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도보여행을 마치며

by 류병우

2006년 3월 남계선생을 모시고 아버지와 함께 산소자리에 가묘를 만들던 날, 산역을 마친 후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이제 이 곳으로 모시면 되겠구나, 그 옆에 자리도 넉넉하니 나도 그 옆에 누울 수 있겠네.' 그런 느낌이었다. 아버지도 흡족해하셨다.


지난 7월 22일 오전 9시 서울의 마포종점을 출발하여 7월 31일 오후 2시 충북 영동 아버지 산소까지의 대장정이 막을 내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서만 가겠노라고 큰소리치다가 3일 만에 항복하고 '이동갈비' 판례를 적용하는 바람에 빛깔이 다소 퇴색되기는 했으나, 아이폰에 기록된 총 걸음 수로는 약 192,000걸음, 이것에 평균 보폭 70cm를 적용하면 약 130km에 해당한다. 서울-매곡 간 거리는 차량으로 이동할 때 약 220km이므로 이것을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도보 함량이 약 60%로, 절반 이상 걸었으니 도보여행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자위해 본다.


아버지의 회고록은 크게 3편이다. 고향에서 초등학교 재학 시절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유년 시대 편과, 청주로 유학한 중학교 시절 편, 그리고 이번에 일부를 소개한 1950년 6월 25일부터 그해 12월까지의 이야기가 담긴 6.25 편이다. 유년 시대는 약 63,000자, 중학교 시절은 약 27,000자, 그리고 6.25편이 가장 길어서 약 172,000자의 분량이다.


회고록을 보면 마포대교를 '현재의 서울대교'라고 하는 내용이 있다. 마포대교는 1981년에 완공되어 서울대교라고 부르다가, 1984년에 마포대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1980년대 초반부터 회고록을 쓰기 시작하신 것 같다. 아버지의 회고록에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실명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만약 유신시대였다면 당장 정보기관에서 그 사람을 잡아갈 것 같은 이야기도 언뜻언뜻 눈에 띈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써도 괜찮겠냐고 아버지께 물었다. 아버지의 대답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 보라고 쓰는 거니까."라고 하셨다.


2013년 아버지 5주기를 즈음하여 625편에 사진을 몇 장 넣어 PDF 파일로 만들어서 몇몇 사람들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무도 잘 봤다는 인사가 없었다. 스무 살짜리 우리 딸에게 봤냐고 물었더니 짤막하게 '봤어. 아빠, 재밌어.'라고 했다. 옛날 사진 속의 아버지 친구분들께도 보여드리고 싶었지만, 몇 분은 이미 고인이 되셨고 다른 분들은 이메일 주소를 몰라 보내 드리지 못했다.


아버지의 회고록 6.25편은 생존을 위협하는 체제의 갈등 속에서 한 인간이 느끼는 고뇌,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스릴, 혼돈의 시대를 함께 헤쳐 나온 사나이들의 로망,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들의 만남과 이별 같은 드라마틱한 요소가 버무려진,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한편의 대서사시였다.


어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며 절망한다. 대학을 졸업한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꿈을 펼쳐볼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취준생'의 신분으로 의기소침해져서 몇 년씩 고생하는 것을 보면,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시절과 비교해 볼 때 결코 녹녹지 않은 세상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부모님은 전쟁 통에 자신의 생물학적 생존 자체를 위협을 받던 그 시절에도, 이곳을 '헬'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가혹한 현실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온몸과 마음을 던져 일했고, 그 결과 자식들에게 지금의 안정과 풍요를 만들어 주었다.


솔직이 나는 페이스북 같은 SNS는 노출증 환자들의 놀이터라고 생각해서, 나의 생각을 주장하는 글은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해 주고 싶었다. 지금보다 더 혹독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과 우정과 사랑을 이야기하며,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해 온 사람들이 있었다고.. 그 사람들이 바로 너와 나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였다고..


이번에 내가 한 일은 아버지의 회고록 6.25편에 나오는 인상적인 Episode 중에서 몇 개를 여행의 날자 수만큼 골라내어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게 줄이는 작업을 했을 뿐이다. 글을 길게 만드는 것은 쉬웠지만 핵심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줄이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도보여행 출발 후에는 매일 20여 km를 이동하여 새로운 숙소를 정하고 자리 잡고 앉아서 한편의 이야기를 정리해 내야 했기에 더욱 어려웠다. 그러다가 '도보여행 D+4'는 발행한 글을 삭제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후반으로 갈수록 체력이 떨어지면서 집중력도 함께 떨어져 발행 후에 오탈자를 발견하고 몇 차례 재발행한 것도 있다. 전문작가들이 글 쓰는 일을 출산의 고통에 비유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브런치로 글을 쓰고 페이스북으로 알리면서 평소 소원했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격려를 받았다. 힘들고 고단한 그날 그날의 '거리'를 걷고 난 후 피곤을 무릅쓰고도 빼먹지 않고 매일 글을 쓰게 만든 것 또한 선배, 동료, 후배들의 관심과 격려였다. 혼자 걷는 동안에도 마치 수십 명이 나를 지켜보며 함께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고, 힘겹게 걷고 있을 때 직접 찾아와 함께 걸어주었을 때는 발 아픈 것도 잊고 걸을 수 있었다. 대전에서는 서울 공대 기설과 35회 동기들이 나를 반기며 함께 걷기도 하고, 함께 먹고 마시며 1980년 5월을 추억하기도 했다. 전화와 카톡도 많이 받았다.


나의 글을 읽은 몇몇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갈 것을 권유하기도 했고, 큰누나가 과장한 것이겠지만 누나 친구들도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아우성이란다. 집사람과 딸도 아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했다며 계속 쓰라고 부추기니 우쭐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글은 말과는 달라서 돌에 새겨진 듯이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비수가 되어 나에게 날아올 수도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글로 써서 표현한다는 것이 나는 두렵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볼 계획이다.


끝으로 그동안 관심과 격려를 보내 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일단 여기에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2016년 8월 동숭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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