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와의 작별
원래 이 글은 2016년 7월 26일 세종시 전동면 인근을 지나며 발행했던 것입니다만, 조작 미숙으로 삭제되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다음카카오 브런치 매니저의 적극적인 협조로 본문을 복구하기는 했습니다만, 최종 버전이 아니었습니다. 수십 차례 수정을 거듭하다가 발행을 결정하는 저의 글쓰기 습관 상 발행 당시의 느낌을 완전히 다시 살리지는 못하였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휴식을 취한 덕택으로 걷는 속도가 다소 나아졌다. 아버지가 출발 2일 차에 통과한 세종시 전의면을 5일 차에 겨우 통과하고 있다. 그것도 차량 이동을 포함해서..
뜨거운 햇볕을 피하여 오후 3시 반부터 천안시 광덕면의 조치원, 공주 갈림길부터 걷기 시작했다. 이 지점에서 아버지와 하영환은 논산 방향으로 향하는 유택준과 헤어졌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대전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송락경교수가 내가 잘 걷고 있는지 숙제 검사를 하겠다고 온단다.
사진은 전의역에서 만난 어르신이 말씀해주신 625 격전지 개미고개. 엊그제 지나온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퇴각한 미8군 제24사단 제21연대의 잔여 병력이 이곳 1번 국도 상에 있는 개미고개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7월 11일부터 5일간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했다는 곳이다. 아버지는 개미고개 전투가 끝난 직후에 이곳을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석에서 서울로 돌아온 아버지와 친구들은 수일 내로 낙향하기로 약속을 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수일 내로 낙향할 것을 정하고 준비되는 대로 떠나기로 하였다. 그러기 전에 흥균이와 소룡이에게 알리기 위하여 동숭동 학교 뒤편에 있는 소룡이의 집으로 갔다. 소룡이 아버님은 해방 전에는 금융기관에 계시다가 그 당시는 무역업에 종사하셨고, 집도 양옥으로 방도 많았다. 가족으로는 부모님, 이화여전을 졸업한 누님, 동생 소연이 그리고 누이동생이 둘 있었다.
소룡이는 영어회화를 잘하여 내가 부러워하였으나 수학에는 약하여 수학과 역학에는 맥을 추지 못하였다. 그래서 중간시험이나 기말시험 때는 나를 불러 그 집에서 숙박하면서 공부를 같이 하며 잘 얻어먹기도 하였다. 소룡이 어머니는 정이 많은 분이고, 꼭 우리 어머니처럼 명식이 명식이 하시면서 항상 반겨주셨다.
소룡이는 6월 28일 한강에 끌려가다 탈출한 이후 신중을 기하게 되어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고 한다. 소룡이를 문 앞에서 찾으니 주위를 살피면서 살짝 문을 열어 주어 들어갔다. 소룡이 어머니께도 고향으로 내려가려 한다고 인사를 드리고 소룡이 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소룡이네 집에서 나와서 혹시나 하고 이화동 낙산 밑 흥균이 숙부댁으로 흥균이를 찾아갔다. 그러나 흥균이는 그곳에 없었고, 백정희가 그곳에 있었다. 정희에게 곧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한다고 하였고, 흥균이에게도 전해달라고 했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좀 처량하고 감상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그랬더니 정희가 나에게 '선생님께 부탁드릴 말씀이 있으니 잠깐 방으로 들어오시라'고 하였다. 그 집에는 정희 말고도 부인들이 두 분 더 있었다. 그래서 나는 건넌방 쪽마루에 앉았다. 정희는 방안에서 내다보면서 정면으로 나를 쳐다보지는 않고,
"선생님 누가 선생님을 찾아가서 그러냐고 묻거든 그렇다고 대답해 주세요. 꼭 그렇게 해 주시는 거지요?"
"누가 와서 무엇을 그러냐고 묻지?"
"여하간 어떤 사람이 선생님에게 찾아가서 무슨 일을 확인할 거예요. 그러거든 선생님이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다고 대답해 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제가 대단히 난처해져요."
"무슨 이야기인지 자세히 이야기를 해 주어야 내가 약속을 할 수 있지!"
정희의 이야기는 대체로 이런 이야기였다. 정희에게 호감을 가지고 접근해 오는 충주에서 올라온 배재중학교 남학생이 있었다. 전쟁이 나자 정희한테 와서 '정희를 사랑하고 있다. 나는 학도호국단 간부라서 학교에 나가면 잡혀 죽을지도 모르니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한다. 일생을 보장할 테니 나와 같이 가자.'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희는 '나는 사모하는 사람이 있어서 같이 갈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 남학생은 나의 이름과 사는 곳을 묻고 자기가 찾아가서 나도 정희를 사랑하고 있는지 확인하겠다고 했으니, 만약 그 학생이 나를 찾아와 정희를 사랑하느냐고 묻거든 내 마음에 없더라도 그렇다고 대답해 달라는 것이었다.
정희가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몇 년 전 안산파댁에 놀러 왔던 진명여고 2학년 때의 장난스러운 눈길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연인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이었고, 그리고 이것은 분명 사랑의 고백이었다. 정희의 조그마한 몸매와 맑은 눈빛과 미소를 머금은 입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아마도 대청에 부인네들이 없었으면 정희를 꼭 껴안아 주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매우 당황하여 무어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아무 말도 못 하였다. 그리고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알았다고 하고는 손을 내밀어 정희의 조그마한 손을 잡고 이제 떠나면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일어섰다. 정희는 대문까지 나와 전송해 주었다.
내가 전쟁터에서 돌아와 정희가 충주에 있는 것을 알고 내가 1952년 이른 봄에 찾아가서 만난 일이 있다. 그리고 1960년대 초 어느 날 합승차 안에서 정희와 아주 닮은 여인을 보았으나 말을 걸어보지 못한 일이 있었다.
아버지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거의 다 실명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자칫 민감한 사안에 휘말릴 것에 대비하여 일부는 내가 익명으로 처리했다. 정희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어머니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1952년 이른 봄 아버지가 찾아가 만난 것은 결혼 전에 두 사람을 비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아버지는 1952년 늦가을 어머니와 결혼했다. 어머니가 보여주신 아량을 믿고 실명을 공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