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 D+7

잿더미가 된 고향집

by 류병우

집을 출발한 지 꼭 1주일이 되었다. 오늘 식장산 기슭의 고갯길을 세천에서 증약까지 걸어서 넘었다. 아버지는 회고록 이야기 속에서 벌써 고향에 도착했는데, 나는 아직도 이틀을 더 가야 시골집에 도착한다. 예견된 일이지만 회고록에서 아버지의 위치가 나를 추월했다.


매포에서 금강을 건너 친구의 대고모댁에 도착한 아버지는 친구분의 아버님으로부터 대전에서 벌어진 미군과 인민군 간의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또한 아버지의 고향 동네가 전쟁터가 되어 지금 이동하는 것은 위험하니 전선이 이동할 때까지 회덕에 있는 삼촌댁에서 며칠 더 기다리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며칠을 더 회덕에서 머무르다가 마침내 전선이 영동 남쪽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고향에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이 생기기 전에 고향에 들어가서 분위기를 살피고 대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출발했다고 한다.


친구의 배웅을 받아 회덕에서 고개를 넘어 세천, 옥천을 거쳐 영동까지 온 아버지는..


정신없이 초강에서 금강을 건너 나는 같이 오던 일행과도 헤어졌다. 이곳부터의 길은 잘 알고 있다. 영동읍내까지 채 십리도 안 되는 거리다. 밤길을 걷는 것은 처음이지만 영동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틈에 끼어 읍내 쪽으로 걸어갔다. 영동읍내에 들어선 것은 거의 자정이 가까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영동에서 국밥을 먹고 나서 40리 길인 고향길로 가려고 거리에 나섰다. 그러나, 황간으로 가는 도로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혼자서 걸어갈 용기가 없어서 동행이 있을까 하고 기다리고 서 있으니 장총을 멘 인민군 세 사람이 나타났다. 내 앞을 지나갈 때 내 고향은 이곳에서 40리 길인데 황하까지 같이 갈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동무는 옷을 흰옷을 입어서 패잔병(국군이나 미군을 말하는 것 같았다)들의 저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 따라오지 마라고 한다. 결국 동행을 구하지 못하고 어느 집 처마 밑에서 새우잠을 자다가 아침이 되자 황하 쪽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황간 역전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없었다. 도로변 주민들은 전부 피난 가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같다. 아마 역전에 사람들이 있었더라면 고향에 가기 전에 남성리의 고모댁이나 구교동의 고모댁에 들러 소식이라도 들은 후 노래로 갔을지 모르나, 두 고모댁들도 다 피난 갔을 것으로 생각하고 부랴부랴 주마래미 신작로를 올라갔다.


주마래미 신작로를 올라가는 동안에도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았다. 한편으로 홀가분한 생각도 들었다. 부모 형제들이 모두 피난 갔다면 내가 처신하기가 오히려 쉽다. 임기응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외갓집 동네 안골을 향하여 올라가는데, 도로 오른쪽 밭고랑에 팻말이 박혀있다. 팻말에는 ‘이곳에 인민군 전사 다섯 명이 잠자다’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두툼하게 흙이 올라와 있다. 바로 얼마 전에 밭고랑을 파고 시신을 묻고 흙을 덮은 것이 분명하다. 그곳에서 50미터도 가지 않아 또 하나의 팻말이 있다. 이번에는 일곱 명을 매장한 표시다. 매장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인민군의 묘지 표시로 보아 이곳이 분명 전쟁터였음을 알 수 있었다. 안골에서 우리 동리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다.


신작로를 통하여 동리로 들어갔다. 학교(매곡국민학교) 교사는 아무 피해가 없고 멀쩡하다. 면사무소도 아무 이상 없다. 정자나무 주변 석해네 방앗간도 이상 없다.


신작로 변의 둥구나무에서 우리집까지는 100여 미터이다. 골목에 들어와 보니 앞집 숙부댁에 담장은 있으나 사랑채가 안 보인다. 그 옆집도 안 보인다. 당시 앞집과 우리집은 담을 나지막하게 하여 우리끼리는 대문을 통하여 왕래하지 아니하고 낮은 담을 넘어 다녔다. 앞집을 대문으로 들어가서 건넌방 쪽으로 가니 우리집 몸채가 완전히 타서 내려앉아 재가 그대로 쌓여있고 아랫채의 양철지붕도 완전히 내려앉았다. 행랑채는 변소와 잿간과 돼지 마구가 있었는데 하나도 없었다.


우리집만이 타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집 뒷집인 작은집, 옆집인 남구장네, 남정갑 씨 집, 산밑 전상운, 임경환, 정식이 집까지 전부 타서 내려앉았다.


안골을 지날 때 우리 가족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모두 피난길을 떠났고 집은 불탔다는 아야기를 들었으나, 막상 집에 와서 이렇게 하나도 남김없이 타버린 것을 보니 망연자실하였다.


불타 없어진 집을 보자 무엇보다도 제일 처음 머리에 떠오른 것은 '다락방에 있던 꿀단지!'였다.


그해 할머니 기제사 때 내려와 다락방에 올라가 보니 커다란 사기단지 20여 개가 가득했다. 어머니는 상촌에 꿀이 많이 나서 사놓았는데 여름에 꿀 값이 올랐을 때 팔면 적지 않은 돈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서울에서부터 걸어 내려오면서, 피곤하여 지칠 때면 어김없이 다락방의 꿀단지가 생각났고, 시원한 꿀물을 그려가면서 내려왔었다. 회덕에서 걸어오면서도 머리 속에서는 꿀물 생각이 간절했었다. 집이 불타고 무너져 내린 것을 보니 꿀물은 멀리 갔다고 생각했다.


그 후 세월이 흘러서도 시원한 것을 먹고 싶은 생각이 나면, 다락 속에서 타버린 꿀단지 생각이 종종 떠올랐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다다르면 생각이 단순해지고 감각적인 것에 집착하게 되나 보다.


며칠 후 이웃 봉희엄마가 우리집 식구들 소식을 전해 주었다. 미군이 소개령을 내리자 형은 상촌 쪽으로 갔다고 하니 아마도 처가댁으로 피난을 간 것 같았고, 어머니와 형수, 여동생과 숙부댁 가족은 소개령과 동시에 머슴을 데리고 소를 몰아 괘방령을 넘었다고 하고, 보행이 불편한 아버지는 차를 타고 가셨는데 어디를 가셨는지 모른다고 한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피난하였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우리집 부근만 철저하게 다 타버렸을까 궁금했다. 안골 사람들 말은 미군이 폭격을 했다고 했지만, 그 일대에 폭탄이 터진 흔적은 없었다. 그 얘기도 봉희엄마한테서 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미군이 소개령을 내려서 식구들이 황급히 떠났기 때문에 값진 물건이나 옷가지도 챙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와 형도 비상식량으로 미숫가루 정도와 여름옷 한두 가지만 가지고 떠나셨다고 하였다.


소개령이 내린 다음날부터 포성이 들리더니 며칠 후 포성이 멈추면서 인민군이 들이닥쳤다고 한다. 인민군 부대가 우리집과 작은집 일대의 집들에 들어가서 잠자고 밥 먹고 하면서 웬만한 살림은 그때 다 거덜이 났을 거란다.


그리고 며칠 후에 우리 동네에 인민군 부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쌕쌕이(제트기) 2대가 날아와서 우리집 일대를 기총소사를 해대서 불이 났다고 한다. 그 폭격이 있은 후 인민군 부대는 마을을 떠났고, 우리집은 추녀가 두꺼워서 이틀 동안 타다가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우리집이나 앞집이나 남은 것은 장독대 뿐이었다.


고향에 왔는데 나는 들어갈 집이 없고 갈아입을 옷도 없었다.



아버지가 6.25 얘기를 할 때면 어김없이 꿀단지가 등장했고, 우리에게 꿀단지는 항상 놀림거리였다.


“집은 불타 없어져서 들어갈 곳도 없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생사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 상황에서 꿀단지 생각만 할 수가 있어요?”


겸연쩍어하시던 아버지의 표정이 떠오른다.

매거진의 이전글도보여행 D+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