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석 흥균이의 집을 가다.
사진은 오늘 오전에 왼발을 거의 끌다시피 하면서 거쳐 온 1번 국도변의 유엔군초전기념관. UN안전보장이사회에서 채택된 결의안에 따라 최초로 파병된 미군 선발대 스미스 부대가 북한군과 첫 교전을 시작한 위치인 오산 죽미령에 세워진 기념관이라고 한다.
한편 가회동 이씨 댁을 떠나 아현동에 있는 희원이 아저씨 댁으로 거처를 옮긴 아버지는..
희원이 형님댁으로 짐을 옮기고 나니 족쇄가 풀어진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형님 내외와 세 조카들에게도 식량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사한 지 이틀 만에 만리동으로 택준이와 영환이를 찾아가서 이대로 있을 수 없으니 마석의 흥균이네를 찾아가서 식량을 좀 얻기로 했다.
당시는 개전 초기로 인민군이 승전 남진하고 있을 때라서 좀 관대했고, 의용군 모집도 비교적 느슨했으며, 아직 행정을 장악하지 못하여 식량 구득이나 피난행을 구실로 나돌아 다니는 것이 가능했다.
흥균이의 어르신은 독립촉성위원회 위원장이었고, 평산 신씨 도유사이셨는데, 마석의 지주이면서 양조장, 운수업 등을 하고 있어 갑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집도 흥균이네와 비슷하여 우리 고향이 인민군에게 점령되면 흥균이네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이어서 나는 그 댁의 일도 궁금했다. 더욱이 아버지는 다리를 다쳐 보행이 불편하여 도피도 못하고 꼼짝없이 당하게 될 판이었다.
나는 택준이 영환이와 각각 룩삭, 보리짚모자에 운동화 차림으로 아침 일찍 청량리 전차 종점에서 만나 걷기 시작하였다. 망우리 고개를 넘어 왕수교를 건너 금곡과 양평으로의 갈림길에서 금곡 쪽으로 접어들었다. 갈림길까지는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경춘가도로 들어서고부터는 그리 사람이 많지 않았다. 금곡을 지나 마치고개 근방에서는 택준이가 잘 아는 춘천으로 간다는 춘천여중 출신의 지인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어두워질 무렾 우리는 마석에 도착하여 흥균이네 집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동네에 남자 3명에 여자 2명의 젊은이들이 들이닥치고, 게다가 조금 있으니 김광식이가 그의 사촌동생과 같이 룩삭을 걸머지고 연달아 도착하니 흥균이들 집에는 갑자기 7명의 손님이 일시에 찾아들어 난감한 표정이 역력했다.
당시 흥균이 어르신은 인민위원회인지 내무서인지에서 자수하라고 하여 자수 후 가택 연금상태에 있었고, 곡물창고는 압류되어 가족들도 압류되지 않은 잡곡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흥균이는 마석에 돌아와 있었으나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다른 곳에 은신하고 있다가 우리가 왔다는 기별을 받고 집으로 왔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흥균이 어머니께서는 싫어하는 내색 없이 저녁밥을 지어 7인의 내객을 배불리 먹여 주셨다.
다음 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우리 셋만 남았다. 모든 것이 압류되어 빨간딱지가 붙어있는 것을 보면서도 흥균이 어르신께서는 그래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내가 남에게 못할 짓 한 것도 아니고, 힘들여 피땀으로 일군 재산이며, 재산을 모두 잃는다 해도 다시 일하면 먹고살 수 있을 것이고, 어떠한 세상이 오더라도 올바르게 살면 된다고 하셨다.
흥균이의 이야기로는 곳에 따라 국군의 저항이 꽤 거센 곳도 있었던 모양이라고 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를 장악하면 토지개혁을 해서 토지는 몰수될 것이고, 양조장과 운수업은 국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아직은 전쟁 중이라 손이 미치지 못하고, 흥균이 자신의 색깔을 모르니까 건드리지 않고 있지만, 이 고장 출신의 빨갱이들이 돌아오면 위험해질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흥균이네 집도 안전하지 못하고, 우리 때문에 흥균이까지 난처해질 것 같아 다음 날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다. 곡물창고는 봉인되어 있는지라 흥균이 어머니에 이끌리어 밭에 가서 감자를 캐서 각자의 룩삭을 채우고 다음날 아침 일찍 마석을 떠났다.
우리가 떠난 바로 다음날 흥균이 어르신은 내무서에서 들이닥쳐 서울로 압송되었고, 종로경찰서 자리에 수감되었다가 인민군이 서울을 철수할 때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총살당하셨다고 한다. 흥균이는 우리가 다녀간 일로 빨갱이들의 주목을 받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우리가 떠난 직후에 서울 방향으로 잠적한 덕택으로 호구를 벗어 날 수 있었다고 한다.
불과 한세대만에 인간의 보행 기능이 퇴화한 것이 분명하다. 호기롭게 시작한 출발 사흘 만에 발바닥이 너덜거려서 최대 시속 100m의 속도로 간신히 모텔을 찾아 기어들어왔다. 내일 아침에는 나머지 여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