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던 고향으로 출발
아버지와 친구분들이 걸어서 불과 이틀 만에 주파한 길을, 나는 6일 동안 걷다가 타다가를 반복하며 겨우 도착했다. 하지만 모든 이동을 걸어서만 하겠다고 할 때는 걷기만으로도 힘이 들어서 회고록에서 언급한 장소를 찾아보겠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오늘은 마치 사서를 보며 유물을 발굴하는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한편 누이동생 같은 여자사람 친구와 작별인사를 하고 출발 준비를 마친 아버지는 7월 10일 경 드디어 서울을 출발했다.
당시 우리에게는 아무런 신분증명서가 없었다. 학생증도 없고, 학도호국단 수첩은 인민군에게 의심을 받을까 싶어 없애 버렸다. 그러나 곤란한 처지에 빠졌을 경우를 대비하여 신분증명서가 필요했다.
당시 택준이는 만리동 하숙집에서 윤씨 댁으로 거처를 옮겼고, 윤씨 댁에는 배화여고 3년생인 명화라는 딸이 있었다. 택준이의 남자다운 모습과 호방한 성격에 명화는 택준이를 무척 따랐던 것 같다. 그 댁의 윤씨는 광산을 하는 관계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알고 있다고 하여, 택준이는 윤씨에게 위조 신분증을 부탁했다.
마침내 윤씨가 우리 세 사람의 근로인민당 위조 당원증을 구해 주었다. 그런저런 인연으로 후일 택준이는 윤씨의 딸 명화와 결혼했다.
근로인민당은 온건좌익으로 구분되던 여운형 씨와 장건상 씨가 하던 당으로, 여운형 씨가 암살된 후에 당원들은 지하로 잠적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이 뒤집어지니 지하에서 나와서 활동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위조 신분증을 구하기는 했지만 최악의 순간에만 사용하기로 하고 꼭꼭 숨겨두었다. 사실 나는 근민당 위원장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혹시라도 신분증을 사용하게 될 때를 대비하여 당위원장의 이름을 외워두었다.
이제 출발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내가 제일 먼저 약속한 전차 정류장에 도착했고, 뒤이어 영환이가 만리동 하숙집 할머니와 같이 나왔다. 그 할머니는 철도 식당차 요리원이었는데, 영환이와 택준이에게 친어머니 같이 정이 많았다. 택준이는 윤씨 댁에서 출발하여 마포 종점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학생 몸조심하고 잘 가요. 또 만날 수 있어야 할 텐데..'하며 우리가 타고 가는 전차를 향해 한없이 손을 흔들며 눈물을 훔쳤다.
나는 고향에서 바로 전쟁터로 직행하여, 그날 이후 그 할머니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택준이와 영환이는 고향에 갔다가 견디지 못하고, 한 달 만에 다시 서울로 와서 9.28 수복까지 그 하숙집에 숨어 지냈다고 한다.
마포 종점에서 택준이를 만나 가교가 놓인 곳으로 내려갔다. 흰옷을 입은 피난민들이 다리를 건너려고 기다리고 있고, 다리 위에는 일렬로 도강하는 행렬이 보였다. 다리에는 인민군복이나 제복을 입은 사람의 검문은 없었고 평온했다.
우선 철도를 따라가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철도길을 취하기로 했다. 우연만한 철교는 침목을 밟고 건넜다. 대학 때 휴강이라도 있으면 신공덕에서 현촌역으로 철교를 걷고 넘어 다니는데 이골이 나서 곤란은 없었다.
시흥을 지나 안양에 가까울 무렵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금속성의 비행기 소리가 났다. 철도 위를 따라가던 행렬이 일제히 멈추어 섰다. 1대가 머리 위로 저공비행을 하더니, 곧이어 또 1대가 지나가면서 철도 옆 숲 속으로 기총 소사를 했다. 생전 처음 듣는 벽력 같은 소리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철도 뚝에 엎드렸다.
한참을 엎드려 있던 우리는 철길을 걷는 것보다 국도가 안전하겠다고 생각하고 국도로 들어섰다. 당시는 국도라고 해도 왕복 1차선이었고, 비포장에 자갈을 깔아 다져놓기는 했으나 바람이 불거나 트럭이 지나가면 먼지가 대단했다.
우리는 국도 가로수 밑에서 싸온 주먹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각자 호주머니에는 잔돈이 좀 있어서 원두막에서 참외를 사 먹었던 기억이 난다. 길에는 서울 쪽으로 올라오는 피난민은 없고 남으로 내려가는 사람들밖에 없어서 전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젊은 우리들이기에 첫날은 기운이 왕성하였다. 당시 나와 택준이는 24살이고, 영환이는 26살이었다. 그날 서울을 출발하여 평택 못 미쳐 들판의 어느 농가의 방을 빌려 잤다. 그날 저녁은 영환이가 가져온 냄비에 택준이가 가져온 국수와 밀가루를 가지고 수제비를 떠서 수제비 국수를 해 먹었다. 평택 평야의 해 넘어가는 광경은 평온하기만 했으나,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불안하여 아무도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둘째 날 아침식사는 내가 가져온 쌀로 밥을 지어먹었다. 그리고 한낮의 햇볕을 피하기 위해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둘째 날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다리가 아프고 발바닥이 부르터서 걸음을 걷기가 힘들었다. 영환이는 반바지와 노타이를 입었기에 첫날은 그런대로 견디었으나, 팔꿈치 아래와 무릎 아래는 노출되어 벌겋게 살이 익어 따가워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택준이는 발바닥이 평발이라 걷기가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나는 긴소매 와이셔츠, 긴바지에 두꺼운 양말을 준비해 준 아현동 형수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형수님은 만주에서 8.15 해방을 맞아 신경에서 북한을 거쳐 서울까지 오는 수백리의 피난길을 걸어오신 분이다. 거기에서 얻은 지혜였던 것 같다.
첫째 날 본 전쟁의 흔적이란, 한강을 건널 때 마포 가교를 건너면서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것을 보았고, 오산과 쑥고개 근처를 지날 때는 시체 썩는 매캐한 냄새를 맡고 메스꺼움을 금할 수 없었던 것뿐이었는데, 둘째 날 천안을 지날 때 도로 양쪽의 집들이 화재로 무너져 내려앉은 것을 보니 이제 정말 전쟁터에 가까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날은 하루 종일 걸어 평택, 성환, 천안을 지나 소정리 근처까지 와서 어느 농가를 찾아들어 하루 밤을 자게 되었다. 우리가 찾아간 농가는 소정리 국도에서 조금 산 밑으로 들어간 곳으로 10 여호의 작은 마을이었고, 우리는 정중하게 고향으로 내려가는 대학생들인데 하룻밤 묵어 갔으면 한다고 하였다. 그 집의 어른인 초로의 부인이 쾌히 그렇게 하라고 하고, 아랫채 헛간을 내어주고 저녁밥으로 보리밥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위의 사진은 오늘 소정리 면사무소 뒤편 산 밑의 마을을 둘러보다가 발견한 헛간이 딸린 별채가 있는 집이다. 어쩌면 바로 이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셨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