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르도농부 Oct 18. 2021

1월, 보르도

'툭... 투두둑... 투둑...'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일어나 누가 봐도 어설프게 떡칠을 해 굳어있는 페인트가 여기저기 묻어있는 문고리를 돌려 창문을 열었다. 벌써 며칠째 해는 어디 가고 망할 놈의 비만 계속 내리고 있다. 모두가 출근한 뒤 적당히 늦은 아침 거리엔 가끔씩 차들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뿐 사람 모습이라고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


어제 퍼마신 술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주방으로 향했다. 계란 스크램블을 하고 소시지를 굽고 야채를 볶은 뒤 커피를 내렸다. '먹고는 살아야지...' 포크질을 몇 번 하다가 속만 더부룩해져 이내 내려놓는다. 바로 앉았다가는 체할 것 같아 근처에 있는 갸혼(Garonne)[1] 강변이라도 잠깐 걸을까 우산을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 계속 가슴을 옥죄어오는 게 조금 전에 먹은 아침이 얹힌 건지 우울한 날씨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조금도 진전이 없는 이 상황 때문인 건지 모르겠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랩탑을 켜고 부동산 사이트를 들어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나 기웃거려 본다. 모든 게 잘 풀릴 줄 알았다. 그렇다기보다는 별다른 생각이 없이 온 게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그저 2년 동안 주말마다 배운 프랑스어를 못 써먹은 게 안타까웠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게 딱 나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3년간 다닌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서른 살을 꽉 채운 나이에 워킹 홀리데이로 프랑스에 왔다. 주변에서 준비를 많이 하고 가야 된다는 말에도 가보면 되겠지 하고 무작정 떠나왔다. 1년을 채우고 돌아가겠다며 양손에 다 쥐어지지도 않을 짐들을 싸 들고 왔다. 캐리어 2개, 여행용 더플백 1개, 배낭 1개, 그리고 궁하면 쓸까 싶어 바이올린까지 가져왔다. 생전 처음 밟아보는 프랑스 땅은 모든 게 낯설었다. 짐은 그렇게나 많이 낑낑대며 가져왔는데 4층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이 사람만 겨우 지나다닐 것 같이 좁은 계단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누가 들어와서 훔쳐 갈까 한 층씩 뛰어다니며 물건을 전부 나르는 새 땀은 비 오듯 쏟아졌다. 여전히 열쇠로 문을 열어야 했고 안에서는 어떻게 잠그는지도 몰라 한참을 당황했다. 방으로 돌아온 뒤 녹초가 되어 샤워만 하고 잠에 들어버렸다.


며칠이 지났지만 집을 구하는 건 여전히 녹록지 않았다. 한국에서 딱 한 번 자취방을 구해봤을 때처럼 무작정 부동산을 찾아갔다. 내가 얼마만큼의 월급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집을 구하려니 예산이 적었다. 몇 군데 발품을 팔다 보니 마음에 드는 방을 찾아냈다. 사이즈는 그리 크진 않았지만 세탁기까지 있는 방이었고 결정적으로 작은 발코니가 있어 바비큐 파티하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당장에 계약하려고 하자 부동산 측에서 필요 서류를 가져오라고 종이를 쥐여주었다. 6가지 서류가 필요한데 그중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전에 살던 집의 3개월치 전기료 납부 증명 서류였다. 물론 '프랑스 현지에서 살았던 집'의 서류가 필요했다. 처음 집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미 살고 있었어야 했다. 게다가 또 다른 필요 서류는 프랑스 은행 계좌였다. 프랑스 은행 계좌를 열려고 찾아가 보면 근로계약서와 프랑스 거주 증명서가 필요했다. 일자리를 찾으려 해도 프랑스 계좌와 거주 증명서가 필요했다. 아무 기반도 없이 프랑스로 오는 외국인은 끊어낼 수 없는 고리였다. '보증인'이라는 해결책이 있었지만 이름에서부터 느낌이 오지 않는가? '보증'이라니!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회사 다닐 때 거래처 담당자)이 있어 부탁했지만 난색을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프랑스인 부모님도 자식의 보증인을 거절할 때가 있다고 한다.


소득 없이 시간은 흘러 벌써 목요일이 지났다. 마음이 그리도 급했던 이유는 토요일부터 3주간 보르도를 떠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와인 수입사 마케터로 일을 하며 와인 기자 생활도 병행했었다. 마침 알고 지내던 소믈리에 분이 2월에 열리는 행사[2]는 꼭 한번 참석해 보라고 알려줬었다. 처음엔 근자감으로 1주일 만에 집을 구하고 짐을 두고서 가볍게 행사를 다녀오리라 계획했던 터였다. 어림도 없지. 그 많은 짐을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소매치기한테 다 털릴 상황에 놓이게 생겼다. 여행을 간다면 하루빨리 기차표와 에어비엔비 숙소를 예매해 둬야 했다. 특히 행사가 열리다 보니 시내의 저렴한 숙소들은 게 눈 감추듯 없어지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는 보르도에 남아 숙소를 계속 구해봐야겠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에 생각보다 일찍 지쳐버렸다. 잠시라도 이곳을 떠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며칠 묵은 에어비엔비 호스트에게 연락을 해봤지만 바로 다음에 손님이 오기 때문에 보관을 해줄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보르도 역사에 있는 짐 보관소도 찾아봤지만 3주 동안 맡길 정도면 방을 구해서 짐을 두고 가는 게 나을 정도로 비쌌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힘겹게 핸드폰을 들고 카톡을 켰다.


'안녕하세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며칠 짐을 맡길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 프랑스로 올 때 보르도에서 와인 공부하신다는 분의 연락처를 하나 받아왔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막무가내로 요청할 만큼의 용기는 없었지만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곤란하다고 하면 여행을 깔끔하게 포기하자라는 심정으로 조심스레 연락했다. 마음 졸이며 무슨 대답이 오더라도 실망하지 말자며 일부러 핸드폰을 멀리 두고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우웅하고 진동음이 조용한 방을 울린다.


'네 괜찮아요. 맡아드릴게요.'


한고비는 다행히 잘 넘기게 되었다. 감사의 표시로 와인이라도 선물할까 싶어 한달음에 까르푸로 달려갔다. 와인을 오래 했지만 역시나 이럴 때 선택하는 건 안전하게 먹어보고 검증이 된 아는 와인이었다. 5년 전쯤, 와인샵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꼬꼬마 시절에 같이 일하던 이사님께서 사비를 털어 사주셨던 와인이었다. 그랑 크뤼같이 높은 등급은 아니었지만 품질이 뛰어난 샤또 오-마흐뷔제(Château Haut-Marbuzet) 와인이었다. 


[1] 갸혼 강은 보르도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이다. 지롱드(Gironde)라는 바다에서 들어오는 강에서 갈라진 줄기로 보르도를 동쪽과 서쪽으로 나눈다. 과거에는 지롱드를 통해 영국 등지로 와인 무역을 활발하게 하던 강이었다.

[2] 내추럴 와인 행사인 ‘라 디브 부떼이(La Dive Bouteille)’와 와인 전시회인 ‘루아르 와인 살롱(Salon des Vins de Loire)’을 말한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7월 어느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