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사 전문]
안녕하세요, 07년도 여름에 졸업한 수학자 허준이입니다.
우리가 팔십 년을 건강하게 산다고 가정하면 약 삼만 일을 사는 셈인데, 우리 직관이 다루기엔 제법 큰 수입니다. 저는 대략 그 절반을 지나 보냈고, 여러분 대부분은 약 삼 분의 일을 지나 보냈습니다. 혹시 그중 며칠을 기억하고 있는지 세어 본 적 있으신가요? 쉼 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우리가 오랫동안 잡고 있을 날들은 삼만의 아주 일부입니다.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 주고 있습니다. 마무리 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졸업식이 그런 날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하루를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학위수여식에 참석할 때 감수해야 할 위험 중 하나가 졸업 축사가 아닌가 합니다.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돼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교묘한 자기 자랑을 듣고 말 확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겁이 나서, 아니면 충실하게 지내지 못한 대학생활이 부끄러워 십오 년 전 이 자리에 오지 못했습니다만, 여러분은 축하받을 만한 일을 축하받기 위해 이를 무릅쓰고 이곳에 왔습니다.
졸업식 축사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요? 십몇 년 후의 내가 되어 자신에게 해줄 축사를 미리 떠올려 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 축사를 지금 떠올려 보는 것도 가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연하게 떠오르는 말은 없습니다. 지난 몇천 일, 혹은 다가올 몇천 일간의 온갖 기대와 실망, 친절과 부조리, 행운과 불행, 그새 무섭도록 반복적인 일상의 세부 사항은 말하기에도, 듣기에도 힘들거니와 격려와 축하라는 본래의 목적에도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구체화한 마음은 부적절하거나 초라합니다.
제 대학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었습니다. 똑똑하면서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주위 수많은 친구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잘 쉬고 돌아오라던 어느 은사님의 말씀이, 듬성듬성해진 성적표 위에서 아직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지금 듣고 계신 분들도 정도의 차이와 방향의 다름이 있을지언정 지난 몇 년간 본질적으로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더 큰 도전,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끝은 있지만 잘 보이진 않는 매일의 반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힘들 수도, 생각만큼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거부하라. 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진짜 꿈을 좇아라. 모두 좋은 조언이고 사회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유용한 말입니다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음을 여러분은 이미 고민해 봤습니다.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 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오래전의 제가 졸업식에 왔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고민했습니다만 생각을 매듭짓지 못했습니다. 그가 경험하게 될 날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가슴 먹먹하게 부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선물할 어떤 축사를 떠올리셨을지 궁금합니다.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한 여러 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 오늘같이 특별한 날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하니 들뜬 마음에 모든 시도가 소중해 보입니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졸업생 여러분, 오래 준비한 완성을 축하하고,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1.
한국계 최초로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님이 얼마 전 서울대학교 학위수여식에서 축사를 했다. 졸업한 지 어언 2년이 넘었지만, 축사를 듣고 내가 현장에서 듣고 있는 졸업생인 것 마냥 울림을 느꼈다.
"구체화한 마음은 부적절하거나 초라합니다."
허준이 교수님이 이번 축사를 대하는 태도를 함축한 말인 것 같다. 구체화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쓰인 걸 많이 보진 못해서 계속 곱씹게 되었다. 아마도 허준이 교수님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을 지적한 것 같다. 수학에서 무모순성이 중요하듯, 상황에 맞는 자연스러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졸업하는 대학생들 앞에서는 본인의 경험과 생각만을 전하는 것보다 그저 격려와 축하를 해주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느끼셨던 것 같다. 사실 아는 게 많을수록 말을 많이 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실없는 말을 남기게 되는데, 교수님의 위치에서 이런 겸손한 자세가 가능하다는 게 참 존경스럽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대학 생활 동안 이것저것 경험해 보고 또 앞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만, 졸업하기 전까지 어른이 되긴 짧은 시간인 것 같다. 이처럼 미성숙한 이들에게 허준이 교수님은 '걱정 마, 하면 돼.'식의 클리셰를 남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들의 경험을 존중함과 동시에, 앞으로 더욱더 힘든 일이 있을 거라는 씁쓸한 현실도 알려준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 속에서 해왔던 고민과 질문을 잊어선 안된다고 당부한다. 어떻게 살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오래된 질문을 하루하루 답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허준이 교수님은 학생들을 응원하고, 축하해 준다.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당근과 채찍이 없고, 여느 유명한 강연처럼 유머러스하지도 않은 축사였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겸손하고, 또 학생 입장에서 깊이 고민하여 썼다는 게 느껴져서 정말 와닿은 축사였다!
#2.
"Work hard, be kind, and amazing things will happen!"
'축사'하면 코난 오브라이언의 2011년 다트머스 졸업식 축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여름방학 계절학기로 대학영어를 수강했는데, 당시 교수님께서 강의의 일환으로 이 축사 영상을 보여주셨다. 아직 졸업하려면 좀 남은 대학생이었지만, 축사가 꽤 인상 깊었다. 당시 네이버 블로그를 막 시작할 단계였는데 얼마나 축사가 뇌리에 박혔는지 프로필에 위 문장을 적어두었고, 저 문장은 아직도 내 블로그를 장식하고 있다. 재밌게도 브런치를 시작하는 지금, 또 한 번의 레전드 축사와 함께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막힌 우연에 괜히 마음이 들떴다. 괜한 의미 부여인 것 같긴 해도, 이런 것들이 동기부여가 된다 :)
두 축사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다 보면 나를 가로막는 것들은 필연적으로 찾아오지만 이 가운데서도 나 자신을 잃지 말고 나아가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한 줄로 쓰고 보니 너무 뻔한 말이 되는 것 같아 웃음이 난다. 그치만 뻔한만큼 중요한 말이기에 다시금 마음 속에 새겨본다!
#3.
"건강한 마음으로 꾸준히 즐겁게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필즈상 발표 이후 허준이 교수님의 인터뷰를 엄청 많이 보았다. 허준이 교수님 개인적으로도 평소와 다른 몇 달을 보냈다고 하는데, 일반인 입장에서는 이렇게 대외적으로 많은 얘기를 들려주셔서 고마울 따름이다! 인터뷰는 축사보다 덜 정제됐지만, 그만큼 더 솔직하고 와닿는 내용도 많았다. 문장 하나하나 가져오고 싶지만,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아쉽게 링크만 가져와 본다. 관심 있는 분들은 꼭, 꼭 읽어보시길!
P.S.
나는 코로나로 인해 졸업식에 참여를 못했다. 특수상황이었기에 학교에서 나 같은 학생을 대상으로 이번 행사에 참석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이미 2년이 지났는데 학위수여식이 무슨 소용이냐며 문자를 보자마자 무시해 버렸다. 당시에는 허준이 교수님이 누군지도 몰랐으니 뭐.. 그냥 아쉬운 에피소드로 남겨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