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제(Angers), 포근했던 북부의 작은 마을
오랜만에 온기를 느낀 탓인지 조금 늦은 시간에 따스한 햇살에 눈이 떠졌다. 넓진 않지만 푹신푹신하고 포근한 침대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뒹굴거리다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어 찬 바람으로 세수했다. 무작정 떠난 여행으로 조금은 마음이 편해져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불안한 감정이 많이 씻겨나갔다. 조급하게 생각해 봤자 바뀔 것은 없었고 지금 당장은 그저 조금이라도 더 돌아다니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자는 심정이었다. 덕분에 아침에 가볍게 일어나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창가에 걸터앉아 맑은 하늘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이내 앙제의 차가운 바람에 몸이 떨릴 때쯤 창문을 닫고 방문을 나섰다. 2층에서 1층으로 연결된 빨간색 카펫이 깔린 좁은 계단으로 빙글빙글 아침을 먹으러 내려와 보니 뤽(Luc)과 지주(Gizou)가 외출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 인사를 나누고 주방으로 가보니 지주가 가볍게 차려준 아침이 놓여있었다. 마트에서 사 둔 딱딱한 비스킷 같은 과자와 3가지 잼, 그리고 버터, 주스, 마지막으로 따뜻한 커피가 놓여있었다. 급한 일이 있어 먼저 나가니 아침 잘 챙겨 먹으라는 말을 남기고 문을 나선다.
"아 비앙또(À bientôt)!"
활기차게 인사를 하고 뤽과 지주가 나간 집을 가볍게 돌며 들어오는 햇살을 잠깐 쐬다가 자리에 앉았다. 따뜻한 커피를 호록하고 마셨다. 여전히 프렌치 프레스로 내린 시큼하기 그지없는 커피가 낯설지만 비스킷에 버터를 바르고 잼을 올려 배어 무니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한창 입안에 비스킷을 밀어 넣다가 문득 다리가 간지러워 아래를 보니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언제 왔는지 요크셔테리어가 자리를 잡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늦은 아침에도 사람이 있어 좋은지 다리 주위를 서성이며 계속 치근댄다. 줄 수 있는 음식이 없어 잠깐 놀아주다 아침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식사가 거의 끝날 즈음 뱅갈 고양이가 무심한 듯 나를 한번 스윽 쳐다보더니 그대로 다시 사라진다. 집에 있을 피트 생각이 나서 어머니께 사진 몇 장 찍어달라고 부탁드렸다. 뱅갈 고양이가 원래 그런 건지 말썽을 많이 부려서 이것저것 깨고 깨물고 할퀴고 마냥 이쁘진 않다고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렇게 떨어져 있고 비슷한 아이를 보니 또 괜스레 보고 싶어졌다.
비스킷을 다 먹고서는 잠깐 바깥공기를 쐴 겸 패딩을 둘러 입고 밖으로 나섰다. 뒷마당을 잠깐 걸으려고 나와보니 어제 눈비가 내렸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날이 쨍하고 좋았다. 와인 행사가 시작하는 이틀 뒤까지는 숙소에서 이력서라도 다듬어볼까 했는데 하루 정도는 앙제(Anger)라는 도시를 둘러보자는 마음이 일어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는, 가을에 볼 수 있던 그런 파란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행은 언제나 마냥 좋았다. 어떤 문제든 머리 아픈 일이 있더라도 새로운 공간에 놓이는 순간 내 앞에 보이는 것들에 시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고 머릿속 복잡한 일들은 모두 잊어버릴 수 있었다. 지도를 켜고 멜 가든(Jardin du Mail), 보자르 미술관(Musée des Beaux-Arts), 앙제 생-모리스 대성당(Cathédrale Saint-Maurice d'Angers) 등 유명한 곳들을 거쳐 닥치는 대로 걷다 보니 도시의 이름을 딴 9세기에 지어진 요새, '샤또 당제(Château d'Angers)'앞에 도착했다. 처음 '그것'을 봤을 때는 참 괴이하다 느꼈다. 발로 찌그러트린 캔처럼 눌려있는 느낌이었고 직선과 곡선이 공존하는 외관에 시커먼 반점 같은 것들이 있어 화재에 그을린 것 같은 인상을 줬다. 겉모습에 압도되어 망설이는 사이 옆으로 '앙주 와인 협회(Maison du Vin de l'Anjou)'이라는 반가운 글씨가 써져있는 작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인사말을 건네더니 의외의 사람이 찾아왔다는 듯 잠시간의 침묵이 공간을 채웠다. 잠시 둘러봤는데 공간은 작고 별거 없는 곳이었다. 기념품과 약간의 와인을 팔고 있는, 이렇게만 보면 굳이 시간을 내서 방문하고 싶지 않은 와인샵 같았다.
"와인 테이스팅 해보시겠어요?"
실망한 표정 가득 슥 둘러보고 나가려던 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테이스팅도 할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되죠?"
"여기 우리 협회에서 제공하는 와인 리스트가 있어요. 여기에서 총 9가지까지 할 수 있어요."
"9가지요? 저 혼자 9가지 테이스팅을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처음 실망스러운 표정을 했던 내가 민망해질 정도로 파격적이었는데 무료로 9가지 와인을 테이스팅 해볼 수 있는 것이었다. 더 놀라웠던 것은 총 28가지의 아펠라씨옹(appellation)[1]에 61개 와인이 리스트에 있었다. 그중에 안 되는 것도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와인바만큼이나 많은 리스트였다. 처음 앙주 지역의 스파클링 와인을 골랐고 슈낭 블랑(Chenin Blanc) 품종[2]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인 사브니에르(Savennières), 까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품종[3]으로 만든 레드 와인인 앙주 빌라주 브리삭(Anjou Villages Brissac)을 골랐다. 그 뒤로 같은 품종으로 만든 레드 와인인 소뮈르 샹피니(Saumur Champigny)와 달콤한 디저트 와인 꼬또 드 로방스(Coteaux de l’Aubance), 꼬또 뒤 레이용(Coteaux du Layon)[4] 와인을 차례대로 골랐다. 이 지역을 더 알고 싶어 전날 여러 가지 와인을 사긴 했지만 마음씨 좋은 뤽 덕분에 아직 맛도 못 본 상태였다. 거기다 하루에 한 병 정도를 먹는다면 매일 마시더라도 이 지역을 알기 위해서는 한 달은 걸리지 않을까? 앙주 와인 협회에서의 테이스팅은 한순간에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지게 해주었다. 와인 공부를 했음에도 처음 들어본 지역에 와서 낯선 와인들을 입에 가져갔지만 정말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화이트 와인은 감귤이나 복숭아를 씹어먹는 것처럼 화사했고 레드 와인은 어젯밤 처음 경험한 와인보다도 더 파워풀하게 느껴졌다. 달콤한 와인을 그렇게 즐기지 않았지만 두 가지 디저트 와인은 기분 좋은 산도가 상큼하게 느껴지면서도 과하지 않고 적당한 달콤함이 딱 좋았다. 6가지를 테이스팅 했고 3가지를 더 할 수는 있었지만 이 정도면 적당하다고 손을 내저었다. 정확하게 테이스팅을 하려면 삼키지 말고 뱉어가며 해야 했지만[5] 여행 중이었고 처음 경험하는 즐거움을 뱉어내고 싶지 않아 전부 목으로 넘겨버렸다. 뜻하지 못한, 선물 같은 경험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기념품 한두 가지를 사서 건물을 나섰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것도 좋겠다.'
여행으로 복잡한 것들을 잊으려 해도 어디를 가나 항상 이런 생각이 앞선다. 이력서를 완성하면 이곳에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샤또 당제로 향했다. 입장 표를 사고 들어가 본 안쪽의 모습은 내 첫인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들어서자마자 관광객들을 맞는 곳에는 깨끗하게 정돈된 정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깔끔하게 잘려 나간 잔디 위로 독특한 모양의 풀로 만들어진 문이 하나의 정방형 구획을 만들고 그런 구획이 6개가 줄을 맞춰 나란히 조성되어 있었다. 녹색과 갈색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정원이었지만 평온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정원을 따라 걷다 보니 오른쪽으로 동화에나 나올 법한 작은 성 같은 건물이 보였다. 작은 버전의 백설 공주의 성 같은 느낌의 건물에 난 문을 지나고 보니 성스러운 예배당 건물에서 샤또 당제의 역사에 대한 상설 전시를 볼 수 있었다.
성의 건축은 1230년부터 시작되고 처음에는 더 큰 규모였지만 요새의 목적을 띠며 더 작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14세기에서 15세기 동안 앙주의 공작들이 이곳에 거주했는데 이 돈 많은, 프랑스 국왕의 내밀한 친우들은 요새를 계속해서 예술적으로 바꾸어놓았다고 한다. 아직 프랑스어에 많이 익숙해지기 전이라 그 많은 글을 읽기엔 무리였다. 예배당 건물에서 나와 걷다 보니 처음 두렵게만 느껴졌던 성곽에 다다랐다. 성곽길로 걷고 있었는데 뜬금없는 곳에 아담한 규모의 포도밭이 나타났다. 아직도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영 버려져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앞쪽에 팻말이 하나 서 있었고 프랑스어와 영어, 독일어로 글이 쓰여있었다.
'이 140그루의 슈낭 블랑 품종의 포도나무는 흐네(René) 왕이 포도밭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장미나무는 조기 경보 시스템 역할을 했다. 정원사에게 포도밭 전체의 건강 상태를 알려준다.'
한참 나중에 다른 와이너리 투어를 하던 중 알게 된 사실이지만 포도밭의 양쪽 끝에 장미를 키우는 것이 질병에 대한 경보 장치를 해준다. 포도나무보다 더 연약하고 민감한 장미는 곰팡이나 부패 등의 질병에 포도나무보다 먼저 감염이 되고 이를 보고 포도 재배자들은 포도나무를 구하기 위해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성곽길에 이렇게 조성되어 있는 포도밭을 보니 신기하기도 했고 혹시나 이 포도밭에서 재배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 있다면 기념품샵에서 꼭 사 가야지 생각을 했다. 맛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얼마나 신기한 와인일까! 성 안에 조성된 포도밭에서 만들어진 와인이라니, 그것도 성의 이름인 '샤또 당제' 이름의 와인이라니. 와인이 아닌 도시를 둘러보기 위한 여행을 시작했지만 계속 눈에 밟히는 와인 덕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계속해서 걷다 보니 도시를 가로지르는 멘(Maine) 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앙제라는 마을이 있는 루아르 지역은 같은 이름의 프랑스에서 가장 큰 강 유역으로 형성된 지역이다. 며칠 지내던 보르도와 마찬가지로 물이 익숙한 곳이었고 그만큼 습하고 한기가 더 잘 느껴졌다. 그래도 보기엔 좋았다. 크게 성곽을 한 바퀴 돌고 기념품 샵으로 갔지만 기대했던 이곳에서 만들어 판매하는 와인은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밖으로 향했다. 성 밖으로 나와서 샤또 당제를 다시 바라보니 조금 전 들어올 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처음에는 약간 기괴하고 무섭기도 했었던 인상이었는데 지금은 안에서 봤던 예쁜 정원과 성의 모습이 겹치며 아름답게 느껴졌다.
슬슬 해가 저물고 있었고 오늘 가봐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곳을 가보았으니 이제부터는 가장 좋아하는 여행을 할 시간이었다. 치즈샵, 와인샵, 디저트샵을 다니며 지역 특산물들을 구경하기로 했다. 치즈샵을 가면 조금씩 맛을 보고 마음에 드는 제품을 살 수 있었다. 처음 오는 지역이라 뭐가 유명한지 알지도 못한 채 무턱대고 치즈샵마다 들어가 "프로뒤 로칼(produit local; 지역 특산물)!"을 외치고 다녔다. 다른 치즈들도 만들지만 가장 유명한 게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 '쉐브르(Chèvre)' 종류라고 한다. 치즈는 사실 한두번 클래스를 들어보긴 했지만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없어 많이 알진 못했다. 그나마 와인 업계에 있으며 쥐라(Jura)[6] 지역에서 만들어진 '꽁떼(Comté)' 치즈가 제일 맛있게 느껴져 많이 먹곤 했다. 하지만 현지에 오니 모르는 치즈 투성이었고 낯설었지만 첫 치즈샵에서 4가지 정도의 쉐브르 치즈를 맛보고 나서 나는 확신했다.
'이거다. 나의 새로운 최애.'
쉐브르라는 염소젖 치즈는 보통 흰색 외피에 온도가 조금만 올라가도 흐물텅 녹아버리는 치즈로 냄새가 아주 고약한 게 특징이다. 그 매니악한 향과 맛에 빠져버린 것이다. 고수나 민트 초코와 같은 그런 느낌이 아닐까. 상대편에서는 그토록 이해하지 못하지만 애호가들은 정말 좋아하는. 그냥 나올 수 없어 가장 마음에 들었던 3가지 치즈를 골라 나왔다. 그리고 뒤이어 방문했던 몇 개 치즈샵에서 또 다른 치즈를 테이스팅하고 또 다른 종류의 쉐브르 치즈를 2가지를 더 고른 후에나 치즈 쇼핑이 끝났다. 시내에 있는 와인샵들로 발걸음을 옮겨 기웃거렸지만 어제 와인을 4병이나 사는 바람에 어떤 와인을 파는지 정도만 보고 맥주샵으로 옮겨 갔다. 프랑스가 맥주로 유명한 나라는 아니었지만(바로 옆에 벨기에도 있고 독일도 있다 보니...) 몽펠리에 맥주샵에서 얘기해 준 바로는 크래프트 비어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고 했다. 앙제에서 유명하다는 크래프트 맥주샵에 가서 몇 가지만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 더블 IPA부터 사워 에일까지 다섯 가지 맥주를 가져와 열심히 설명해 줬다. 맥주를 잘 모르니 블랑슈와 더블 IPA 하나씩 집고 숙소로 오는 길에 두 개의 와인샵을 더 들리고 나서야 오늘의 여행이 끝이 났다. 돌아오는 길은 작은 마을답게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았지만 안전한 느낌이 들었다. 파리나 뉴욕 거리를 다닐 때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만 어디서 어떤 사람이 튀어나올지 몰라 매번 긴장하곤 했지만 이렇게 작은 도시를 다니면 오히려 안정적인 느낌을 받았다.
숙소로 들어오니 뤽과 지주가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사실 어제 뤽이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했었다. 하루에 9유로로 지주가 직접 만든 요리를 함께 먹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다. 어제는 와인샵이 닫을까 걱정에 정신없이 나가느라 제대로 답변을 못했지만 오늘부터 보르도로 가기 전까지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었다. 돈을 아껴야 됐었고 매일 다른, 그것도 제대로 된 프랑스 가정식을 9유로에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괜찮은 선택지였다. 같이 먹으니만큼 어제 사 온 와인을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어뒀던 와인을 꺼내려는데 뤽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손에 있는 그 병 당장 집어넣어'라는 손짓을 보이고는 창고에서 어제와는 또 다른 와인을 꺼내왔다. 이번에는 쉬루블(Chiroubles)[7]이라고 적혀있는, 보졸레(Beaujolais) 지역의 레드 와인을 가져와서 같이 먹자고 했다. 아쉽게도(?) 내가 사 온 와인은 다시 냉장고에 넣어둔 채 뤽이 가져온 와인을 함께 나누며 식사 자리를 이어갔다. 처음으로 같이 먹는 메뉴는 호박 수프와 오믈렛, 디저트로 샤흘로트 오 코앙트로(Charlotte au Cointreau)라는 케이크였다. 할머니 지주의 요리는 시골 가정집스러웠지만 본격적이었다. 디저트에서 오렌지 껍질 향이 코를 기분 좋게 간지럽혀 뭘로 만든 거냐고 물었더니 코앙트로라는 오렌지 리큐르로 만들었다고 한다. 관심을 보이니 병을 가져와 퐁 하고 마개를 열고 한 잔을 따라 준다.
"궁금하면 한번 마셔보게나."
작은 샷잔에 따라진 코앙트로의 향을 음미해 보고서 한입을 목으로 흘려 넣었다. 향은 향긋했지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알콜감에 인상을 찌푸리며 콜록거리며 물을 찾으니 뤽은 껄껄거리며 물 한 잔을 주며 어떠냐고 물어본다.
"오렌지 향이 엄청나서 부드러울 줄 알았는데 강하네요. 근데 정말 매력적이에요. 한 잔만 더 먹어도 될까요?"
"이걸 한잔 더? 너무 강하지 않나? 알코올 함량이 40%이니 조심해야 해"
시골 할아버지가 손자 대하듯 걱정 해주었다. 언어 장벽이 있었지만 뤽과 지주는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로 계속해서 말을 건네주었고 덕분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할 수 있었다. 뤽은 건축 일을 하다가 은퇴를 했고 그 후에도 들어오는 일이 있으면 받아서 한다고 한다. 지주는 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다 얼마 전 은퇴를 했다고 한다. 요즘은 컴퓨터로 상담을 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인 뤽과 지주는 유독 사이가 좋아 보였다. 뤽은 프랑스인 특유의 로맨틱함으로 가끔 꽃을 사 와서 선물하기도 하고 아침에 내려가보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집과 일자리를 못 구하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 대해 얘기를 하니 진심으로 걱정해주었다. 그러면서 혹시나 이곳 앙제에서 지내볼 생각이 있다면 우리와 함께 살자고 얘기해 준다. 아닌 게 아니라 이곳에서 따스히 있다 보니 보르도가 아닌 이곳에서 일자리를 구하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우선 짐이 보르도에 있어 다시 돌아가야 했지만 앙제 근처의 와이너리에도 지원해보고 올 수 있으면 이곳에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다. 어제 데워진 따뜻한 온기는 오늘도 식지 않고 여전히 마음을 따뜻하게 녹이고 있었고 식사자리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1] 와인의 원산지, 한국으로 치면 흑산도 홍어, 나주 배 같은 개념이다.
[2] 슈낭 블랑은 화이트 와인 품종으로 특히 앙주(Anjou)와 소뮈르(Saumur) 지역에서 유명한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품종
[3] 까베르네 프랑은 레드 와인 품종으로 특히 앙주와 소뮈르 지역에서 유명한 레드 와인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품종
[4] 사브니에르(화이트), 앙주-빌라주 브리싹(레드), 소뮈르 샹피니(레드), 꼬또 로방스(화이트 스위트), 꼬또 뒤 레이용(화이트 스위트)는 모두 와인 아펠라씨옹 이름들. 앙주-빌라주 브리싹과 소뮈르 샹피니는 모두 레드 와인으로 까베르네 프랑 품종으로 만든다. 사브니에르는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 꼬또 로방스와 꼬또 뒤 레이용은 스위트한 화이트 와인은 모두 슈낭 블랑 품종으로 만든다.
[5] 전문가들이 와인 평가를 위해 테이스팅을 할 때는 일반적으로 스핏 툴이라는 와인을 뱉을 수 있는 곳에 와인을 삼키지 않고 뱉어서 입안에 남는 잔향 등으로 평가를 한다. 뱉지 않고 테이스팅 했을 때 뒤에 테이스팅 하는 와인들에 대한 평가가 부정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와이너리에 방문했을 때에 배럴 테이스팅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스핏 툴에 뱉는 것이 일반적이다.
[6] 프랑스 중동부에 위치한 곳으로 부르고뉴에서 아주 가까운 지역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쥐라기(the Jurassic period)의 쥐라.
[7] 보졸레는 부르고뉴 아래에 있는 와인 생산지역으로 갸메(Gamay)라는 품종으로 만드는 레드 와인이 유명하다. 그중 품질 높은 10가지 마을에서 만드는 와인을 10크뤼 와인이라고 하는데 쉬루불은 그중 하나이며 또 다른 유명한 10크뤼 와인으로는 모르공(Morgon), 물랑-아-방(Moulin-à-vent)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