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 치하
여행을 떠난 지 9일째. 이제 내일이면 나도 아버지의 고향집에 도착한다.
오늘 심천 근방의 난계사당과 심천교를 둘러보았다. 난계는 영동 출신으로 세종 때 활동한 우리나라 3대 악성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난계사당 앞에는 초강천을 건너는 심천교가 있다. 대전을 출발하여 고향으로 가던 아버지는 인민군이 심천교의 통행을 차단하여 그 상류에서 초강천을 건넜다. 그때 심천교 위에는 조명탄이 터지며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가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 다리를 위로 건넜다.
아버지는 고향 집에 돌아왔지만 집은 불타고 가족들도 만나지 못해서 망연자실하였다고 한다.
점심때가 되어 주재소 쪽에 가보니 밥을 먹고 있다. 하얀 쌀밥에 배추고갱이 된장 고추장이다. 나를 보자 밥을 먹으라며 자리를 내주었다. 쌀밥이 이렇게 맛있는 것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밥을 먹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 쌀이 우리 방앗간에서 가지고 온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는 그 밥을 먹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남로당이 재건된 것 같았다. 당원 중에는 나의 친구도 있어서 모든 것을 잃은 나의 처지를 생각하여 무엇이든 인공 조직에 참여시키려 애쓰는 모양이었다. 몇몇이 논의를 하는데, 좌익 입장에서는 어느 모로 보나 반동으로 몰려서 처단될 성분인지라 고심하더니 일단 민청을 조직하는데 도우라고 하며 가입원서를 작성하라고 주었다.
전문부 때 좌익 학생들이 학생회에서의 나의 발언을 문제 삼아 제재하겠다고 하는 것을 한 친구가 나에게 민청 가입원서에 서명하게 만들어 그들의 ‘테러’를 모면했던 것이 생각났다. 나에게는 고향에서 반동 숙청을 모면할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민청 가입대상자의 연령층은 군인에 해당되는 연령층이라 대부분 피난을 갔거나 또는 피난에 갔다 돌아온 후에는 잘 나타나지 않아 결성이 어려웠다. 하지만 다른 부녀동맹, 소년단, 인민위원회 같은 조직은 순식간에 결성이 되는 것 같았다. 우리집 창고를 민청 사무실로 하기로 했다. 이 창고는 내가 소학교 3~4학년 무렵에 정부양곡 보관업을 하고자 지었던 건물이었다. 나는 날이 새면 창고 사무실에 나가 앉았다. 그러나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돌아오셨다고 창고로 기별이 왔다. 나는 단숨에 달려가 아버지를 뵙고 큰절을 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날아갔다.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네가 살아있으니 됐다.'라고 아버지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내 손을 잡았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죽었거나 인민군의 패거리가 되어 총을 들고 내려오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가족들을 나누어 흩어지는 것이 자손을 보전하는 길이라 여기고, 아버지는 태평리로, 형네 식구는 임산 처가댁으로 먼저 떠났다고 하셨다. 아버지와 형이 피난을 떠난 며칠 후 갑자기 소개령이 내려 경찰과 면직원들이 철수하면서 피난 가라고 하였단다.
숙부는 대방리의 처가댁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남아있는 가족 어머니와 명자, 숙모, 준식이, 춘강이, 문식이와 함께 쌀 한 가마니를 소에 싣고 나섰다고 한다. 갑자기 떠나게 되니 어머니는 이것을 아버지나 형에게 알릴 방법이 없어서 당시 국민학교 4학년이던 명자를 큰오빠에게 알리라고 하며 임산으로 보내셨다고 한다. 그 뜨거운 여름날 어린 명자는 걸빵을 메고 울면서 혼자 임산으로 달렸다고 한다.
명자의 기별을 받고 형님은 병중이라 자기 몸 하나 추스리기도 힘든 입장에 있었는데, 피난 보따리를 메고 병주를 보따리 위에 올려놓고 병수를 둘러업은 형수와 함께 오두령을 넘어서 60리 길을 걸어 명자를 데리고 대방리 숙부의 처가댁으로 가서 합류하였다고 한다. 만약에 형네 식구가 먼저 떠나 명자가 형을 만나지 못하였으면 명자는 가족들을 잃고 미아가 되었을 것이다.
며칠 후에는 가족들도 돌아왔다. 저녁 해가 질 무렵에 어머니와 숙모, 형수와 어린 조카들이 돌아왔다기에 단숨에 집터로 달려갔다. 어머니와 숙모는 불에 타 내려앉은 우리집 앞에서 넋을 잃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서러움과 반가움이 교차하여 대성통곡하셨다. 숙부와 형은 도중에 떨어져 밤에 들어오시기로 하였다고 한다. 가족들은 모두 무사하다고 하였다.
밤이 되어 숙부와 형이 돌아와서 함께 대책을 논의했다. 우리집은 완전히 타버렸고 정미소와 창고는 압류된 것과 마찬가지니 1) 우리집은 완전히 무일푼이 된 것을 사람들도 알고,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자. 그러니 재산 때문에 아버지나 숙부가 인민재판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2) 숙부는 대한청년단 단장이라 핍박을 면키 어려우니 돌아온 것을 알리지 말고 날이 새면 산속으로 가고 저녁 어두워서 돌아오기로 한다. 3) 아버지는 돌아온 것을 이미 알고 있고 걷지도 못하니 힘없는 노인이 된 아버지에 위해를 가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숨으면 오히려 수상케 여길 테니 앞집에서 기거하기로 한다. 4) 형은 쇄약 하여 어쩔 수 없으니 병갑이들 집에서 요양하기로 하자고 했다. 어찌하던 나는 민청에서 자리를 확보해 보기로 하였다.
동네 젊은이들이 돌아왔다. 민청이 정식으로 결성되는 모양이다. 학생 신분인 내가 서울에서 어떤 사상으로 행동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학생이면 좌익 성향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니 민청에 발을 붙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민청을 결성하는 날 학생 십여 명이 모였고, 여학생도 몇 명 있었던 것 같다. 해양대학에 재학 중이던 국민학교 후배도 있었다. 그와 안면은 있었으나, 그의 사상 성향은 잘 몰랐다. 각본이 이미 짜여 있었던 모양이다. 어! 어! 하는 사이에 임시의장으로 후배가 지명되더니 후배가 전형위원을 지명한다. 나는 탈락되었다. 전형위원들이 회의를 하더니 후배가 매곡면 민청 위원장이 되고 조직부장, 재무부장, 등등을 호명하면서 마지막으로 내게 교양부장이라는 직함을 맡으라 하였다. 나는 내가 민청에 발 붙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되어 마음이 착잡하였다.
나는 일단 교양부장 임명을 고사하였다. 공산주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바 없어 교양부장의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고 이유를 들었다. 그리고 일개 민청원으로 있겠다고 하였다. 내가 간곡히 말을 하여 불만의 표시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나 스스로 출신성분이 나쁘다는 점을 잘 알고 겸손한 마음으로 백의종군 하련 다는 뜻을 은연중에 표시하였다.
다음날 피난길에 옥천 부근에서 만났던 지인이 아버지께 인사드리러 왔다. 일제 말 사상 문제로 일경에 검거되었을 때 아버지가 신변 보증을 서서 석방되어온 터라 아버지께 특별히 경의를 표하였다. 해방 후에는 좌익운동을 한 온건한 사람이고 전향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였으나 피신해서 목숨을 건졌고, 우연히 나와 귀향길에 만나 초강을 건너다 헤어졌고, 헤어진 지 10일 만에 다시 만났으니 나는 반가웠다.
앞집 마루에 걸터앉은 그는 옥천에서 만났을 때 같은 밝고 활기찬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말로는, 남로당은 검거되어 전향하였거나, 당원이면서 행동 보류를 하였거나, 또는 심지어 좌익활동으로 투옥되었던 사람도 믿지 않는다고 한다. 일단 반당분자로 보니, 그 죄과를 씻기 위해서는 성스러운 조국해방전쟁에 빨치산 전사로 참가하여야 할 것 같다고 수심에 찬 얼굴이다. 아버지와 나는 아연실색하였다. 장차 인민의 적으로 규정될지도 모르는 우리보다 사상의 순수성을 행동으로 표시해야 하는 구 좌익이 더 다급한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 후 아버지는 의용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서울공대 학생이라는 배경을 이용해서 황간중학교의 수물과 교사의 지위를 얻는 데 성공하여 9월 28일에 미군이 매곡에 진주할 때까지 약 2개월간을 소위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