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 D+1

인민의용군 모집에서 탈출하다.

by 류병우

이 사진은 남하의 길을 아버지와 함께 한 분들이다. 왼쪽부터 유택준, 아버지, 하영환.


어제 저녁밥을 6시에 먹은 이후에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새벽 4시 반에 배가 고파서 잠이 깼다. 오후 5시만 되면 저녁밥을 챙겨 먹고 아침마다 배가 고파 새벽에 아침밥을 챙겨 먹는 집사람 생각이 났다.


뜨거워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가려고 이른 아침을 먹고 행장을 챙겨 7시에 출발했다. 아버지는 첫째 날 보다 둘째 날이 다리도 아프고 발도 부르터서 힘들었다고 하셨다. 금년초 남미여행 중 12시간 이상 타는 야간 버스 이동을 두고 '죽을 만큼 괴롭지만 죽었다는 사람은 없다.'고 하던 얘기가 생각났다. 왼쪽 발바닥에 물집이 터져 발을 디딜 때마다 아프지만 발바닥 물집에 죽었다는 사람은 듣지 못했다. 온다던 비는 안 오고 해만 쨍쨍하다.


아버지는 한강 전투에 노무대로 끌려갔다 온 후 가급적 학교를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방 남자 사건으로 파출소에 끌려가 학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인 데다가, 이씨 댁을 드나들려면 반드시 가회동 파출소를 반드시 거쳐야 했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 않으면 의심을 받을 것 같아 학교에 나가야 했다고 한다.



경찰관 도주 사건 후 매일 내무서에 보고하라는 멍에가 씌워지니 나는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서울 공대 학생 신분으로 학교에 나가지 않으면 의심을 받을 것 같았지만, 혼자 학교에 갈 용기는 없었다. 한강변 노무 동원 후 소룡이는 절대로 학교에 안 나가기로 결정했다고 하고, 흥균이는 이화동에서 잠적한 것을 보니 고향 마석으로 내려간 모양이다.


7월 초순 경 두 번째로 동숭동 학교를 나갔었던 날인 것 같다. 학교에서 유택준이와 하영환이를 만났다. 두 사람의 생각은 이념적으로 나와 비슷할 뿐만 아니라 집안처지도 닮은 데가 있고, 택준이의 부모님은 연산 두계에 계시며, 영환이의 집은 대전이다. 택준이 아버님은 일제시대 때 관리를 했다고 하고, 영환이 아버님은 면화공장 관리인으로 공산화되면 우리집과 마찬가지로 반동으로 몰리거나 자칫 숙청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는 입장이었다. 우리 셋이는 행동을 같이 하기로 했다.


그날도 학교에서는 무슨 궐기대회가 열렸다. 집행부의 불꽃 튀기는 선동연설이 시작되고 구호를 외치더니 무엇 때문인지 잘 알지 못하면서도 시위 대열이 형성되고, 어느새 준비를 했는지 구호가 적힌 밑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라는 글자의 기치가 앞서고, 옆으로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힘 깨나 씀직한 어깨들이 대열의 이탈을 막고 있었다.


대열은 동숭동 구교사에서 종로를 거쳐서 파고다공원 앞을 지나 종로 3가를 지날 때 이규한(나의 넷째 외삼촌)의 형 이규명(나의 둘째 외삼촌)씨가 치과병원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대열을 이탈하여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어깨들에게 제지당했다. 어쩔 수 없이 나와 택준이, 영환이는 행진 대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따라가야 했다.


우리 대열이 YMCA 앞을 지날 때 맞은편 건물의 과학자 동맹 사무실 창문이 열리더니 아는 얼굴이 보였다. 국대안 반대 투쟁 때 불합작 교수로 학교를 떠났던 사람이다. 우리들 자신은 대열이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인지 몰라 불안해하며 선두를 따라가고 있었으나, 과학자 동맹 사람들은 그 대열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창을 열고 손을 흔들며 격려하였던 것이리라.


우리 대열은 수송동의 수송국민학교로 들어갔다. 가고 보니 그곳은 인민의용군 수용소였다. 집총 한 인민군들이 요소요소에 있고, 이미 시내의 각처에서 도착한 젊은이들, 그것도 주로 학생들인 것 같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동숭동에서 출발한 대열의 숫자는 그대로였고, 군복 비슷한 복장의 사람이 다가오더니 "동무들의 애국심에 감격한다. 이제부터 인민의용군에 지원하는 절차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졸지에 궐기대회가 인민의용군 지원이 되었다.


택준이, 영환이와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어떻게든 여기를 빠져나가자.'라고 속삭였다. 수송국민학교에는 갑자기 수천 명이 우글거리니 질서가 없었다. 교정의 앞부분에서는 상당히 정리가 되어 대오가 정연하였으나, 우리가 도착한 위치는 교문에서 가까운 곳이었고 변소도 그리 멀지 않았다. 그리고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갈 때는 인민군이 수하를 하여 나가는 것을 확인하는 눈치다.


대열의 전면에 있던 한 학생이 "기계과는 이쪽으로"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택준이와 영환이에게 "야, 나는 변소에 다녀와야겠다."고 하고 같이 가자고 하여 변소 쪽으로 갔다. 아무도 우리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변소에 가니 변소는 만원이다. 줄을 서서 셋이는 떨어지지 않고 차례를 기다렸다. 소변대에 올라 충분히 시간을 들여 소변을 보고 난 후에 얘기했다. "야, 나가자!"


교문에는 여전히 대열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요행히 도 어떤 대열 하나가 나가고 있었고, 그 선두에 있는 인솔자가 교문에 있는 파수병에게 무어라고 설명하느라 멈추어 있었다. 우리는 슬그머니 그 대열 후미에 붙어 섰다. 선두가 움직이고 우리는 초병 앞을 무사히 통과했다. 그리고 걸음을 되도록 빨리 하여 종로 쪽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다시는 학교에 가지 말자고 다짐을 했다.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하였으면 바로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서 낙동강 전선 어느 고지나 들녘에서 시체로 변하였을지 모른다.



가까스로 인민의용군 모집에서 탈출한 아버지는 학교에도 갈 수 없게 되어, 내무서원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새벽을 틈타 짐을 싸서 거처를 아현동의 희원이 아저씨 댁으로 옮겼다고 한다.


아버지는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걸었지만, 나는 혼자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스타와 페북에 나의 위치를 계속 올리다 보니 여러 친구들이 응원을 보내주었다. 사실은 좀 걷다가 힘들면 차를 타고 여행을 마치려고 했는데, 일이 커져서 슬그머니 접기가 어려워졌다.


게다가 한국카쉐어링 하호선사장이 화서역으로 와서 함께 걸으며 당신의 아버지 얘기도 해주고 진주고 학생 시절 합천에서 부여까지 걸어서 국토대장정을 하면서 터득한 물집 치료법도 전수해 줬다. 오후부터 발바닥 물집이 터져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하사장이 아니었으면 수원역까지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일은 발바닥 물집 때문에 속도를 줄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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