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에서의 마지막 밤
2/16 이제는 6시만 되면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자동으로 잠이 깬다. 또 정성스럽게 스트레칭을 하고 일어나서 밖에 나와 보니 내리던 비는 그치고 흐린 날씨에 건너편 산이 흰 모자를 뒤집어쓴 듯 윗부분이 하얗게 변했다. 이곳 Ulleri에서는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내렸던 것이 해발 2500m 이상에서는 눈이 되어 내렸던 모양이다.
롯지 마당에서 롯지 건물을 올려다보니 건물 3층에 흥미를 끄는 것이 있어 살그머니 올라가 보았다. 롯지 3층 맨 끝 객실인데, 이 롯지에는 나와 할머니들밖에 없으니 빈방의 방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가 보았다. 이 방은 전망 좋은 독립된 발코니가 딸려 있고, 발코니에는 차를 마실 수 있는 작은 테이블도 하나 있으며, 화장실도 붙어 있는 트윈 베드 룸이다. 나는 이 방이 이 롯지의 로열 스위트 룸이라고 이름 붙였다.
오늘 아침식사로는 어젯밤에 이미 ‘신라면에 계란 톡’으로 예약했었다. 라면과 숟가락, 포크를 가져다주길래 얼른 방에 가서 휴대용 젓가락을 가져왔다. 역시 라면은 젓가락으로 먹어야 제맛이다. 네팔 트레킹 준비물 리스트에 젓가락을 반드시 넣으라고 네히트에 알려야겠다. 포크와 숟가락으로 먹는 라면과 젓가락으로 먹는 라면은 차원이 다르다.
매일 아침 하는 짐꾸리기라서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이 놈의 침낭 꾸리기는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영하 10도에서 편안하고, 영하 20도에서도 사용할 수 있으며, 영하 30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 동계용 침낭과 파쉬 물주머니 덕택에 지난 7일간 추위에 떨지 않고 편안한 잠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잠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자야 다음 날 트레킹을 순조롭게 할 수 있으니 안나푸르나 동계 트레킹에 있어서 동계용 침낭은 필수품이다. 종로5가 포카라에서 빌리기를 정말 잘했다. 혹시 청결도에 문제가 있을까 싶어서 씨투써밋 침낭 라이너를 사서 가져왔는데 첫날 한번 써보고 그 후로는 필요 없어서 안 썼다.
오늘의 일정은 해발 2000m 수준의 Ulleri에서 등산로 입구라고 할 수 있는 해발 1000m의 Nayapul까지 지프를 타고 가서 하산 신고를 하고, 계속 지프로 해발 1700m 수준의 Kande까지 간 후에, 거기서부터 해발 2000m 수준의 Australian Camp(일명 오캠)까지 1시간 반 정도 트레킹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에 비하면 이건 완전히 거저먹기다. 난이도를 비교하자면 북한산 정릉유원지 주차장에서 보국문까지 올라가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난 듯한 영국 아줌마 할머니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니 오랜만에 정말 따뜻하게 잤다며 인사를 받는다. 모한과 함께 언덕 위에 대기하고 있던 지프를 탔다. 혼자 트레킹 하면서 여행사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여기서도 지프 기사들과 흥정도 해야 하고 어쩌면 몇 명이 더 모여야 출발한다며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을 수도 있는데, 여행사를 이용하니 이런 부분이 편리하다. 기대 이상으로 시간도 잘 지킨다. 오히려 내가 준비에 시간이 걸려 늦은 경우는 있지만 모한은 항상 먼저 준비를 마치고 나를 기다려주고, 내가 방을 나온 후에도 자기가 한번 더 둘러보고 두고 오는 것은 없는지 살펴준다.
지프는 좁고 울퉁불퉁하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시속 5km 수준의 속도로 내려갔다. 길을 가로질러 시냇물이 흘러가는 곳도 있으니 지프가 아니면 다닐 수 없는 그야말로 오프로드다. 잠시 후 어느 마을 앞에서 운전기사가 한 사람을 태워도 되겠냐고 묻길래 뒷자리도 비었으니 “No problem”이라고 했다. 나름 차려입고 도회 나들이 가는 네팔 아줌마 한 명을 태운다. 네팔 아줌마가 차에 타더니, 운전기사, 모한, 그리고 아줌마 셋이서 네팔 말로 떠들기 시작했다. 차는 흔들거리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들이 오고 가니 마치 흔들리는 요람에서 자장가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들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눈이 반쯤 감긴 채 한 1시간쯤 산길을 내려왔을까 Birethanty 못 미쳐서 도로확장공사를 하고 있다. 길 한가운데를 굴삭기가 가로막고 서서 바위를 깨는 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 차를 포함해서 차 서너 대와 오토바이 서너 대, 그리고 대여섯 명의 보행자가 길에 서서 작업이 끝날 때까지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는 방법 외에는 도리가 없다. 그렇게 한 3~40분을 기다린 끝에 굴삭기가 도로를 정리해 주며 길을 내줘서 간신히 통과했다.
Nayapul에서 네팔 아줌마는 고맙다면서 내리고, 모한은 체크포인트에서 하산 신고를 했다. 여기부터는 소위 네팔의 고속도로라는데 무슨 놈의 고속도로가 지프가 다니는 산길과 별 차이가 없다. 희미하게 중간중간 이곳이 한때 포장도로였다는 흔적이 보일 뿐이다. 중간에 도로 공사 때문에 지체했지만 도착 예상 시간 12시에 Kande에 도착했다. 도로변 식당에서 점심식사로 생선 튀김을 시켜먹었다. 페와 호수에서 잡은 민물고기를 카레 섞인 튀김옷을 입혀 튀겼는데 맛은 추어튀김 비슷한 맛이 났다. 나름 맛이 있어서 머리부터 꼬리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네팔 음식이 나에게는 그런대로 입맛에 맞는 듯하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캠으로 올라가는 길에 모한이 어디선가 석유냄새가 난다고 한다. 난 냄새 잘 못 맡는 편이지만 나는 그런 냄새는 전혀 못 맡았다. 좀 더 가다가 모한이 아무래도 자기가 점심에 달밧 먹을 때부터 석유냄새가 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음식이 상했던 것 같다고 한다. 네팔 원주민이 네팔 음식 달밧을 먹고 배탈이 난 모양이다. 내가 먹은 생선 튀김은 맛있기만 했구먼.. 배가 많이 아프면 빨리 먼저 가서 화장실에 가라고 했더니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네히트에서 본 후기에 누군가가 오캠에서 텐트에 잤다고 하길래 모한에게 텐트를 알아보자고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화장실이 불편하지 않겠느냐고 하길래 내가 ‘널린 게 화장실인데 뭐가 문제가 되겠느냐’고 해서 둘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런데 올라가는 동안 비가 또 오기 시작한다. 생각해 보니 비가 또 밤새 계속 오면 텐트에 물이 샐 수도 있고, 우산도 없는데 자다가 또 옷을 갈아입고 텐트 밖으로 나와서 비 맞으면서 생리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바로 포기했다.
1시간 반 만에 오캠에 도착했다. 물론 나는 보통 사람들의 1.5배 시간이 걸린 것이다. 모한이 오캠에서는 Angels Heaven 롯지가 제일 좋다고 사람들한테 들었다면서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자기도 Angels Heaven에는 처음 가 본다고 한다. 그곳에서 화장실 붙어 있고 심지어 가스로 작동되는 순간온수기가 있어서 샤워할 수 있는 방갈로 스타일 방은 1500루피, 그냥 화장실 붙은 일반 방은 750루피라고 한다. 그래 트레킹 마지막 밤인데 럭저리 하게 가자고 마음을 먹고 1500루피짜리로 선택했다. 그리고 바로 짐을 풀어 배 아프다는 모한에게 정로환 3알을 먹였다. 그랬더니 이제부터는 석유냄새 대신에 정로환 약 냄새가 난단다.
그동안 트레킹 중에는 햇빛 때문에 항상 챙 달린 등산모자를 쓰고 다녔고, 롯지에 도착하면 추우니까 바로 비니를 썼고, 잠잘 때만 모자를 벗었었다. 그랬더니 항상 머릿속이 근질근질하고, 어쩌다가 모자를 벗을 때면 머리에서 비듬이 눈송이처럼 펄펄 날렸다. 순간온수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로 샤워도 하고 5일 만에 머리도 감았더니 완전히 새로 태어난 느낌이다. 이 상쾌함이란! 따뜻한 물에 면도도 할 수 있었지만 수염은 남겨놓았다. 그래도 명색이 히말라야 등반을 마치고 온 사람인데 수염이 이 정도는 돼야지..
샤워를 마치고 식당 난로가에 앉아 있는데 젊은애들이 무더기로 들어오더니 난로가에 자리를 잡았다. 네팔 룸비니 근처에서 왔는데 네팔 사람이지만 자기들도 안나푸르나 지역에는 이번에 처음 왔다면서 말을 걸어왔다. 안경 쓴 남자애는 나를 상대로 영어회화 실습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열심히 뭔 얘기를 하긴 하는데 뭔 말인지 잘 못 알아듣지 못했다. 한 여자애는 네팔라면을 봉지채로 들고 와서 뿌셔뿌셔 스타일로 라면을 부셔서 수프를 털어 넣고 과자처럼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어렸을 때는 가끔 라면을 그런 식으로 먹었는데 우리는 그걸 ‘뿌셔뿌셔’라고 불렀다고 하며 웃었다.
나는 저녁식사로 치킨윙과 사이다를 주문했는데 가지고 나온 것을 보니 날개가 아니고 허벅지를 뺀 닭 종아리를 튀겨 가지고 나왔다. 한마디 하려다가 네팔 닭은 다리로 날아다니겠거니 하고 그냥 넘어갔다.
날씨 탓인지 이곳 오캠에서도 인터넷이 안되기는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처리하지 못하고 온 일을 더는 미룰 수가 없어 로밍을 켰더니 인터넷이 연결되어 그것으로 일단 급한 불을 껐다. 인터넷을 연결한 김에 내일 Pokhara에서 묵을 호텔을 예약하려고 모한에게 추천할 만한 호텔을 물어봤다. 제일 좋은 곳은 Kuti Resort이고 두 번째로는 Hotel Lakeside이고 마지막으로는 Windfall Guest House를 얘기한다. booking.com으로 확인해 보니 각각 1박에 $60, $30, $20 수준이다. 그동안 롯지를 전전하면서 충분히 저렴하게 다녔으니 제일 좋다는 곳으로 예약을 했다.
롯지 마당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잔뜩 끼어서 별은 하나도 안 보인다. 구름 뒤로 보름달에 가까운 둥근달이 보인다. Ghandruk에서는 반달에 가까운 초승달이었는데 벌써 보름달에 가까워진 것을 보면 네팔에 온 후로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렀나 보다.
이렇게 히말라야에서의 마지막 밤이 간다.