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했던 여행의 마무리
다음날부터 뤽(Luc)은 보르도에 일이 있어 며칠 자리를 비운다고 했다. 비주 인사로 뤽을 보낸 지주(Gizou)도 오후까지 일이 많아 늦게나 들어온다고 하며 언제 해두었는지 저녁거리를 챙겨뒀으니 전자레인지에 돌려먹으면 된다고 했다. 걱정 많은 눈길로 보길래 괜찮다며 얼른 나가보라고 문밖으로 밀어냈다. 어제와는 달리 전형적인 겨울철 프랑스 날씨였다. 먹구름이 잔뜩 껴있고 언제라도 비를 뿌릴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어제 어느 정도 앙제 도시를 둘러보기도 했고 오늘은 여유로이 집에 있을 예정이었다. 보르도에 있을 때 제팬 마켓에서 사 온 라면을 끓여 점심을 때웠다. 이런 아시아 식료품을 파는 마켓은 한국인들에게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다. 익숙한 맛도 맛이지만 1.2유로 정도로 한 끼를 어느 정도 때울 수 있다 보니 자주 갈 수밖에 없었다. 설거지하고 미리 내려놓은 시큼한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부리다 2층 방으로 향했다. 잠시 창문을 열고 침대 발밑에 있는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창가를 통해 한기가 방안을 채웠고 빛도 들어오지 않아 우울한 창을 닫아버렸다. 머릿속도 함께 닫힌 듯 한참을 앉아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몇 달 전 만들어둔 이력서가 띄워져 있었다.
'무식하면 정말 용감할 수 있구나. 이따위 이력서를 돌릴 생각이나 했다니.'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손을 봐야 했다. 며칠 전, 앙제에 오기 전 몽펠리에(Montpellier)[1]에 행사차 방문했다가 예전 회사에서 연이 있던 스페인 와이너리에서 근무하고 있는 지인을 만났다. 같이 저녁을 먹으며 어려움을 토로했더니 임시 일자리라도 구해보면 같은 동료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라며 용기를 줬다. 이곳에 온 이유가 일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일을 구하면 어떻게든 비벼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이력서를 다시 잡았다. 와이너리에서 아무 연고도 없는 나를 뽑으려면 그들에게 효율적으로 도움 되는 부분을 어필해야 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말도 잘 통하고 자국민 보호정책으로 세금도 덜 낼 수 있는 자국민을 채용하는 옵션 대신 나를 왜 선택해야 하는가? 이 부분에 집중해야 했다. 한참을 고민했지만 확 와닿는 이유를 찾아내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 방향은 잡을 수 있었다. 나는 와인 양조를 하고 싶었지만 양조 관련한 교육은 전혀 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은 와인21닷컴[2]에 글을 쓰는 기자 신분이라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한국에 수출하고 싶거나 이미 수출하더라도 판매량을 늘리기엔 이런 나를 뽑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와인 업계에서 일을 5년 정도 하며 나쁘지 않은 인맥을 만들어두어 수입사들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 있다는 게 내 장점이었다. '나'라는 사람을 뽑아야만 하는 이유라기엔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었지만 어느 정도 써 내려갈 수 있었다.
집 안에는 소름 끼치는 침묵만이 내려앉았고 타자 치는 소리로 빈 공간을 메꿔나가고 있었다. 어두운 날씨에 주홍빛 조명 때문에 눈이 말라왔고 이내 머리가 지끈거려오기 시작해 맥북을 닫고 패딩을 걸쳐 입은 채 잠시 집 밖으로 산책을 나섰다.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이미 어둑어둑해진 날씨에 가로등만이 도로를 비추고 있었다. 그래도 며칠 있었다고 처음 그렇게 경계하던 주변 모습이 조금은 익숙하게 느껴졌다. 멀리 가지는 못하고 첫날 저녁으로 먹었던 케밥 집 정도까지 생각을 정리하며 거닐다가 다시 돌아왔다. 지주가 돌아와 있으면 저녁을 같이 먹으며 상당히 어색한 시간을 보내겠군 하고 집에 다시 돌아왔지만 고요한 적막만이 나를 반겨주었다. 불을 켜고 냉장고에 지주가 만들어놓은 크림소스 라자냐(건강도 생각하라는 듯 콜리플라워를 잔뜩 집어넣은)를 전자레인지로 데웠다. 뤽이 없으니 오늘은 드디어 첫날 사둔 와인들을 먹을 수 있었다. 냉장고에 있는 도멘 드 라 베르즈리(Domaine de la Bergerie) 와이너리에서 만든 앙주 블랑(Anjou Blanc)[3]이라는 와인을 꺼냈다. 초록색 라벨에 G 알파벳이 큼지막하게 박혀있는 와인이었다. 첫날 와인 샵에서 특히 어필을 많이 하기도 했고 비슷한 스타일의 라벨이 여러 가지가 있어 궁금하던 차였다. 그리 비싼 돈을 준 것도 아닌데 앙제 도시 투어 때 협회[4]에서 마시며 반했던 그 모습이 느껴져 서서히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즐거움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마음에 드는 와인과 함께 지주가 해준 음식을 먹으며 오늘 받은 스트레스를 털어냈다.
이 시기의 앙제와 소뮈르 마을에서는 크고 작은 와인 전시회, 시음회가 여러 개가 열린다. 우선 가장 작은 규모로 내추럴 와인 생산자 열댓 명이 참석하는 '뻬니떵뜨(Pénitent)', 그보다 큰 내추럴 와인 행사인 '살롱 생 장(Salin St Jean)'이라는 행사가 같은 날 다른 장소에서 열린다. 다음날 내추럴 와인 시음회로는 가장 큰 규모인 '라 디브 부떼이(La Dive Bouteille)'가 이틀간 열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반 와인과 내추럴 와인 모두 있는, 주로 루아르(Val de Loire) 지역의 와인들이 나오는 전시회인 '루아르 와인 살롱(Salon des Vins de Loire)'이 열린다. 정말 궁금했던 라 디브 부떼이는 특이하게도 일요일과 월요일 이틀 동안 행사가 진행되었다. 옆 동네인 소뮈르(Saumur)라는 마을에서 열렸고 열차가 많지 않아 새벽같이 일어나서 가야 했다. 프랑스의 일요일은 한국인으로서는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가게들도 대부분 닫고 열차마저 운행 횟수가 줄어든다. 무거운 눈꺼풀을 껌뻑이며 두텁게 옷을 챙겨 입고 앙제 역으로 향했다. 미리 예약한 떼으에흐(TER)[5] 열차를 탔는데 그동안 타고 다녔던 떼제베(TGV)[6]랑은 또 다른, 약간 더 안락한 지하철 같은 느낌이 드는 열차였다. 고속철이 아닌 만큼 천천히 움직이는 열차를 타고 잠시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금방 내릴 때가 되었다. 행사장까지 운영하는 셔틀이 오는 소뮈르 역은 초라했다. 하나의 노선만 지나가는 역이다 보니 그만큼 이용객이나 일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출구로 나가 조금 걸어가다 보니 마침 차 한 대가 한무리의 사람들을 실어 가는 게 보였다. 지도를 보니 셔틀 탑승하는 곳이 맞는 것 같아 잠깐 기다리다 보니 조금 전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잠시 뒤 작은 차량 한 대가 약간 거리를 둔 곳에 도착했고 그게 셔틀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나는 원래 자리에 가만있었지만 다른 외국인들이 우르르 그 차로 이동했다. 작은 7인승 밴에 9명을 어거지로 끼워 넣더니 그대로 출발하려고 했다. 가만히 멍 때리다가 그제서야 셔틀임을 깨달은 나는 운전사에게 물었더니 이 작은 차량이 셔틀이 맞고 금방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제일 먼저 줄 서서 기다린 나는 뭐였냐 욕을 속으로 삼키며 아침부터 날리던 비바람을 속절없이 맞고 있었는데 다행히 금세 다른 차량이 와서 바로 몸을 실었다. 같은 차량에 탄 사람들끼리 가볍게 인사가 오갔고 10분도 안 걸려 행사장 입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셔틀뿐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도착한 사람들이 행사장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고 눈앞에 보이는 엄청나게 큰 바위 벽에는 큰 판넬로 "ACKERMAN 1811"[7]이라고 쓰여 있었다.
오른쪽 사무실같이 보이는 건물 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이제 막 입장을 시작했는지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5유로의 참가비를 내고 티켓과 와인잔을 받아들고 행사장으로 들어섰다. 이 행사의 가장 독특한 점은 엄청나게 큰 동굴에서 각지의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이 자신들의 와인을 선보인다는 점이었다. 이 동굴을 갖고 있는 아케르만이라는 와이너리는 1811년부터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며 동굴의 온도는 12도 정도로 와인 숙성에 최적화[8]되어 있었다. 이런 조건은 와인을 마시는 데에도 아주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동굴 안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가다 보니 하나의 홀 같은 곳이 나왔고 그곳에 6개 정도의 와인 생산자들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조금 더 들어가 볼까 하고 가다 보니 본격적인 입구 같은 곳이 나왔고 그곳에는 내추럴 와인에 관련한 책자와 독특한 라벨 디자인을 옷이나 컵으로 만든 굿즈를 판매하는 이들도 있고, 커피를 파는 곳,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한 간이 레스토랑 같은 곳이 있었다. 이 공간을 지나니 드디어 광활한 동굴에 자리 잡은 수십 명의 와인 메이커들이 보였다. 각자가 오크통 하나씩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와인을 올려두고 고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와인을 선보이고 있었다. 정교하게 깎지 않은 울퉁불퉁한 벽면에는 생산자들이 속한 지역들이 샴페인(Champagne), 루아르(Loire), 쥐라(Jura) 등의 글씨로 나무판에 쓰여 걸려있었고 그 아래에 각 생산자들이 자신의 와이너리 이름을 A4 용지에 아무렇게나 써제껴서 붙여놨다. 우리가 흔히 가던 그런 전시회가 아니다 보니 정제되어 있는 느낌이 없고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있는 느낌이었다. 그게 오히려 이 행사의 분위기를 더 살려주는 것 같았다.
어디부터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샴페인 쪽을 가보기로 했다. 거기다 6개 생산자만 나와서 금방 테이스팅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에 미수입 되는 와이너리가 있으면 나중에 소개를 시켜줘도 좋겠다고 생각하고 물어봤지만 대부분의 와이너리들은 명성이 뛰어나 이미 한국에 수입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와이너리는 단연 조르주 라발(Georges Laval)이었다. 명성이 뛰어난 와인들이 많다고는 했지만 내겐 생소한 와이너리들이 많았고 조르주 라발도 그중 하나였다. 퀴미에르(Cumières)라고 쓰인 샴페인 한 병만 꺼내놨었고 그 와인 하나로 완전히 반해버렸다. 기포가 섬세하면서도 힘이 있었고 표현력이 뛰어나 누구나 입에 한 모금 머금으면 행복감을 느낄 그럴 와인이었다. 처음 접하는 사람이 으레 그러듯 감동받은 채 아쉬워서 입맛만 다시고 있으니 메이커가 웃음을 짓더니 특별한 와인을 한 병 맛 보여주겠다더니 뒤쪽에 빼두었던 와인을 가지고 온다. 라벨이 없이 하얀색 마커펜으로 "레 롱그 비올(Les Longues Violes) 2012"이라고 쓰여있는 와인이었다. 반응이 궁금하다는 메이커의 눈길에 입안에 털어 넣자 뱉을 수도 없어 목으로 그냥 넘겨버렸다. 그전 퀴미에르라는 샴페인도 좋았지만 이 와인은 급이 다른 고급스러움이 느껴졌다. 감탄을 연신 내뱉자 메이커는 흡족한 듯 새로 출시할 와인이라고 알려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하나의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만으로 만든 싱글 빈야드 와인이었고 조르주 라발 와이너리의 새로운 플래그십 샴페인이라고 한다.
이런 귀중한 와인을 맛 보여준 메이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부르고뉴(Bourgogne) 쪽으로 이동했다. 샴페인보다는 더 많은 15개 생산자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확실히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만 모아둔 곳이다 보니 메이커들에게서 자유스러움이 느껴졌다. 이 추운 날, 추운 동굴 안에서 반팔 티셔츠 하나로 열정적으로 자신의 와인을 소개하는 메이커도 있었고 엄청난 드레드 헤어를 휘날리며 와인을 따라주느라 정신없는 이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스는 멋있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있던 부스였는데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가방에는 '섹스, 마약, 그리고 피노 누아'라고 큼지막하게 쓰여있었다. '그래 이런 게 내추럴 와인 정신이지'라고 생각하며 시음을 이어갔다. 그 뒤로 부르고뉴 지역의 얀 뒤리유(Yann Durieux), 쥐라 지역의 갸느바(Ganevat), 보졸레(Beaujolais) 지역의 막셀 라삐에르(Marcel Lapierre), 꼬뜨-로띠(Côte-Rôtie)의 장-미셸 스테판(Jean-Michel Stéphan), 루아르의 호슈 뇌브(Roches Neuves) 등 전설적인 생산자들의 와인들을 테이스팅 하며 이번 여행을 오기 잘했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조금 배가 고파 뭐가 있나 하고 아까 입구 쪽에서 본 간이 레스토랑 같은 곳으로 가보니 안타깝게도 불을 크게 쓸 수 있는 환경이 안되어 그런지 제대로 된 식사라기보다는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샌드위치 같은 것을 팔고 있었다.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서 다시 시음을 하러 돌아가 보니 이미 시간이 꽤나 지난 상태였고 분위기는 아까보다 더 달아올라있었다. 와인을 테이스팅하고 있으면 뒤쪽에서 '쨍그랑'하는 와인잔 깨지는 소리가 나고 동굴 안에서는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손뼉을 치고 환호를 해댔다. 훌륭한 와인들을 뱉을 수 없어 목으로 삼키다 보니 술인지라 취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이런 부분들도 모두 라 디브 부떼이라는 내추럴 와인 행사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아닐까. 어느 정도 와인이 들어가고 나니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친구가 되는 건 어딜 가나 똑같았다. 알자스 와인을 테이스팅하러 갔다가 사람이 많아 뒤에서 쭈뼛거리고 있었더니 앞에서 테이스팅을 하던 어르신이 손목을 잡아끌더니 와인 메이커에게 "여기 와인이나 좀 따라줘"라고 하기도 했다. 좋은 와인을 맛보는 참관객이나 이들의 반응을 보며 뿌듯해하는 생산자 모두 행복해 보였다.
더 있고 싶었지만 4시 즈음에 오는 이번 열차를 놓치면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기에 서둘러 동굴 밖으로 향했다. 동굴 밖으로 나오니 그제야 신호가 잡혀 메시지들이 오기 시작했고 시간을 보니 예상보다 촉박했다. 적당히 기분 좋게 취해서 와인병을 들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 사이로 바삐 뛰어 막 출발하려는 셔틀을 겨우 붙잡고 남은 한자리에 뛰어올라 역으로 향했다. 역 앞에 셔틀이 도착하자마자 운전자에게 "메르씨, 오흐부아"를 외치고 역사 안으로 뛰어들어갔지만 열차는 간발의 차로 출발하고 말았다.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오전부터 비가 오고 있었고 초라한 역사 근처에는 아무것도 볼 게 없었다. 일요일이라 저녁을 어디서 먹고 싶어도 이 작은 시골 마을에는 문을 열고 있는 술집조차 없었다. 핸드폰밖에 의지할게 없었지만 외장 배터리도 하필이면 충전을 안 해둬서 아끼느라 뭘 볼 수도 없었다. 배는 고픈데 역사에 작은 상점에서는 과자만 팔고 있었다. 비 오는 겨울철의 프랑스는 가뜩이나 으슬으슬 한데 적당히 취했던 취기가 서서히 풀리며 몸의 열기도 앗아가고 있었다. 염치없는 줄은 알지만 오늘 돌아왔을 뤽에게 전화해서 데리러 와달라고 해볼까 생각을 하다가 무슨 좋은 소리를 듣겠다고 그럴까 하며 관뒀다.
예전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전 세계에서 모인 여형자들과 함께 미국을 한 바퀴 도는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6주간의 일정 중 첫 3주가 끝나며 여행을 마치는 이들도 있었고 나와 함께 더 여행을 하는 이들과 새로이 합류하는 이들도 있었다. 3주 단위의 여행이다 보니 캘리포니아의 마지막 날에는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그리고 캘리포니아의 첫날에는 디즈니랜드를 가게 되었다. 이틀 연속 놀이공원은 재미가 없을듯하여 친하게 지내던 영국인들 둘과 작당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다 같이 LA 시내를 거닐자고 했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나와 같이 차 바깥에 있어야 될 영국인들은 차 안에서 내게 얼른 타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결심이 굳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배신자들"이라고 비난하고선 어떠한 사고가 일어나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여행사 서류에 사인을 하고 시내를 누비며 자유로운 하루를 보냈다. 문제는 저녁까지는 디즈니랜드로 알아서 찾아갔어야 했는데 버스를 찾을 수가 없어 지하철을 타고 애너하임 역까지 갔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잠실역에 도착하면 롯데월드까지 걸어갈 수 있는 그런 거리인 줄 알았으니까. 애너하임 역에서 내렸는데 주변에 놀이공원이랄 게 안 보였고 한참을 무작정 걷다가 큰 세탁소에 들어가 길을 물었더니 30분 정도만 가면 디즈니랜드에 도착한다고 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으니 걸어가야겠다 생각하고 문을 나서려는데 큰 배낭을 들쳐업고 길을 물어본 게 의심스러웠는지 종업원이 날 불러 세웠고 "차로 가는 거죠?"라고 물었고 그 순간 심장이 빠르게 가빠 왔다. 차로 30분 거리이고 걸어서는 5-6시간 걸릴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이미 저녁 6시였고 어렸던 나는 겁을 집어먹고 역으로 다시 돌아와 공중전화로 투어 리더에게 전화를 해서 데리러 와달라고 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아침에 당신이 서류에 사인하지 않았나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방법은 없네요. 오늘까지 디즈니랜드 캠핑장으로 와야 내일 함께 라스베가스로 갈 수 있어요. 시내로 가면 버스가 있을 테니 그걸 타고 오세요."라고,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이었지만 겁을 잔뜩 먹은 내게는 그렇게 매정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프랑스인들도 비슷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2시간만 기다리면 다음 열차가 오니 그때보다는 훨씬 낫지 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부터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는데 역사 내 상점도 닫을 준비를 하기에 안되겠다 싶어 프링글스 한 통과 와인 잡지 한 권을 집어 들고 왔다. 기온은 갈수록 떨어졌고 이러다 감기 걸리는 게 아닌가, 감기 걸려 며칠 고생하고 그러다 병원까지 가서 큰돈 내느니 그냥 택시를 타고 갈까도 생각을 할 때쯤 다행히 다음 열차가 역으로 들어왔다. 따뜻한 열차에 올라 온기로 몸을 녹이며 나른해져갔다. 그렇게 힘겹게 숙소로 돌아오니 뤽이 보르도에서 돌아와 지주와 함께 식사를 끝낸 참이었다. 자리를 정리하며 남겨둔 게 있으니 데워주겠다는 말에 얼른 씻고 내려왔다. 호기심 많은 뤽은 오늘 간 와인 행사에 대해 물어보자마자 나는 개울가에서 잡은 곤충에 대해 할아버지에게 신나서 얘기하는 손자마냥 신나서 한참을 떠들어대며 앙제에서의 하루가 지나갔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루아르 살롱이 있어 다녀왔다. 전날에 다녀온 라 디브 부떼이처럼 동굴도 아니었고 취한 취객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광경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루아르 지역의 다양한 와인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행사였다. 전시장 한켠에서는 특별 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처음 눈을 뜨게 된 슈낭 블랑(Chenin Blanc)이라는 화이트 와인 품종으로 만든 와인 100가지를 테이스팅 하는 전시였다. 한 가지 품종이 뭐 그렇게 다양할까 싶었지만 실제로 가서 경험해 보니 레드와 로제 와인 빼고는 정말 다양한 와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스파클링 와인에서부터 드라이 한 화이트 와인, 스위트 하더라도 살짝 달콤한 와인부터 아주 달콤한 와인까지, 한 가지 품종으로 만들어지는 와인의 이름이 다 기억하기에도 힘들 정도였다. 예를 들어 달콤한 와인도 5가지가 있는데 살짝 달콤한 꼬또 드 로방스(Coteaux de l'Aubance)와 중간 정도 당도의 꼬또 뒤 레이용(Coteaux du Layon), 꼬또 뒤 레이용 프르미에 크뤼 숌므(Coteaux du Layon 1er Cru Chaume), 그리고 아주 달콤한 본조(Bonnezeaux)와 최고급 명주인 꺄흐 드 숌므 그랑 크뤼(Quarts de Chaume Grand Cru) 까지 다양한 와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라 디브 부떼이는 여러 지역의 다양한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을 볼 수 있었다면 루아르 와인 살롱은 루아르 지역의 토착 와인들을 볼 수 있어 슈낭 블랑이라는 품종으로 사랑에 빠진 이 도시에 더 깊은 애정을 각인시켜주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앙제 마을에서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마지막 날이니만큼 며칠 이곳에 묵으며 테이스팅 한 와인 중 가장 좋은 와인을 사서 뤽과 지주와 함께 마시며 보내야겠다 생각하며 루아르 살롱 마지막 날에 오후 일찍 행사장을 나와 시내로 향했다. 세 곳의 샵을 거쳐 겨우 내가 찾던, 샤또 이본느, 소뮈르 블랑(Château Yvonne, Saumur Blanc)이라는 와인을 구입했다. 예상하듯 슈낭 블랑 품종 중에 가장 맛있게 먹었던 와인이었다. 슈낭 블랑 특유의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우면서도 깊이감이 느껴지고 우아하게 고급스러운 느낌이 마지막 작별의 아쉬움을 덜어주기에 적절한 와인이었다. 오전부터 어둡던 하늘은 와인을 사고 나오니 결국에는 엄청난 양의 눈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퇴근 시간 즈음에 갑자기 내린 폭설에 다들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더 복잡해지기 전에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숙소로 얼른 돌아왔다. 뤽도 조금 일찍 집에 왔는데 눈이 내리자마자 바로 집으로 왔다고 한다.
"뭔 놈의 눈이 이렇게나, 에잉 쯧"
"그래도 저는 눈 내리는 게 좋더라구요.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예쁘지 않나요?"
"예쁘기는 쯧. 앙제는 눈이 그렇게 자주 오는 곳이 아니야. 오면서 사고는 없었나?"
"네 뭐 문제없이 잘 왔어요"
"이곳에 눈이 그리 흔치 않은 일이라 오늘 도로 아주 볼만 할게다 껄껄"
뤽의 말로는 1986년과 2005년 이후에 기록적인 폭설이라 조금만 눈이 와도 도로가 마비되는데 오늘은 아마 다들 도로에서 잠을 자야 할지도 모른다며 웃어넘겼다. 많은 것에 의미 부여를 하는 내가 이곳에서의 마지막 시간이라고 거창하게 생각한 저녁은 7시 즈음 먹기로 하고 방에서 짐 정리를 하고 내려왔다. 고집불통 뤽과는 마지막 저녁까지도 와인 실랑이가 이어졌다. 오늘은 물러날 수 없었다. 함께 마시려고 일부러 와인을 사 왔다는 말에 뤽은 못 이기는 척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아까 사 왔던 와인을 냉장고에서 꺼내와 함께 마시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내가 반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45유로의 거금을 주고 사 온 보람이 느껴졌다. 하지만 뤽의 잔은 생각보다 천천히 비워졌는데 알고 보니 레드 와인만 주로 마시던 뤽이라 그다지 익숙하진 않다고 고백했다. 내가 맛있다고 나만 생각한 불찰이었다. 마지막은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데. 함께 라자냐를 먹고서 치즈를 먹을 즈음이 되어 동네에서 산 치즈들이 있는데 너무 많이 남아서 함께 먹고 싶다고 또 꺼내왔다. 앙제 도시 여행 때 산 염소젖 치즈 4가지를 꺼내와서 조금씩 잘라 그릇에 담은 뒤 맛이 어떠냬 하며 한껏 토론을 했다. 마지막으로 지주가 신선한 키위와 귤 등이 잔뜩 담긴 과일 샐러드를 가져와서 함께 먹고 있는데 뤽이 지주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턱을 가볍게 치켜들었고 지주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 자리를 비웠다. 그사이 뤽에게 이곳이 너무 그리울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조금 뒤에 오는 지주의 손에는 스파클링 와인 한 병이 들려있었다. 와인 라벨에는 '부베, '사피르' 소뮈르 브뤼 빈티지(Bouvet, 'Saphir' Saumur Brut Vintage)'라는 이름이 써져있었다. 이 와인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는데 아직 화이트 와인이 조금 남은 상태라 의아하게 쳐다보니 뤽은 자신들이 준비한 선물이라며 받아 달라고, 보르도에 돌아가면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말했다.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 뜨거운 느낌이 속에서 올라왔다. 길게 있었던 것도 아니라 고작 열흘 남짓 이들의 집에 머물렀고 종일 시간을 보낸 것도 아니라 아침과 저녁 잠깐 얼굴을 보았을 뿐이었다. 식사를 같이 했다지만 언어 장벽 때문에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그런 내게 첫날부터 와인을 내어주고 내 와인을 절대로 열지 못하게 만들더니 결국 마지막 날에는 선물까지 손에 쥐여줬다. 그 순간 지주가 내게 건네준 이 와인은 세상 어떤 와인보다도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하마터면 전부 정리하고 이곳으로 오겠다고 말을 내뱉을뻔했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겪은 따뜻한 열흘이었다. 이토록 따뜻했던 겨울이 있었던가. 감사의 인사로 지주와 뤽 모두에게 비주 인사를 건네고 서툰 프랑스어로 감동을 전했다. 이곳에 언어를 배우러 오는 동양인들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무모하게 일을 하러 온 내가 조금은 안쓰러워 잘해준 게 아닌가 싶었다. 막상 주고 나니 쑥스러웠던지 뤽은 내일 아침 일찍 나가봐야 해서 먼저 잔다며 서둘러 인사를 하고서는 지주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고 혼자 남아 남은 화이트 와인 잔을 비우며 온기를 느끼며 혼자서 '오흐부아(Au revoir)'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1] 남프랑스에 있는, 지중해에서 12km 떨어져 있는, 활기찬 대학 도시로 프랑스에서 7번째로 큰 도시이다.
[2] www.wine21.com
[3] 앙주는 와인의 원산지 명칭(한국으로 따지면 청송 사과, 울진 대게와 같은)이며 블랑은 프랑스어로 흰색을 의미하며 와인에서는 화이트 와인을 의미한다.
[4] 앙주 와인 협회(Maison du Vin de l'Anjou)
[5] Transport Express Régional의 약자로 주요 중소 도시들을 연결해 주는 완행열차로 출퇴근 시 주로 이용
[6] Train à Grande Vitesse의 약자로 프랑스의 고속철이다.
[7] 와이너리 이름, 1811년부터 명맥을 유지해온 것을 알 수 있다.
[8] 와인은 적당히 낮으면서 변하지 않고 일정하게 유지되는 온도와 직사광선과 진동에 노출이 없는 환경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숙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