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한 핫플레이스가 아니라 잘 늙어가는(aging) 공간에 대한 염원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소위 선진국 대도시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공원이 잘 발달되어 있다는 점이겠습니다. 영국은 하이드 파크이나 큐가든 등을 비롯하여 몇 백 년 된 나무들이 아름드리 자라고 있는 거대한 규모의 근린공원이나 식물원들이 도심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데요. 우리나라도 여의도 공원이나 서울숲처럼 좋은 공원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강 세계불꽃축제 등 유명한 행사들이 있을 때마다 여의도 주변 공원이 인파로 꽉 메워지고, 서울숲에서는 웨딩 스냅 촬영지로 판에 찍어낸 듯한 사진들이 양산되는 것을 보면 '서울권 핫플레이스'의 하나로서 공공공간들이 소비되고 있다는 아쉬움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필자는 영국 런던에서 1시간 30여 분 기차로 떨어진 바스(Bath)라는 소도시에 1년 반 정도를, 런던에서 5개월 정도를 살았는데요. 가장 좋았던 영국의 공원이 어디였는가 하면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공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야말로 근린공원이었는데 엄청나게 넓었고 크리스마스면 마켓이 열리는 등 동네 주민들도 즐겨 찾는 곳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좋은 근린공원들이 많을 텐데 여기 영국만큼 동네 주민들이 사랑하고 즐겨 찾는 곳들은 얼마나 될까? 궁금함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공원 서적 베스트셀러 "공원주의자"의 저자이자 양천구 녹지과에 근무하는 온수진 과장님은 스스로를 "공원으로 도시를 바꾸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양천구는 국내 최초 지방정부 ESG평가에서 2021년 A등급으로 1위를 차지한 곳이기도 합니다. 자연환경은 물론 주민이 참여하는 자치 거버넌스 등에서 종합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을 달성했다는 뜻입니다. 아이들 키우기 좋은 동네, 평생 늙어 죽을 때까지 살고 싶은 동네라고 흔히 묘사되는 양천구. 구민들 사이에서는 유독 동네에 대한 팬덤이 강하게 엿보이는 자치구인데요.
작년 4월 필자와 서울대 도시환경전략과정 동문으로 소정의 인연을 맺은 온수진 과장님을 목동 신도시 남쪽 끝 신트리공원에서 만나, 양천구 로컬의 이모저모에 대해 물었습니다.
양천구에는 공원이 많습니다. 양천구 공원의 대표명사인 양천공원을 빼고도 그 유명한 파리공원, 신트리공원이 모두 양천구에 있어요. 평일 오후 두세 시경인데도 텅 빈 모습이 아니라 동네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습니다. 중학생들부터 어르신까지 운동을 함께 하고 있고 동네 텃밭도 보입니다. 저녁이나 아침이면 다섯 배는 되는 사람들이 공원을 찾는다고 하네요. 양천구 녹지과 실무자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실까요.
공공공간에 있는 모든 초록색 생물들을 보살피고, 심고, 가꾸고, 또 주변에 다양한 운동시설이라든지 문화 프로그램이라든지. 이런 모든 걸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초록색으로 돼 있는 모든 건 다 제 거죠.
온수진 과장님은 조경과 관련된 전공이 계기가 되어 "도시에서 정원과 초록을 가꾸는 일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무척 잘 맞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공무원이 주민 복지를 위해 제공하는 서비스에는 매우 다양한 형태가 있지만, 무언가를 단속하거나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심고 가꾸는 등 무언가 녹색의 가치를 제공한다는 것이 받는 이에게도, 주는 이에게도 만족도를 높게 준다고 말합니다.
양천구는 목동 신도시라는 곳이 생기면서 만들어진 자치구입니다. 예전에는 강서구에 속해 있었던 지역이었습니다. 이 글을 적는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약 8년가량을 강서구민으로 살았는데 겨울이 오면 얼어붙은 논밭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비닐하우스에서 쥐포를 구워 먹던 따끈따끈한 기억이 남아 있어요. 이처럼 강서구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던 논이나 밭 같은 농경지가 많이 남아돌고 있었어요. 온수진 과장님 말로는 120만 평 정도 되는 큰 땅이 있었다고 하네요. 이 부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오고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인구가 늘어나 현재의 양천구가 생겼어요.
다시 말해 목동신도시가 양천구 태생부터 현재까지 많은 도시 아이덴티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신도시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쾌적한 주거 공간과 도시 어메너티(Amenities)를 특징으로 합니다. 거주공간에서 밀접한 부지들에 공원과 숲이 만들어져 있고 생활공간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서 안전하게 걸어 다니고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가 있어요. 목동을 중심으로 한 양천구는 아이들을 키우기 좋다는 말이 특히 많이 나오는 곳인데 학원이라든지 교육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아이들이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는 보행로나 자전거길이 매우 잘 되어 있는 "안전한 도시"라는 점도 한몫합니다.
양천구 주민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동네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는 점입니다. 목동 신도시 주민 분들을 중심으로 더욱 동네부심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목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반 및 복지시설이 조금 부족한 동네들도 있지만 꾸준한 개선 및 보완 노력으로 동네 간 격차 및 갈등 또한 타 지자체에 비하면 심하지 않아 보입니다.
잘 만들어진 도시, 잘 다듬어진 도시는 사람들 간의 관계라든지 소통의 방식들을 좌우하죠. 굉장히 친절한 도시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순환된다라고 생각을 해요.
양천구라고 하면 소위 요즘 MZ세대가 말하는 '핫플'이 부재하다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성수동이나 서교동처럼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 한한 스팟은 양천구에 없을까요? 이 질문에 온수진 과장님은 "성수동이나 홍대같이 핫한 공간이 모든 동네에 꼭 필요할까"라고 반문하십니다.
양천구가 거주 중심의 도시 지역이다 보니까 굉장히 이 기능에 더 최적화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우리가 굉장히 초고령화 시대를 맞고 있잖아요. 어르신들은 아무래도 멀리까지 이동하시는 것들이 쉽지 않고, 살고 있는 그 주변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해요. 예컨대 이런 것이 양천구가 핫플을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에요. 젊은 친구들은 어디 영(Young)한 지역을 가고 싶어 하겠지만, 잘 늙어가는(aging) 그러한 도시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양천구에는 오래된 건축물들이 많이 밀집해 있는 지역들이 찾아보면 꽤 있다고 합니다. 신정동과 신월동, 화곡동 지역까지 가로지르는 국회대로 지하화 후 도로 위 천연 공원이 조성되면 주변의 조밀조밀 오래된 건축물들은 일부는 개발되겠지만 일부는 남아서 녹색 양천구의 도시 브랜드, 지역 브랜드를 만드는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동네 주변의 공원을 둘러보고 그 공원 주변에 어떤 사람과 어떤 건축물, 어떤 커뮤니티들이 살아 숨 쉬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글/사진 전서은 (로컬인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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