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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르도농부 Nov 14. 2021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도착한 어느 프랑스 마을

뤽(Luc)과 지주(Gizou)

'역에서 나와서 직진하다가 세 번째 신호등에서 우회전. 그리고 두 번째 신호등에서 다시 좌회전.'


어두운 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불빛을 보며 여전히 이방인이었던 나는 평범해 보이는 노인의 미소 속에 무슨 꿍꿍이라도 숨겨놓았을까 봐서 처음 뤽(Luc)을 만나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의미 없이 길을 외우려 애썼다. 가방을 잔뜩 끌어안고 긴장한 나를 흘낏 쳐다보던 뤽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걸어왔다.


"그래 앙제(Angers)[1]로 오는 길은 어땠나?"

"아.. 복잡했어요. 오다가 세 번은 멈춘 것 같아요. 눈 때문인지..."

"망할 놈의 SNCF(프랑스 국영 철도; Société Nationale des Chemins de fer Français)! 매번 지연되지 쯧쯧. 다니엘이라고 했나? 우리가 SNCF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 프랑스 국영 재난 기관(Source Nationale de Catastrophes Ferroviaires)이라고 하네 허허허"


아재 개그를 치는 뤽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리고 길 외우는 것 따윈 잊어버린 채 말을 이어나갔다. 와인 행사 때문에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하니 다행히 와인을 좋아하는 할아버지인 뤽은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은 수십 병씩 항상 집에 보관해둔다며 신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지역 와인들은 좀 마셔봤나?"

"많이 마셔보진 않았어요. 로제 와인이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궁금하긴 해요."


사실 한국에 있을 때 '루아르(Loire)'라는 말을 들으면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2]이라는 화이트 와인 품종 정도만 들었었다. 그리고 와인 공부를 할 때 다른 것보다도 로제 와인이 다양하게 나는 곳이라 막연하게 로제 와인이 유명한 곳이구나 했었다.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뤽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로제 말고 레드 와인이 맛있다네. 내가 좋아한다는 와인을 집에 가져다 뒀으니 언제 한번 같이 마셔보지"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고 그저 고맙다며 흘려버렸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집 앞에 도착했다. 주차를 하고 들어갈 테니 먼저 들어가라며 뒷자리에 실어둔 짐을 내려줬다. 차가 쌩쌩 달리는 4차선 왕복 도로 옆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곳에 희미하게 빛을 내는 가로등 사이로 하얗게 페인트칠해진 2층 집들이 몇 채 늘어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풀어진 긴장감은 다시 다리에서부터 목으로 타고 올라왔다. 약간의 긴장을 하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제일 먼저 한쪽 눈이 불편한 뱅갈 고양이와 꼬리를 힘차게 흔들어주는 요크셔테리어가 맞아주었다. 집은 아늑했다.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으로 가족이 사용하는 주방이 있었고 왼쪽으로는 식사를 하는 큰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테이블을 지나 더 안쪽으로는 거실과 방들이 있었다. 층고는 높은 편이었고 금세 따라들어온 뤽의 안내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좁은 공간에 회전 형태의 계단을 짐을 들고 힘겹게 올라가 보니 양쪽으로 방 두 개가 있었고 그 가운데 공용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었다. 뤽은 그중 미리 준비해둔 왼쪽 방으로 안내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약간은 촌스러운 붉은색의 이불이 깔려있는 침대가 놓여있었고 발아래쪽으로 좁은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었다. 한쪽 벽으로는 작은 1인용 소파가, 반대편으로 창문이 나있는 방이었다. 에어비엔비를 하겠다고 예쁘게 꾸며 놓은 느낌보다는, 자식이 다시 왔을 때를 위해 잘 정비해둔 방의 모습이었다. 자식들이 전부 집을 떠나 에어비엔비 방을 놓게 되었다고 한다. 짐 정리를 하고 내려가자 아내 지주(Gizou)가 장을 보고 들어와있던 참이었다. 갈색 머리가 퍽 잘 어울리는 할머니로 작고 왜소하며 수줍음이 많은 듯 말을 잘 건네진 않던 분이었다.


진작에 도착해 짐을 풀고 있었어야 했지만 망할 눈 때문에 시계는 벌써 일곱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와인샵이 닫기까지 30분 정도 밖에 안 남아[3]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직 잘 모르는 동네였으므로 와인으로 알아가보자는 마음으로 뛰쳐나갔다. 눈은 언제인지 비로 바뀌어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우산도 없이 모자를 뒤집어쓰고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샵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문 닫기 직전에 '레 꺄브 뒤 뤼땅(Les Caves du Lutin)'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젊은 남자 점원이 벌떡 일어나 반갑게 맞아준다. 잠시 둘러보겠다고 말을 하고 가게를 둘러보니 숙소 근처에 있어 급하게 온 곳 치고는 꽤나 큰 곳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왼쪽으로 몇 가지 치즈가 놓여있었고 지역 와인뿐만 아니라 부르고뉴와 보르도, 샹파뉴 등 유명 지역의 와인들도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프랑스 수제 맥주와 각종 스피릿들이 놓여있었다. 쓱 하고 한 바퀴 둘러본 뒤 마감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점원에게 말을 걸었다.


"저... 추천을 좀 받을까 하는데요."

"어떤 와인을 추천해드릴까요?"

"제가 사실 이 동네는 처음인데 이 지역의 특징이 가장 잘 담긴 와인들을 추천해 줄 수 있을까요?"


지역 와인을 추천해달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점원은 카운터에서 나오더니 크게 붙어 있는 와인 지도로 향하더니 즉석 강의를 시작했다. 앙제라는 마을이 있는 곳은 와인 생산 지역 구분으로는 앙주-소뮈르(Anjou-Saumur)[4]라는 곳에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슈낭 블랑(Chenin Blanc)이라는 백포도로 만드는 화이트 와인과 까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5]이라는 적포도 품종으로 만드는 레드 와인이 유명하다고 한다. 그러고 소개해 주는 대표적인 화이트 와인이 앙주, 소뮈르, 사브니에르(Savenièrres)라는 아펠라씨옹이었고 레드 와인으로는 앙주 빌라주 브리싹(Anjou Villages Brissac)과 소뮈르 샹피니(Saumur Champigny)[6]라는 와인이었다.


"어떤 걸 드려볼까요?"

"음... 말씀해 주신 게 다 궁금하긴 한데... 당신이 좋아하는 와인들을 몇 가지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이 말에 신난 점원이 화이트 와인 6가지와 레드 와인 6가지를 단숨에 골라와 카운터에 늘어놨다. 그리곤 하나하나 어떤 와이너리에서 어떻게 만든 와인인지를 열변을 토하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마감시간을 조금 지나서까지 와인을 고를 수 있었고 화이트 와인 세병과 레드 와인 두병을 골라 나올 수 있었다.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란다는 점원과 악수로 인사를 나누고 샵을 나섰다. 배가 조금 출출해왔지만 와인바까지 가기에는 거리가 있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많은 지출 탓에 조금 망설여졌다. 오면서 본 케밥집이 생각이 나 그곳에서 음식을 포장해 숙소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오자 마침 식사를 마친 뤽가 지주가 밥은 먹었냐고 묻기에 사 온 케밥 봉투를 보여줬다. 그리고 와인샵에 다녀왔다는 내 얘기에 뤽은 관심을 가졌다. 내가 들은 이야기를 신나게 하고선 사 온 와인도 보여주고선 오늘 한 병 마시려 한다고 했더니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어디로 휙 사라져버렸다. 오늘 마실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바로 냉장고에 넣고 케밥을 식탁에 두고서 나머지 와인을 방에 올려두고 내려왔다.


아침부터 쉽지 않은 여정에 녹초가 되었고 끼니라고는 기차에서 먹은 햄버거라고도 부르기 힘든, 고기와 빵, 치즈 덩어리가 동그랗게 뭉쳐있는 즉석식품의 맛이 나는 제품이 전부였다. 몽펠리에(Montpellier)[7]를 떠나 파리로 가던 열차는 리옹(Lyon)[8] 역에서 생각보다 길게 정차하더니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한참 동안 방송이 흘러나왔었다. 한참을 집중하다 보니 '지금 당장 열차에서 내려...'라는 문장이 귓전을 때렸었다. 주변에 앉은 승객들에게 물어보니 열차 목적지가 변경되었으니 이곳에서 내려 다른 열차로 갈아타야 한다고 했다. 역무원들의 도움을 받아 열차표를 바꿔 앙제 역으로 향했지만 유난히 많은 눈이 내린 날, 열차는 가는 도중에 3번이나 멈춰 섰다. 그 사이 뤽과 만나기로 한 시간은 다가만 왔고 전화로 세 번이나 시간을 미뤘었다. 유명하다지만 처음 겪는 SNCF의 만행에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밀어 넣는 케밥은 꿀맛 같았다.


케밥은 유일하게 밖에서 자주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감자튀김과 콜라까지 콤보로 사도 10유로가 넘지 않는 그야말로 서민을 위한 음식이었다. 부드러운 빵에 결결이 얇게 썬 고기와 야채를 넣고 가끔은 감자튀김도 함께 넣고 애정하는 알제리엔(Algérienne) 소스를 듬뿍 뿌려 먹으면 훌륭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한 끼에 아무리 저렴해도 15-20유로가 넘는 외식 물가를 생각해 본다면 구원자 같은 존재이다. 맥도날드나 버거킹 같은 햄버거 체인점들이 있었지만 비싸고 왠지 모르게 한국에서 먹던 그 맛이 나지 않고 배도 차지 않는 기분이라 자주 찾지는 않았다. 그렇게 행복하게 한 입을 베어 물고 있을 때 뤽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 앞으로 다가와 정체불명의 와인 한 병을 테이블에 무심하게 '툭' 하고 놓았다.


"아까 말했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이네. 마셔보게나 젊은 친구여."


뤽이 건네준 와인은 '앙주 후즈(Anjou Rouge)'[9]라는 낯선 이름이 적혀있었다. 지렛대도 없는, 한눈에 봐도 오래된 T자형 와인 오프너를 끼익 대는 소리와 함께 코르크에 돌려 넣더니 촌스러운 '퐁' 소리와 함께 단번에 따버린다. 부엌에서 꺼낸 작은 잔까지 가져와서 한 잔 따라주고 내게 빨리 마셔보라고 하는 그 눈빛에서 와인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묵직하기보다는 다소 가벼운 편이었고 그러면서도 타닌이 느껴지는, 어떤 식사에 곁들이더라도 잘 어울리는, 편하게 마시기 좋은 와인이었다. 다른 에어비엔비였다면 '이 와인을 마시려면 추가로 5유로를 더 내야 해'라고 했을 테지만 사람 좋은 뤽은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을 같이 공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며 맛있게 먹으라는 말만 남기고 떠나려 했다. 내가 오늘 사 온 와인도 한 병 따서 같이 마시자고 했더니 자신과 지주는 이제 곧 자야 한다며 다음에 함께 마시자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한테 주기 위해서 그렇게 급하게 다녀왔나 생각이 들어 잠시 얼이 빠져있었다. 프랑스에 온 지는 3주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절망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워킹 홀리데이라는 프로그램은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무작정 온 내게 그리 호락호락하게 모든 걸 내어주지 않았다. 여태까지 색안경으로 본 프랑스인들은 겉으로는 친절했지만 막상 도움이 필요할 때는 손을 털어버리는 매정한 이들이었다. 그렇게 좋지 않은 감정만 쌓아오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던 동네로 와 시골집 같은 곳에서 마음씨 좋은 노부부를 만나 처음으로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뤽이 준 와인도 비싸지 않은, 단순한 이 지역의 레드 와인이었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와인이었다. 1월의 마지막 날, 눈이 많이 내리고 추운 하루를 보냈지만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아직도 집과 일자리 등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많았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 잊어버릴 수 있었다.


[1] 프랑스 루아르 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의 이름.

[2] 포도 품종의 이름으로 프랑스에서는 보르도(Bordeaux), 루아르 그리고 타지역으로는 뉴질랜드에서 만드는 화이트 와인이 유명하다. 산도가 높고 깔끔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3] 프랑스에서 대부분 상점은 8시 이전에 닫는다.

[4] 루아르 안에 앙주-소뮈르라는 생산지역이 속한다.

[5] 포도 품종 이름

[6] 모두 와인 생산지역(아펠라씨옹(appellation)) 이름으로 앙주-소뮈르 안에 속해있는 마을의 이름들이다.

[7] 남프랑스의 마을 이름. 앙제에 오기 전 밀레짐 비오(Millésime Bio)라는 와인 행사에 참석하게 위해 머물렀다.

[8] 프랑스 중동부에 있는 지역으로 미식의 도시이다.

[9] 앙주 레드 와인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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