는 분노, 이 모든 걸 덮고 계속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속박감, 그 외에 하나하나 구분하고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엉키고 뒤섞여 더럽혀진다.


내가 코스모폴리탄이 되기 위해서 나는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영화가 우리 편인지, 얼마나 우리 편인지, 어느 차원에서 어떤 강도로 비판적인지 계산하고 계산하고 계산했다. 내가 이 영화를 감상하고 마음껏 즐기고 좋아하는 일은 그 계산 이후에 나온다. 하다못해 한일전이라도 있으면 지고는 못 사는 우리의 마음 구석구석은 아직도 속박되어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와 그들, 절대 우리가 될 수 없는 이들을 솎아낸다. 강박적으로 진짜 자기편을 찾고 선을 긋고 남의 편에게 공격적 성향을 보이는 것은 선명한 식민지의 상처이다.




이 작품은 선과 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정의와 부정의에 대해 설교하는 류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더 복잡하고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시대적 상황 속에서 무참히 소멸된 개인성에 집중하였고 이를 표현한 방식 또한 놀랍다. 배우가 감독에 의지하듯이 스파이의 아내는 스파이에 의지하고, 사토코는 그녀의 남편에 의지한다. 사토코의 신념 또는 정의관은 그 진심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남편에 의존한다.


나에게는 그녀가 제국주의든 반제국주의든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니 남편이 떠나고 일본이 패망했을 때에 어디에도 기대지 못하는 그녀가 망연히 주저앉은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아이러니하게도 이등시민의 후손인 나와 매우 흡사했다. 나의 자아는 민족성에 강하게 묶여 있다. 그러니 내 자아의 일부는 이 구속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녀가 손바닥보다 더 쉽게 방향을 트는 걸 보며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정의나 세계에 관한 관념 중 일부가 실망스럽게도 빈약한 정당화만을 거쳤음을 확인한다. 코스모폴리탄으로서 살고 싶은 나의 욕망은 이렇게 좌절된다. 나는, 나라는 인간의 가치관은 대단히 의존적이다.


진정한 자유의 날이 오면 오히려 지금의 민족적 자아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낡은 민족성을 떼어내 배신하고 버려버리는 것이다. 그때가 오면 우리나라를 덜 사랑하게 될까?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나의 자유이다. 나는 오직 한 줌을 사랑하더라도 그 모든 슬픔과 아픔으로부터 좌절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날에 이르러 나는 자유인, 코스모폴리탄이 되는 것이다.



표지 출처

스파이의 아내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43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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