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대한 (거의) 모든 것
이름은 주인을 닮았다. 은지는 정말 은지같고, 경수가 아닌 경수는 어색하다. 이름지어진대로 사는건가, 하다가도 생긴대로 이름을 붙였구나 싶을 때가 있다. 여기서 오래 전 들었던 부바/키키 효과가 떠오른다. 아래 사진 중 무엇이 부바이고, 키키일까? 사람들은 대부분 뾰족한 쪽을 키키라고 한다. 이는 언어와 사물의 연결이 늘 자의적이지는 않음을 보여준다. 우뚝 솟은 것이 ‘산’이고, 새파란 ‘하늘’ 위에 잘강잘강 맑은 소리를 내는 것이 ‘별’인 것처럼* 나의 이름도 어딘가 나를 닮았을 것만 같다.
이름이라는 틀 자체가 애초에 삶을 본떠 만들어졌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넌센스 퀴즈 말마따나 이름은 분명 나의 소유이지만 남이 더 많이 사용한다. 이름은 기록할 때보다 발화할 때 특히 그렇다. 내 물건, 내가 쓴 글, 내가 그린 그림에 남기는 서명은 내 재산을 구분하는 표식이다. 그러나 입에서 입으로 이름이 전해질 때 그 이름은 정반대의 기능을 한다. 이름을 알려주는 행위는 상대방에게 그 이름을 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가던 길을 멈추고 그에게 답하겠다는 충실한 약속이다. 새들의 지저귐같이 이름은 삶의 조각을 전달하는 사람들의 전언이다. 그 속에서 쓰이지 않는 이름은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이름을 중요하게 다룬다. 주인공 치히로는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원치 않는 일자리를 구한다. 치히로가 일하는 동안 마녀는 그녀에게 ‘센’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조력자 하쿠는 본래의 이름을 까먹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래야만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명작이라고 생각해왔지만, 다시 보니 새로운 면이 눈에 들어온다. 나와같은 신입사원 센이 보인다. 평생 치히로로 살던 소녀는 한순간에 센으로 불린다. 센이 된 그녀가 하는 일은 생뚱맞게도 요괴 목욕탕 청소이다. 나랑 똑같다. 1년 전 갑작스레 시작된 ‘K대리’의 삶은 평생 ‘K**’으로 살아온 나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회사에서 하찮은 일을 시키는데 심지어 그걸 못한다. 마녀와 용 만큼이나 지금 내 모습이 낯설다. 영화 말미에 센이 치히로로, 자기 자리로 돌아갔듯이 진짜 삶이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내 이름이 정말 그곳에 있을까?
내 질문에 사라져가는 이름으로 대답하는 목소리가 있다. 아이유는 〈이름에게〉라는 곡에서 ‘조용히 잊혀진 네 이름을 안다고, 멈추지 않고 몇 번이라도 외’치겠다고 노래한다. 이름 부르기는 단순한 소리내기가 아니다.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행위이다.
생각해보면, ‘나’와 외부를 구별하는 경계는 모호하다. 개인은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분리되어있지도, 고정되어있지도 않다. 누군가 나를 부르면 이름에 생명력이 피어나듯이, 나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그동안 나는 내 안에서 나를 발견하려 했다. 찾을 수 없던 게 당연하다. 이름은 스스로 태어나지 못한다. 엄마가 나를 부를 때 나는 사랑받는 딸이다. 박씨가 나를 부를 때 나는 오래된 친구이다. 나는 딸이자 친구이자 직장 동료이자 그 밖의 누구나이다. 깨닫고나니 한결 가볍다.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 비로소 우리는 존재한다. 누군가를 꽃처럼 부르는 일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만큼이나 애타는 마음이다.
* “꽃잎으로 쓴 산이 우뚝 솟았습니다. 꽃잎으로 쓴 하늘이 새파래졌습니다. 꽃잎 별은 잘강잘강 맑은 소리를 냈습니다.” 손연자, 「꽃잎으로 쓴 글자」
**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문학동네(2013), 17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