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 D+3

피난길의 정순이를 만나다.

by 류병우

성북동 외갓집 식구들의 사진. 피난길에 아버지가 만난 네 사람의 일행은 왼쪽의 아이를 안은 나의 어머니 이정순, 맨 뒷 줄 가운데 계신 외할아버지, 그 왼쪽의 넷째 외삼촌 이규한, 어머니 오른쪽에 남자아이를 안고 있는 넷째 외숙모의 오른쪽의 초지누나 이초지. 이 네 사람의 일행을 마석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만났다. 사진은 피난길에서 만나고 6년 정도가 흐른 1956년 무렾의 모습.


호기롭게 서울을 출발하여 첫째날 36,000보, 둘째날 40,000보, 셋째날 13,000보 합계 89,000보 거리로는 60km 남짓을 걸었으나, 아버지가 하루 만에 가셨던 평택에도 미치지 못한 채 발톱 10개 중에 20%가 사망하고 왼쪽 발바닥 면적의 15%가 박리되는 피해가 발생했다. 불과 한세대 만에 인간의 보행 기능이 이렇게 퇴화하다니..


나를 진료한 의사선생님은 약 먹고 덧나지 않게 잘 소독하면 3일이면 낫는다고 한다. '유혹을 물리치는 것은 삶을 굳건하게 하고, 유혹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말이 나의 좌우명이다. 한 사흘 굳건하게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풍요롭게 살아볼까?


지난 2005년 대법원은 '이동갈비'에 대하여 "갈비에 살이 붙어있다면 식용 접착제로 다른 부위의 살을 붙여 '갈비'라는 이름으로 팔아도 허위표시가 아니다."라고 판결한 바 있다. 이 판례를 적용하면 "이동을 도보로 하는 여행이라면 다른 교통수단으로 도보여행 구간을 연결하여 '도보여행'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도 허위표시가 아니다." 그래서 당초 공개한 경로와 일정 대로 진행하면서 제목도 그냥 두기로 했다.


어차피 출발하면서 열흘을 작정하고 나선 길이니 일찍 서울로 갈 특별한 이유도 없다. 마석을 출발해서 돌아오던 아버지도 서둘러 서울에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아침 일찍 마석을 출발한 우리 셋은 서울로 올라가면서 그리 서둘지 않았다. 일찍 서울에 들어가 봐야 인민위원회다 민청이다 하면서 집회를 열고 의용군 모집을 하니, 되도록 그런 것을 피하려면 걸어 다니는 것이 나았다. 검문당하면 식량 구득이라는 좋은 변명거리가 있었다. 오는 길에 우리는 여러 가지를 논의를 거쳐 고향에 가기로 결정했다.


관동군 견습사관의 신분으로 해방을 맞아 국방경비대 장교로 있다가 기계과에 온 김광식이가 미국이 한반도에서 군사작전을 하면 2주일이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때로 B29의 정찰비행이 있는 것을 보니 미군이 참전한 것이 틀림없고, 머지않아 지상군이 투입되면 인민군이 패퇴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우리 가족들은 영동, 논산, 대전에 있으니 죽는 한이 있어서도 고향에 가서 가족의 안위를 확인하기로 했다.


7월 중순으로 접어든 햇볕은 따가웠다. 쉬엄쉬엄 와서 금곡을 지나 양평으로 갈라진 길까지 오니 오전 10시를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적지 않은 피난민들이 서울을 빠져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인민군의 검문 같은 것이 없어 괴나리 보따리나 배낭을 지고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고, 길가에는 참외 장사도 있었다.


우리가 삼거리에서 서울 쪽으로 얼마 가지 않아서 이규한이를 만났다. 내가 규한이네 성북동 집에 자주 들렀기 때문에 그 가족들도 잘 안다. 규한이 부친, 누이동생 정순이, 그리고 작고한 셋째 형의 딸 초지의 네 사람이 일행이었다. 규한이는 배낭을 짊어지고, 누이동생 정순이는 짐을 머리에 이고, 부친은 초지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반가웠다. 우리는 길가에 앉아 쉬면서 이야기를 했다.


규한이의 가족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아 앉았다. 우리는 흥균이네 집에 식량을 얻으러 갔다 온다고 하였고, 규한이는 양동중학교에 교사로 있었던 터이라 양동은 산골이고 사람들도 순박하여 가히 피난할 만한 곳이라서 가족의 일부를 데리고 가는 길이라 하였으며, 180리 정도의 거리라고 하였다. 규한이는 나에게 영동은 전선으로 막혀있으니 양동으로 피난을 오라고 했다.


나는 규한이와 남달리 친하게 지냈을 뿐 아니라 그 누이동생 정순이에게 관심이 많았다. 나는 고향에 내려갈 예정인데 여의치 않으면 양동으로 가겠노라고 했다.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는 악수를 하고 자리를 떴다. 정순이에게는 목례로 잘 가라고 인사하였다. 나는 규한이 일가의 가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택준이가 "명식아, 가자! 너는 백정희보다 규한이 누이동생에게 관심이 더 많은 모양이구나." 하였다. 나는 씁쓸히 웃었다. 규한이 누이동생에 대한 내 마음은 그때까지 규한이나 당사자인 정순이에게는 물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때 잠시의 만남을 보고 택준이는 눈치채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정황이 사랑이고 무어고를 생각할 여지가 없고 내일의 일을 알지 못하는 때다.


택준이가 말하는 백정희란 흥균이 누님의 딸 즉 생질녀이다. 당시 진명여고 5학년으로 18세 정도의 키가 작으나 명랑하고 귀여운 아가씨였다. 내가 돈암동 사촌형댁을 나와 하숙을 구할 때 반가정교사 반하숙의 만리동 안산파댁을 구하여 주었고,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만리동 내 방을 자주 드나들었다. 나도 정희를 귀엽게 보았으나 정희를 사랑의 대상이나 장래의 배우자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7살이라는 나이 차이도 있어서 누이동생 같은 기분뿐이었다.


그런데 택준이가 '정희가 명식이에게 마음을 두는 것 같으니 받아 줄만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택준이의 그런 농담에 그저 웃음으로만 대처하였다. 어린아이로만 생각하였고, 또한 나에게 기어이 자기감정을 표시하는 발랄한 소녀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조심하였었다.


삼거리에서 외갓집 식구들과 헤어지며 아쉬움에 몇 번씩 뒤돌아 보곤 하던 아버지는 서울에서 인민군이 천안을 해방하였다는 벽보를 보았다고 한다. 나는 오늘 그 천안에서 1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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