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베고스 포도밭
"뭐라고요?"
"방금 말했지 않는가, 와이너리가 3주간 휴가 시즌이니 쉬고 오라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계속 일을 하지 못하면 한국으로 가야 할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요."
"그건 알지만..."
파비앙(Fabien)은 잠시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래도 자네에게 일을 줄 수 없는 상황이네. 찾아보면 아르바이트라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걸세."
곤란한 상황에 처할까 봐서인지 파비앙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린다. 망할 놈들. 내가 지금껏 버틴 게 무엇 때문이었나. 9월 때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제없다더니... 눈앞이 깜깜해왔다. 안 그래도 먹구름으로 어두워진 하늘을 까마귀 떼가 뒤덮어 완전히 검게 물들여버렸다. 뒤숭숭한 마음으로 짐차에 몸을 싣고 뒤이어 출근한 플로랑스(Florence)와 아메드(Ahmed), 디디에(Didier)와 몇몇 세조니에(Saisonnier; 계절직 근로자)들과 인사를 나눈다. 다른 날들과 다름없는 똑같은 업무를 하지만 머릿속은 복잡해졌고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3주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아낄 수 있을까. 그리고서 다시 일을 시작한다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지금까지도 힘들었는데... 더는 못할 것 같은데 이대로 한국으로 들어가 버릴까. 일하는 내내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자, 30분간 점심시간!"
포도밭 1팀장 디디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내 귓속을 파고든다. 오늘도 점심은 같은 메뉴다. 허여멀건 빵 위에 마요네즈를 바르고 그 위에 칠면조 고기 슬라이스 2장, 그리고 토마토를 잘라 넣고 염소젖 치즈 슬라이스 두 장을 올린 뒤 마요네즈를 다시 바르고 빵으로 덮은 샌드위치와 감자칩, 그리고 콜라. 기껏해야 2유로 될까 말까 한 점심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전자레인지조차 없는 포도밭 한가운데서 점심을 해결해야 하니 따뜻한 음식은 꿈에도 못 꾼다.
"무슨 일이야? 표정이 너무 안 좋은데?"
오전 내내 날 유심히 보던 디디에가 말을 건넨다.
"아 그게... 아까 파비앙과 얘기를 했는데 3주 동안 휴가를 가야 한다고 내가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네요..."
"그게 무슨 문제라고. 3주 동안 푹 쉬다 와서 또 일하면 되지!"
"모아둔 돈을 다 써서 3주 동안 일을 못하면 양조도 못하고 한국에 돌아가야 할 수도 있어요. 여기 남고 싶은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었다는 듯 디디에의 얼굴은 심각해지더니 이내 형식적인 '잘될 거야'라는 말만 남긴 채 황급히 자리를 떴다. 오늘따라 차가운 샌드위치가 목을 더 메어오고 소화도 되지 않아 애꿎은 트림만 계속 내뱉어댄다. 짧은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작업이 시작되었다. 먹구름으로 뒤덮여있던 하늘에서는 내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먼 밭에서 일하던 팀원들은 헐레벌떡 차로 돌아와 장화를 신고 우의를 입고서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밭일을 이어간다. 비가 내려서 그런가 내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서 그런가 팀원들은 내게 이야기를 걸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조용하게, 모자를 때려대는 빗소리만 들으며 작업을 해나간다.
2시 반에 업무가 끝났지만 갈 곳 없이 사무실에 앉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본다. 바캉스 시즌이라 버스가 4시 20분에나 온다. 한국에서 보내온 김연수 작가의 '밤은 노래한다' 책을 펼쳤지만 복잡해진 머릿속에 글자가 들어올 리 만무했다. 내 사정을 봐주지 않는 프랑스에 분노하다가 이런 상황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나 자신을 원망하다가 다시 돌아갈 일에 걱정하며 시간이 흘러갔다. 다행히 소낙비는 금세 그쳤고 거의 2시간이나 걸려 돌아온 집에는 늙어 눈이 보이지 않는 검은 고양이 벨사(beltza; 바스크어로 검은색)가 날 맞아주었다.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그래 너구나'라며 다리 사이를 지나다니며 냄새를 뭍히고 선 유유히 사라진다. 여섯시 반... 언제나처럼 아래층 내 방으로 내려가기 전, 거실에 짐을 두고 일하던 복장 그대로 주방으로 들어간다. 높은 찬장에 올려둔 시리얼을 꺼내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테라스로 나간다. 의자에 묻은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서 멍하니 허공을 보며 천천히 떠먹기 시작한다. 하루가 이렇게 길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방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한 발 한 발이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 간단하게 샤워를 끝낸 뒤 언제든 고장 날 준비가 된 6년도 더 된 맥북을 켠다. 머리가 복잡하지만 지금은 뭐라도 해야 했다. 얼마 되지 않는 원고료라도 벌어야 한다. 적어도 3주간 일을 안 하면서 학자금 이자 25만 원 정도는 한국에서 들어오는 원고료로 해결을 해야 한다.
자판 소리만 타닥타닥 빈 방을 채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